『바그너주의: 그 현상과 여파로부터』 출고가 시작됐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편집자의 '편집' 폴더를 살포시 공개하고, 4/4분기 진행률을 공유해봅니다(폴더의 모든 타이틀이 다 막 착착 진행이 되고 있는 건 아닙니다). 3개월이 채 남지 않은 올해, 막판 스퍼트를 올려보겠습니다.🦥

『바그너주의』 읽기 ② 퀴어 바그너


1908년, 한 게이 작가가 펴낸 책에 ‘나는 동성애자일까?’를 알아보는 자가진단 질문지가 실렸습니다. 그중 한 문항이 기가 막힙니다. “당신은 바그너를 특별히 좋아하는가?”


농담 같지만 진지한 질문이죠. 19세기 말 유럽에서 바그너는 일종의 ‘질병’이었습니다. 의사들이 그의 음악이 맥박을 치솟게 하고 성욕 과잉을 부른다는 논문을 썼을 정도로요. 니체는 바그너 음악을 히스테리이자 ‘퇴화’라 부르며 애호가들이 남자다움을 잃는다고 진단했고요. 그런데 바로 그 ‘퇴화’의 낙인이 누군가에게는 초대장이 되었습니다. 성적 자유와 관습을 거스르는 사랑을 꿈꾸던 이들이 바그너에게서 자기 자신을 알아본 것이죠.


증거는 넘쳐납니다. 바그너는 고대 그리스식 남성 간의 사랑을 가장 고귀한 사랑이라 찬미했습니다. 훗날 게이들의 영웅으로 추앙될 루트비히 2세에게는 연애편지나 다름없는 서신을 보냈죠. 분홍빛 새틴을 사랑해 실내복 주름 장식까지 꼼꼼히 주문한 편지가 신문에 폭로되자 “살랑살랑 바그너”라는 풍자만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습니다.

남자들만의 기사단, 여인의 유혹에 무심한 순결한 청년이 나오는 《파르지팔》은 게이 관객들의 키득거림을 샀습니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전 세계 동성애자들의 결집 장소”로 불렸어요. 동성애 권리 운동의 창시자 히르슈펠트는 바그너를 '동성애 전당'에 모셨고, 그의 여장 취향마저 조롱거리가 아니라 “비범하게 풍성한 내면의 생명력”, 곧 창작의 원천으로 읽어냅니다. 토마스 만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바그너의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고 《트리스탄》의 그림자 아래 금지된 욕망(소아성애였으므로 금지하긴 해야 함)을 그리죠.


여성들도 바그너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브륀힐데를 노래하던 소프라노 릴리언 노르디카는 무대야말로 남녀가 완벽히 평등한 유일한 장소라며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었고, 바이로이트의 어두운 객석은 서로의 손을 찾는 연인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오페라라는 영역은 “여성이 다른 여성의 육체를 대놓고 찬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공장소”였고, 여가수 숭배 문화도 번성했습니다. 바그너 오페라를 부르는 여가수들은 인간적, 육체적 매력도 컸지만, 다루기 힘든 기질, 독립적 자부심, 구태의연한 성역할에 대한 저항의 귀감이 되었죠(멋 그 자체!).


이처럼 바그너의 음악은 분명 강렬한 파열을 일으켰지만, 해방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그너의 여성 혐오와 유대인 증오는 역사의 평가를 피할 수 없죠. 다만, 로스가 들춰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은 바그너를 둘러싼 욕망의 지도입니다. 한 시대가 감추려 한 욕망들을 음악이 끌어올렸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 안에서 "아직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것"을 찾았습니다. 100여 년 전 누군가에게 바그너는 커밍아웃의 암호였을지도요.🔐

2026 4/4분기 편집 진행률 [●●●●● = 100%]

1️⃣ 존 서머슨, 『건축의 고전적 언어』(재판), 박정현 옮김 ●●●●●
: 초판 발행 10년 만에 재판을 찍었습니다. 인쇄 중입니다. 고전주의에 대해 이렇게 쉽게 쓰인 책은 없을 겁니다.

2️⃣ 김지혜, 『오염된 동반자: 버려진 사물들과의 정치생태학』 ●●●●◐

: “무언가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때, 그 무언가는 의미를 열어주는 통로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무용’ 혹은 ‘무의미’의 집합으로 여겨지는 쓰레기가 결코 무의미의 담지자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의미 있는 동반자라는 점을 보여준다. 해양쓰레기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의미의 생성, 즉 이전에는 없었던 의미의 과잉(다른 말로 하자면 잉여나 풍요)을 포착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저자의 이 말에 많은 독자들이 동의·공감할 거라는 생각, ‘신유물론’ ‘사물의 존재론’이라 일컬어지는 논의에 반감(?)을 가진 독자에게도 가닿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서 마감 직전에 있어요(마감 전 불안은 믿음으로 이겨내^^). ‘종말에 반대하는 종말 이후’의 삶과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기다려주세요.


3️⃣ 알렉상드르 코제브, 『헤겔 철학 입문』(가제), 김동훈 옮김 ●●●◐○

: 어떤 입문은 초보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문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걸 코제브가 보여줍니다(캬아). 더불어 편집에도 색깔이 있다는 걸 원서를 편집한 르몽 크노가 보여주고요(하아...). 김동훈 서양철학자의 헤겔 사랑도 느낄 수 있습니다(크흐). 편집은 8부 능선을 넘었습니다(흐어어어어).


4️⃣ 찐 T. 민하, 『여자, 원주민, 타자』(가제), 윤영돈 옮김 ●●○○○

: 무슨 말 하는지 너무 알겠다! 통감하며 1교 절반 조금 넘게 봤습니다.


5️⃣ 레이니어 드 그라프, 『건축에 반하는 건축』(가제), 박정현 옮김 ●○○○○

: 신자유주의 시대에 건축이 부동산 자본의 도구가 되어가는 현실을 업계 내부자의 시선으로 비판해온 레이니어 드 그라프(OMA의 싱크탱크 AMO 디렉터)의 책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스타 건축가에 대한 숭배와 기존의 작업 방식을 철저히 비판하며, 건축이라는 노동과 AI, 철거와 기후 문제 등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시의성이 강한 책인 만큼 속도를 내려고 합니다. 박정현 『미로』 편집장님, 듣고 계시죠? 속도를 내주세요!🐎 감사합니다!


6️⃣ 조애나 월시, 『아마추어들!』(가제), 영이 옮김 ●○○○○

: 혹시 기억하시나요? 한때 쓰였던 ‘웹 2.0’이라는 말을?!(안다면 건강검진을 챙기세……)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문화를 비평하며 철학적인 인터넷사(史)를 써내는 원고의 초교를 보고 있습니다.

헐수할수없다
[1]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2] 매우 가난하여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 ‘없다’로 끝나는 6음절 낱말들
의지가지없다
어처구니없다
채신머리없다
온데간데없다
인정사정없다
도서출판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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