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고래잡이 이야기를 읽으며
고래잡이들은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수평선 너머에서 시작되게 마련이기 떄문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었다. 미래가 가져다줄 모든 것에 대비하며.
더그 복 클락, 마지막 고래잡이


지난 줄거리

1. 안녕하셨어요. 그동안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하루하루는 긴 것 같은데 2주는 금방이네요. 벌써 2022년도 1/6이 지나 버렸습니다. 헉 어쩌지. 
 
2. 구독자 수가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와 주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도 구독자가 확확 늘어서 에헴 에헴 하고 싶은 마음 없지 않습니다만 그런 팔자들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그릇대로 살아야죠. 구독자가 확확 늘면 여러 좋은 기회가 생길 것 같긴 합니다. 제게 좋은 기회를 주고 싶으시다면 주변 분들께 구독을 권하셔도 좋겠습니다. 안 권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3. 연휴가 끝나자 오미크론이 전국적으로 기승입니다. 그래서 일 관련 스케줄이 고무줄처럼 오락가락했습니다. 어쩔 수 없죠. 불가피하게 변하는 일정 앞에서 최대한 유연하게 대응하려 했습니다. 

4. 마감을 하다 보면 인력을 뛰어넘는 마감력이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이래서야 이걸 어쩌나' 싶은 순간들이 분명히 오는데, 또 며칠 으윽 으윽 으으 아잇 어허 허어 하다 보면 마감이 끝나 있단 말이죠. 그 기묘한 안도감과 성취감에 끌려 여기까지 왔나 싶기도 합니다. 

5. 그럴 때는 책이고 뭐고 잘 못 읽습니다. 내 놀이를 위한 책보다는 일 때문에 읽어야 하는 텍스트들이 많아지니까요. 심신이 지치면 현대 사회의 디지털 마약 스마트폰에 기대는 빈도도 높아집니다. 큰일입니다.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뉴스레터가 퍼질 수 있는 기술적 기반도 스마트폰이긴 합니다만, 역시 남을 취하게 하려면 나부터 취해 있어야 하는 걸까요. 아닌 것 같은데(...). 

6. 그래도 이번에는 틈틈이 다 읽은 책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번에 읽은 책 

더그 복 클락, 소소의책

인도네시아의 외딴 군도에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위한 고래잡이를 하는 라말레라 부족이 있습니다. 고래를 한 마리 잡아서 육포를 만들면 이 부족 전체가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이들의 포경은 고래의 개체수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여전히 이들의 어로를 막으려는 환경단체도 있습니다). 원시적인 배에 원시적인 창을 싣고 바다로 나가서 마을의 남자들이 고래를 잡는 생활이 몇천 년 이어졌습니다. 

이 부족의 생활에도 문명이 찾아옵니다. 고래를 쫒다 조난당해 죽기 직전이었던 선장은 근처를 지나던 크루즈선에 의해 구조됩니다. 노를 젓던 배에 선박용 엔진이 장착됩니다. 도로가 뚫리고 항구가 놓입니다. 이들이 바다에서 잡은 참치가 몇 달러에 팔린 후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넘어가 몇천 달러에 팔립니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고래잡이 대신 발리나 자카르타에 가서 도시의 삶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마을 어른들은 문명에 거세게 저항합니다. 선박용 엔진을 달지 않으려 합니다. 엄격한 핏줄 사회라서 다른 부족의 피가 섞인 남자에게 작살잡이를 시키지 않으려 합니다. 고래를 잡는 밧줄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키려 합니다. 

이런 식의 충돌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늘 일어납니다. 일일이 예를 들 것도 없이 작은 전통과 작은 최첨단이 늘 부딪힙니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파괴적 혁신'이 일어나 아주 적은 사람들이 떼돈을 벌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파괴적 혁신에 의해 조금씩 파괴됩니다. 맞고 틀리고 누가 착하고 나쁘고를 떠나 문명이 발전하다 보면 어딘가에서 계속 생길 일입니다. 

라말레라 부족이라는 전통적인 집단이 깨끗하고 무자비한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할까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줬을까요. 그 과정에서 이들은 진보했을까요 퇴보했을까요, 개성을 지켰을까요 혹은 잃어갔을까요. 『마지막 고래잡이』는 이 과정에 대한 책입니다. 

저자 더그 복 클락은 세계 수준의 디테일로 이 과정을 기록하고 정리합니다. 저는 이제 이런 책을 보면 월드클래스 논픽션에 들어간 자원의 양과 질이 궁금해집니다. 세계 수준의 논픽션은 자료의 출처가 확실하고 자료를 얻은 경위를 소상히 기록해 둡니다. 더그 복 클락은 3년 동안 라말레라 마을을 오가며 마을의 모든 사람을 인터뷰했고, 관련된 인류학 서적과 논문을 수십 편 찾아 읽었고, 현재 인도네시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미국인들과 몇 번씩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게 다 비용인데, 더그 복 클락은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펠로십을 받았다고 합니다. 저도 열심히 분발해서 세계 수준의 논픽션을 만들기 위한 자원을 확보하고 싶네요. 

이런저런 걸 즐겁게 읽으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던 초반에는 (부끄러우나) 문명인의 관점에서 고래잡이 부족의 이야기를 봤습니다. 아직 세상에 저렇게 고래를 잡는구나. 아직 핏줄로 사람을 가르는 사회가 있구나. 그분들이 낯설고 더그 복 클락 씨의 시점이 익숙했습니다. 읽다 보니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습니다. 읽을수록 내가 문명인이 아니라 멸종위기에 놓인 고래잡이 부족에 더 가까운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직업을 생각하니 더 그랬습니다. 제 직업이 고래잡이는 아닙니다만, 그 이유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내 일은 사라지는 전통일까
저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종이 기반 여행 잡지였습니다. 해외 여행지를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그 직장에 다니는 동안 두 달 이상 해외에 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조금 고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은 걸 배웠습니다. 어떤 종류의 배움이든 간에 말입니다.

저는 종이 잡지에서만 가능한 저널리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으니까 이른바 제도권 사회에 대한 반감과 공포도 있었습니다. 이러저러해 잡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 잡지사에 가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잘 하는 것과 버티는 것이 어려운 일이란 걸 나중에 깨달은 후에는 삶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만들어보면 종이 잡지 제작은 일종의 공예와 비슷합니다. 원고 작성은 페이지 제작의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제목과 전문의 글자수를 맞추는 일, 어떤 페이지에서 사진과 원고의 비중을 정하는 일, 너무 빡빡해보이지도 헐거워보이지도 않는 문단의 크기를 정하고 그 크기에 맞춘 원고를 작성하는 일, 이런 건 잡지 에디터를 말할 때 흔히 생각하는 '글재주'같은 것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업자들의 눈으로 종이 잡지의 완성도에 집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문단에서 한 글자만 튀어나와서 맨 마지막 줄에'완성했다'의 '다'만 남았을 때, 즉석에서 몇 글자를 줄이거나 늘려서 문단 전체를 보기 좋은 덩어리로 만들어줍니다. 스크린 옵션에 따라 문단도 바뀌는 반응형 웹페이지에서는 무의미한 터치입니다만, 저도 그런 걸 많이 했습니다. 한번 눈에 들어오면 엄청 거슬리거든요. 

그 외에도 공예로의 잡지 만들기에 남아 있는 이런저런 업무 흐름이 있습니다. 교정을 보고 대지를 올려서 그때 한번 또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보고, 마감 전 언제까지는 모든 게 다 완성되어야 하고, 그걸 완성하지 못하면 일을 잘 하는 게 아니고, 그런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세계는 제가 회사원 에디터로 일하는 동안에도 조금씩 풀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배웠던 상식은 웹이나 다른 출판물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형식 면에서도, 내용 면에서도요. 제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쓰지 않던 '콘텐츠'라는 말을 이제 모두 쓰는 동안 월간으로 잡지 '콘텐츠'를 만들던 에디터 선후배들은 자신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고래잡이』를 읽으며 제가 배운 나름의 업계 전통과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책에는 바닷가를 떠나 도시에서 공장을 차려서 성공한 라말레라 부족 사람들도 나옵니다. 그 사람들에게 고래잡이 부족은 옛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만들어보려는 것들 역시 이제는 사라져가는 고래잡이 같은 것 아닐까, 나는 그저 내 젊은 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걸까, 책을 읽는 틈틈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 저자가 훌륭한 점은 조심스럽게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라말레라 부족을 계도가 필요한 원시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화폐경제와 현대의학이 없는 세계에서 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수천년을 이어온 고유한 개성은 지켜져야 합니다만, 개성 그게 뭐라고 개성을 지키기 위해 일상이 희생되어도 안 됩니다. 라말레라의 고래잡이들도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자는 이들의 깨달음을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프란스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과거를 부활시키거나 현재를 동결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깨달았다. 그렇다면 유일한 선택은 '얼마나 많이 진화할 것인가'였다. 만약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바깥세상의 나쁘고 해로운 점을 걸러내고 이로운 점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건 가능했다.

(중략)

프란스는 라말레라 사람들이 조상님들의 방식을 이어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하나뿐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조상님들의 방식에 투자함과 동시에 현대 세계의 현실과 균형을 유지하는 경우였다.'

이렇게 라말레라 사람들이 적응해가는 걸 보며 저도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게 책이든 잡지든 카탈로그든, 저는 여전히 종이 페이지를 좋아합니다. 특유의 리듬과 종이 페이지만의 공예적 요소를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아마 계속 멋진 인쇄물을 사러 다니고, 만들고 있을 겁니다. 동시에 종이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도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금의 뉴스레터나 인스타그램도 제 버전 안간힘의 산물입니다. 적다 보니 소소하네요. 틱톡 댄스라도 춰야 하나. '후 그것만은'이라고 생각했지만 살려면 뭘 못하겠나 싶기도 합니다. 제 앞 세대의 어르신들은 이런 뉴스레터를 틱톡 댄스같은 걸로 볼 수도 있겠네요. 

웹 페이지와 오늘날의 정보 과포화 초연결시대를 통해서 만들 수 있는 좋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에 따라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종이와 웹, 온라인 콘텐츠와 오프라인 전시를 다 다루고 있는 지금 제 자신의 경험은 아주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손님들도 좋게 봐 주셔야 할 텐데, 손님들께 좋게 보여서 계속 기회를 만드는 게 제 일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한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정보량 자체도 아주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셋: 업무 근황

일을 가리는 건 거물의 특권이며 저는 거물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일을 한다고 했는데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거물이 아니어도 일을 가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온갖 일을 다 받아 하다가 손님들께 약속을 못 지키거나 성심껏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것 같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하려 합니다. 

동아일보 '2030세상'에 원고가 나갔습니다. 심야의 배달 떡볶이에 대한 원고였습니다. 이 원고에서 묘사한 떡볶이 만드는 과정은 실제 그대로입니다. 가열이 요리에서 얼마나 중요하지 알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난번 레터에 마감했다고 말씀드린 요기레터도 잘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임실의 치즈 공장에 다녀왔습니다. 임실 치즈 공장과 임실 치즈를 있게 한 지정환 신부의 이야기를 묶어 만들었습니다. 원고를 만들어 내보낼 때마다 제 눈엔 흠집이 보이고, 그 흠집을 어떻게든 때우는 게 매번의 숙제가 됩니다. 원고에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아 아직 발전의 여지가 많습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이 원고를 만들며 여러 가지 고민을 합니다. 괜찮으시면 다음에는 그 고민에 대해 적어 보겠습니다. 

무인양품에서 진행하는 '식품공장' 전시는 계속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일주일 남았습니다. 사실은 무인양품에서 이 다음에 진행하는 전시도 제가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많이 배운 걸 바탕으로 더 재미있는 전시를 만들어보려 하고 있습니다. 식품공장 전시를 찾는 분들께는 기념품으로 엽서 북을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작은 도록을 드립니다. 도록을 구성하고 거기 들어갈 사진을 고르고 원고를 적는 일이 어제 끝났습니다. 휴 기쁘군요.

곧 발송될 요기레터도 잘 마무리했습니다. 이번 요기레터는 기존의 요기레터와 완전히 다릅니다. 요기레터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거고, 한국에서 비슷한 걸 본 기억도 없습니다. 반응이 좋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결과는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뭐가 어떻게 되든 기뻐하려 합니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선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만 마무리합니다. '너무 길다' '작작 해라' 같은 말씀 해 주시고 싶다면 의견 남기기로 들어가셔서 다양한 의견 남겨 주세요.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오늘은 끝곡(?) 남깁니다. 최자의 새 앨범 타이틀곡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최자 님은 원래 가사가 멋졌는데 시인이 되셨네요. 제목은 Do what I do 입니다. 저도 두 왓 아 두 하겠습니다.

오늘도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음 레터에서는 모든 게 바뀔 수 있으니 차차 다듬어보려 합니다. 멸치 이미지는 이걸로 할지 다른 걸로 할지 생각하다 아직은 이걸로 두겠습니다. 로고 같은 게 뭐 중요하냐는 생각은 그대로입니다. 유료화를 생각하자니 지금 생각할 게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유료화 좀 하는 게 저에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 여전히 100 퍼센트 무료입니다. 

자,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에도 간단히 적으려 했는데 말이 너무 길어졌네요. 다양한 의견과 호된 꾸짖음 부탁드립니다. 꾸짖음처럼 귀한 게 없음을 점점 깨닫습니다. 모든 꾸짖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읽을 책도 할 일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혼자 일하니 일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조금 자고 오늘의 할 일을 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박찬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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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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