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라이프스타일 잡지 에디터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종이 기반 여행 잡지였습니다. 해외 여행지를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그 직장에 다니는 동안 두 달 이상 해외에 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조금 고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많은 걸 배웠습니다. 어떤 종류의 배움이든 간에 말입니다.
저는 종이 잡지에서만 가능한 저널리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으니까 이른바 제도권 사회에 대한 반감과 공포도 있었습니다. 이러저러해 잡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 잡지사에 가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잘 하는 것과 버티는 것이 어려운 일이란 걸 나중에 깨달은 후에는 삶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만들어보면 종이 잡지 제작은 일종의 공예와 비슷합니다. 원고 작성은 페이지 제작의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제목과 전문의 글자수를 맞추는 일, 어떤 페이지에서 사진과 원고의 비중을 정하는 일, 너무 빡빡해보이지도 헐거워보이지도 않는 문단의 크기를 정하고 그 크기에 맞춘 원고를 작성하는 일, 이런 건 잡지 에디터를 말할 때 흔히 생각하는 '글재주'같은 것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업자들의 눈으로 종이 잡지의 완성도에 집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문단에서 한 글자만 튀어나와서 맨 마지막 줄에'완성했다'의 '다'만 남았을 때, 즉석에서 몇 글자를 줄이거나 늘려서 문단 전체를 보기 좋은 덩어리로 만들어줍니다. 스크린 옵션에 따라 문단도 바뀌는 반응형 웹페이지에서는 무의미한 터치입니다만, 저도 그런 걸 많이 했습니다. 한번 눈에 들어오면 엄청 거슬리거든요.
그 외에도 공예로의 잡지 만들기에 남아 있는 이런저런 업무 흐름이 있습니다. 교정을 보고 대지를 올려서 그때 한번 또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보고, 마감 전 언제까지는 모든 게 다 완성되어야 하고, 그걸 완성하지 못하면 일을 잘 하는 게 아니고, 그런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세계는 제가 회사원 에디터로 일하는 동안에도 조금씩 풀려 나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배웠던 상식은 웹이나 다른 출판물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형식 면에서도, 내용 면에서도요. 제가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도 쓰지 않던 '콘텐츠'라는 말을 이제 모두 쓰는 동안 월간으로 잡지 '콘텐츠'를 만들던 에디터 선후배들은 자신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고래잡이』를 읽으며 제가 배운 나름의 업계 전통과 사라져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책에는 바닷가를 떠나 도시에서 공장을 차려서 성공한 라말레라 부족 사람들도 나옵니다. 그 사람들에게 고래잡이 부족은 옛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만들어보려는 것들 역시 이제는 사라져가는 고래잡이 같은 것 아닐까, 나는 그저 내 젊은 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걸까, 책을 읽는 틈틈이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 저자가 훌륭한 점은 조심스럽게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라말레라 부족을 계도가 필요한 원시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화폐경제와 현대의학이 없는 세계에서 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수천년을 이어온 고유한 개성은 지켜져야 합니다만, 개성 그게 뭐라고 개성을 지키기 위해 일상이 희생되어도 안 됩니다. 라말레라의 고래잡이들도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자는 이들의 깨달음을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프란스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과거를 부활시키거나 현재를 동결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깨달았다. 그렇다면 유일한 선택은 '얼마나 많이 진화할 것인가'였다. 만약 변화가 불가피하다면, 바깥세상의 나쁘고 해로운 점을 걸러내고 이로운 점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건 가능했다.
(중략)
프란스는 라말레라 사람들이 조상님들의 방식을 이어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하나뿐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조상님들의 방식에 투자함과 동시에 현대 세계의 현실과 균형을 유지하는 경우였다.'
이렇게 라말레라 사람들이 적응해가는 걸 보며 저도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게 책이든 잡지든 카탈로그든, 저는 여전히 종이 페이지를 좋아합니다. 특유의 리듬과 종이 페이지만의 공예적 요소를 너무 너무 좋아합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아마 계속 멋진 인쇄물을 사러 다니고, 만들고 있을 겁니다. 동시에 종이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도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지금의 뉴스레터나 인스타그램도 제 버전 안간힘의 산물입니다. 적다 보니 소소하네요. 틱톡 댄스라도 춰야 하나. '후 그것만은'이라고 생각했지만 살려면 뭘 못하겠나 싶기도 합니다. 제 앞 세대의 어르신들은 이런 뉴스레터를 틱톡 댄스같은 걸로 볼 수도 있겠네요.
웹 페이지와 오늘날의 정보 과포화 초연결시대를 통해서 만들 수 있는 좋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에 따라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종이와 웹, 온라인 콘텐츠와 오프라인 전시를 다 다루고 있는 지금 제 자신의 경험은 아주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손님들도 좋게 봐 주셔야 할 텐데, 손님들께 좋게 보여서 계속 기회를 만드는 게 제 일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게 한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정보량 자체도 아주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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