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에 이상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내 경우, 정해진, 단일한 한 장소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정민호입니다.
이번 주에 책장 정리를 했습니다. 중고 서점에 판매할 책들과 버릴 책들을 골라내고 나니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었어요. 그리고 남아있는 것들을 분류했더니 책장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이 정예로워 보였죠. 책장을 정리하고 집에 읽고 싶은 책들을 두면 자주 집에서 독서를 할 것 같았는데, 막상 책장 정리를 한 후로 한 번도 못 했습니다. 늘 집에서 잠만 자고 일어나면 외출하기에 바쁜 것 같아요. 그래도 저는 머릿속에 제 방에서 느긋하게 책을 펼치고 미소 짓는 제 모습을 그립니다. (물론 지금도 외출 중입니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어디에서 이 메일을 보고 계신가요. 자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일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는 정다운 번역가님이 책을 읽기 좋은 장소에 대한 글을 써주셨습니다. 이범진 편집장님의 글도 같이 보내드립니다. 어디서든 안온한 한 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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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A에게 그곳은 자신이 꾸민 자기만의 서재다.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도서관인 그의 서재. 오랜 기간 읽어온, 수집한, 선물 받은 책들로만 채워진 책장과 자신의 독서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메모장, 보기만 해도 흐뭇한 자기 취향에 딱 맞는 필기구들이 있는 곳. 거슬리는 소음이 없고, 방해꾼도 없고, 자기 눈에 꼭 맞는 조도의 스탠드가 있는 곳.
친구 B에게 그곳은 약간의 백색소음이 있는 집 앞 카페다. B에게도 서재를 취향껏 꾸미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7평 원룸에 사는 현재로서는 요원한 꿈이다. 침대가 있는 곳과 책상이 있는 곳이 분리되지 않은, 작은 공간에 화장실이며 부엌까지 다 욱여넣은 자신의 원룸보다는 보다 정돈되어 있고, 취향에 맞는 음악이 흐르고 향긋한 커피 냄새가 늘 있는 집 앞 카페에서 주로 책을 읽는다.
C는 그곳이 어디든 ‘책들 속에서 책 읽기’를 가장 좋아한다. 낡은 책 냄새가 물씬 나는 오래된 도서관도 좋고, 자기만의 취향으로 채워진 서재도 좋고, 잘 꾸며져 있어 일단 눈이 즐거운 북카페도 좋다. 그곳이 어디든 책들 속에서 책을 읽는 것이기만 하다면. 혹여 지금 읽는 책이 마음이 안 들더라도 (조바심 낼 필요 없이) 근처 책장을 둘러보면 된다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지만, C에게는 그것이 책을 읽기에 옳고도 마땅한 환경이라는 (누군가 물었을 때 전혀 근거를 댈 수 없는) 확신이 있다.
실은 이 A와 B와 C는 방금 막 내가 지어낸 친구들이다. 현실의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와 나의 상상을 섞은. 그러니까 이 장소에 대한 취향은 모두 내 안에서 나온 나의 이야기다. 내 안에는 나만의 도서관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A와 편안한 음악과 커피 향 속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B와 ‘책들 속에서 책 읽기’를 즐기는 C가 모두 있다. 내 경우, 책과 멋진 만남이 이루어진 곳은 정해진, 단일한 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적인 장소 같은 것을 따로 정해야 할까?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책 읽기에 이상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이렇게 모든 장소에서의 독서 경험에 비교적 열려 있는, 한 장소로 그곳을 국한하는 데 의문을 품고 있는 편인 내게도 그런 장소가 있을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기실 가장 이상적인 책 읽기 장소는 내 마음 한편에 늘 간직한 꿈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그 이상적인 장소 외의 모든 장소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워지는 이유일 테다. 앤 페디먼이 “현장 독서”라고 불렀던 그것. 나의 이상은 거기에 있다. ‘현장 독서’란 ‘실제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할 때 우리가…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일’ 즉 ‘책의 물리적 환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서재 결혼 시키기》(지호))을 일컫는 말이다. 책 속으로, 더욱 들어가는 것. 책의 배경이 되는, 책이 써진 그곳을 내 눈으로 보고, 그곳의 공기를 마시고, 그곳의 냄새를 맡으며 책을 읽는 것. 케냐의 높은 언덕에서 이자크 디네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읽기, 에치고유자와로 가는 기차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읽기, 팅커 계곡에서 애니 딜라드의 《자연의 지혜》 읽기 같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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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렇게 이상적인 장소에서 책 읽기를 실현하려면 품이 아주 많이 든다. 게다가 독서 중에 경험하는 최고의 만족감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적인 장소에서의 독서가 꼭 이상적인 순간을 선물해 줄지도 미지수라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언제 즈음이면 늘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멋진 친구 시프리앙이 말한 대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서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서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일지도 모르지.” -빈센트 반 고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침대에 누워 꿈꾸는,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이라면, 지금 펜을 손에 쥐고 에치고유자와로 가는 기차에서 설국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을 그리는 지금 이 순간의 설렘에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있는 것일지도.
정다운 낮에는 회사에 다니고 밤에는 번역을 한다.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십자가》 《신학자의 기도》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오라, 주님의 식탁으로》 등을 옮겼다. 팟캐스트 〈슬기로운 독서생활〉에 참여하고 있다. 〈복음과상황〉에 ‘질문의 시간: ‘사이’에서 묻다’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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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 보면, ‘책 속의 책’이 주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고전에서부터 현대소설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이야기를 전개할 때 그 안에 편지, 연설, 소설 등을 사용해 소설의 완성도를 높인다.
자칫 작위적으로 사용하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고야 만다. 주로 편지가 사용될 경우가 그렇다. 편지의 수신자보다 책 밖 독자를 더 의식한, 육하원칙의 강박에 맞추어 지나치게 세세한 내용을 적은 편지를 읽을 때는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심지어 그 편지가 매우 우연히 정적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다.
물론 대가들 소설에서의 ‘책 속의 책’ 장치는 이야기 속에 잘 녹아들고, 설령 돌출된 부분이라 느껴지더라도 강한 임팩트가 그 어색함을 압도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를테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은 매우 유명한 ‘책 속의 책’이다. 〈대심문관〉만으로 많은 논문들이 나왔고, 아마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 속의 〈대심문관〉을 읽은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현대소설에서는 《소년이 온다》에서 나오는 ‘책 속의 책’이 인상 깊었다. 출판사 직원 은숙은 가제본을 시청 검열과에 가져간 뒤 다음 달 다시 받아오는 일을 한다. ‘불온서적’의 번역자와 만난 죄로 조사관에게 뺨을 맞는다. 검열로 인해 대거 지워진 ‘희곡’으로 무대에 선 배우들은 입만 벙긋거리지만, 은숙은 어떤 대사였는지를 기억하는 장면!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책 속의 책’이라고 해야 할까.
책 앞이나 끝에 있는 ‘작가의 말’도 책 속의 책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소설에 ‘작가의 말’이 붙는 것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 소설가가 소설로(만) 말해야 하는데, ‘작가의 말’을 덧붙이는 게 사족이라는 거다. 요즘 나오는 소설들을 보면, 작가들 입장도 제각각인 것 같다. 내 경험으로는 ‘작가의 말’이 오히려 혼동을 주기도 하고, 퍼즐 조각을 한 방에 맞추는 열쇠가 되기도 하니 때에 따라 다르다. 〈복음과상황〉(2023년 12월호)에서 다뤘던 엔도 슈사쿠는 소설가가 제 작품에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굴욕이라고 여겼지만, 독자들이 《침묵》을 오독하고 있다고 판단해 《침묵의 소리》를 썼다. 아주 긴 ‘작가의 말’인 셈이다.
꼭 하고 싶은 말을 담는 ‘작가의 말’을 모아 연재를 해도 재밌겠다 생각한 즈음, 도끼로 얼음장을 깨듯 강렬한 ‘작가의 말’을 아들의 책상 위에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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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의견💌
🗣️ 아무리 살기 힘들다 하도, 했던 이야기를 또 해도 들어주는 사람, 나처럼 책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은 그럭저럭 소소하게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같아요. 이번에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행복에 감사하면서도 이대로 살아가는 것에서 헛헛함이 조금씩 남네요. 편안한 행복이 안일함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요. 조희선 목사님은 독선적인 언행이라 표현하셨지만, 여전히 독선적인 외침은 필요하다고 봐요. '내 편'이라 할 수 있는 독서모임 안에서, 그리고 울타리 바깥을 향해서도요. 그러려면 편안함을 포기해야 할 텐데, 막상 또 두렵긴 하네요. 이런저런 생각이 드네요. 조희선 목사님의 캐리커처 탄생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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