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방, 상실, 고유함 하나의 단어를 곱씹어 보는 것

마음이 편안해요. 안심되고, 안정된 느낌이 들어요. 예민함이 줄고, 둥글어졌어요. 이 상태를 감사히 여기고, 기억해 두려고요. 벌써 스무 번째 기록이에요. 어떤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시는지 문득 궁금해져요.

ch1. 문지방, 상실, 고유함 하나의 단어를 곱씹어 보는 것


글쓰기 수업과 다큐멘터리 제작 수업을 동시에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좀 더 날것의 문장들, 둥글게 다듬어진 글이 아니라 내 색이 짙게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는 마음이 편한 글이 아니라, 이상하고 낯설고 특이해서 오래 남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영상으로 제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어요. 릴스같은 짧은 영상뿐 아니라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줄 알면 할 수 있는 말이 많아질 것 같거든요.


첫 글쓰기 수업에서는 문턱, 문지방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전과 후가 달라진 경험들,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게 한 사건들을 하나씩 공유했어요. 그리고 수많은 작품에서 문지방에 대해 말하고, 그 이야기가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어요. 들으면서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결정적 순간들이 뭘까, 이런 순간들이 굉장히 작게 일상 곳곳에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다큐멘터리 수업에서는 고유함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참 좋은 단어인데, 동시에 모호하다고 느끼고 있었어요. 고유함은 해석이고, 고통을 생각하면 고유함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을 때 비로소 이해한 느낌이었어요. 타인과 온전히 나눌 수 없는 고통과 고민이 나의 관점을 만든다는 말로 들렸어요. 이런 모호한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는 일이 꽤나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영상 제작을 위해 팀끼리 논의하면서 서울이 상실한 것이라는 주제로 논의의 물꼬를 텄어요. 그러면서 상실이라는 단어를 새삼스럽게 생각해 봤어요.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한 것으로 관점을 바꿔 생각하니, 세상이 아니라 내 안으로 시선의 방향이 향하게 되더라고요. 서울이 빈 시간, 여백을 상실한 것 같다는 엄마의 대답도 여러 질문과 생각을 하게 했어요.

ch2. 불안보다 행복으로 움직이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게 제 관심사예요. 이걸 다시 깨닫게 해 준 일이 있었어요.


회사 밖에서 나로 서는 법에 대한 강의를 들었어요. 좋은 내용이었지만, 강의 후에 청중의 얼굴에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불안과 고민이 보였어요. 열심히, 성실히 회사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살면서 나를 잃어버리고, 이제는 나를 찾기 위해 또 더 열심히 성실히 사는 쳇바퀴가 슬펐어요.


나를 알고 싶고, 그래서 유일해지고 싶고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면서 독립적인 나로서 살아가는 게 멋진 일로 여겨지는 것 같아요. 좋은 흐름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찾는 게 숙제처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전에는 답을 찾고 수행하는 성실한 구성원이었다면, 앞으로는 세상과 타인에 호기심과 질문으로 움직이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종종 멈추더라도 내 속도로 가며 삶을 만끽할 줄 알고,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요.

ch3. 어른의 15분, 어린이의 두 시간


어릴 때 엄마가 저를 어린이집 등원을 시키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고 했어요. 어른은 아주 천천히 가도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인데, 제가 매 걸음마다 멈춰 서서 땅바닥의 돌이며, 꽃이며, 모든 풍경을 들여다보고 이야기해서 그랬대요. 아마 엄마와 떨어지기 싫었던 것 같아요.

봄 느낌이 짙게 벤 공기, 습하지도 춥지도 않은 온도같이 이 시기에만 할 수 있는 밤산책을 즐기고 있어요. 그러면서 어릴 때처럼 길의 온갖 풀들과 사람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만끽하고 있어요.


광명으로 이사한 뒤, 철산역에서 제 집까지 쭉 산책했어요. 가로등 빛이며 공원 화단이며, 길쭉하게 자란 꽃과 풀들, 밤이라 더 하얗게 빛나는 벚꽃들이 눈이 들어왔어요. <사라질 만큼 피어날 테니 / 허회경> 노래를 반복재생하며 거리를 걷는데, 거리의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걷고 달리는 다정한 일상이 무성영화 같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ch4. 문학적 감수성을 채워주는 사람


회사에서 졸음을 쫓으려 라운지로 나갔는데, 차장님이 화분에 물을 주고 나서 햇빛을 쬐려고 가지고 나오셨어요. 그리고 가장 양지바른 곳에 화분 두 개를 내려놓으셨어요. 처음 새싹이 발아했을 때 기분이 아주 좋았다는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어요.


저와 비슷한 연차 때 누가 버린 화분을 주워서 키웠는데 걱정돼서 물 주러 주말 출근하고, 오래 자리를 비울 때는 지하철에 들고 타서 집 가져가고 그랬다고 하셨어요. 엄청 몰입했던 경험이라고 하셨는데 마음이 말랑해지는 에피소드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어요.


이 여운이 가시기 전에, 잠시 라운지에서 보자는 과장님의 말에 호로록 나갔는데, 집 산 걸 축하한다며 영국의 골동품 가게에서 사 온 집 모형을 선물로 주셨어요. 굴뚝이 부러져서, 다시 고쳤다는 이야기, 집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저라는 말도 굉장히 따뜻했어요. 회사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채울 수 있다니, 행운이에요.

ch5. 나도 이제 식집사


우긋, 이라는 식물 가게에 방문 예약을 했어요. 보슬비에 우산을 받쳐 쓰고 가서 식물을 잔뜩 구경하고 왔어요. 초록의 생명이 가득한 공간에서 저도 모르게 귀여워,라는 말을 연발했나 봐요. 사장님이 귀여운 걸 좋아하시나 봐요, 라면서 빛과 물로 식물을 키우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동그랗게 피어나는 콩란과 통통하고 똑바르게 올라가는 용신목을 사서 집에 들고 오는데 스스로 아주 신난 게 느껴졌어요. 생명을 키우고 애정을 담아 돌보는 게, 사실은 나를 채우는 일같이 여겨진다고 생각했어요.

ch6. 화성에서 피어나는 새싹, 모락모락 갓 지은 떡 같은


같은 말을 해도,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듯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화법을 아주 애정하고, 그러다 보니 닮아가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언니가 부르면 일단 달려가요. 어디든 분명 충만하고 말랑하고 기분 좋은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요. 그리고 그 경험을 풀어내주는 조근한 말투와 섬세한데 명확한 표현이 제 마음을 사로잡을 거니까요.


메모장에 붙잡아둔 말들 중 일부를 제목으로 사용했어요. 금융권에 잘못 떨어진 것 같다, 예술과 창작의 세계에 마음이 자꾸 간다는 제 말을 찬찬히 듣다가 화성에서 피어나는 새싹 같다고 했어요. 마사지를 받은 뒤에는 눈에서 빛이 난다며, 모락모락 갓 지은 떡 같다고도 말해줬어요.


대화하다 보면, 당장 메모장을 켜서 그 표현을 붙잡아 놓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듣고 읽은 것이 나의 언어를 구성할 텐데, 제 언어를 스스로 마음에 쏙 드는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ch7. 재밌는 말, 사라지는 말


언제, 누구와 해도 괜찮은 이야기들이 살짝 피로해졌어요. 날씨 이야기나, 명절 잔소리같이 뭉뚱그려진 주제로 공백을 매워야 할 때 아쉬움을 느껴요. 말랑말랑하게 생각이 열리고 웃음과 생기를 얻어가는 대화가 많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꼭 나의 지나온 시간을 구석구석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 이야기를 해도 안심이 되고, 서로 궁금한 것이 있는 사이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깊어지는 것 같아요. 때때로 의자, 토마토 같은 하나의 단어조차 수십 개의 관점으로 다루며, 꽤나 긴 시간을 순식간에 보낼 수 있는 관계를 만나요. 이런 시간이 엄청 귀하게 느껴져요.


또 유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어요. 사촌 오빠가 어바웃타임에서 엄마의 대사를 참 좋아한다고 했어요. “여자가 예쁜 건 안 좋은 거야, 유머 감각을 기를 수 없게 하지”라는 말이에요. 유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 주고, 이 대사 자체도 유머인 게 재밌다고요.


사촌 언니 오빠들이랑 실없는 이야기도 곱씹으며 같이 웃고, 단순하고 작은 소재로도 긴 대화를 해요. 아무렇지 않은 에피소드에서도 재밌는 부분을 콕 집어내는 게 유머구나 싶고, 저도 연습해 봐야겠다 생각했어요.

ch8. 살아있는, 생생한 글


이삿짐을 정리하며 어릴 때 쓴 시를 찾았어요. 눈사람, 이라는 시를 대표적으로 남겨요. 이때처럼 마음과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듯한 글을 쓰고 싶어 졌어요. 그래서 아침마다 간단히 메모장에 일기를 남기고 있어요. 적고 보니 참 행복해 보이는 글들이라, 몇 가지 내용을 기록해요.

20260413

일요일에는 어릴 때 썼던 ‘눈사람’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짧은 문장에 쉬운 단어들로 이야기의 흐름과 마음들을 모두 담아냈다. 작은 시인이 연필로 A4용지에 잔뜩 적은 시들을 냉장고에 붙여 뒀다.

일요일에 드디어 이사를 한 내 첫 집은 따뜻한 강마루와 주광색 조명, 노랗고 흰 타일들로 아주 아늑하게 인테리어가 되었다. 아파트에서 단독주택 느낌을 내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는데, 그냥 깔끔하게 화이트 우드톤 인테리어가 된 느낌이라 약간 아쉬웠다.

걱정했던 필름지에 기포 방울이 생기거나, 벽지에 습이 묻어나거나 강마루가 찌걱거리는 이슈는 없었다. 다만, 중문이 밖에서 제대로 열리지 않고, 화장실 배수 구멍이 아주 작았다. 직접 사서 달아놓은 손잡이는 일부러 나무를 선택했는데, 물기가 묻어 위생이 걱정이 되어 업체에서 무료 제공하는 것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엄마는 첫 인테리어고, 인테리어가 원래 70% 이상 만족이면 완전 만족인 거라고 했다. 집의 카펫이나 소품, 의자가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 한가득이니 아쉬운 부분을 고심하여 더 예쁘게 보완하며 살아갈 예정이다.

그래도 온전히 나의 취향이 담긴 내 소유의 공간이라니, 엄청나게 좋은 경험이 내 앞에 놓인 게 분명하다.

20260415

어제는 병원을 다녀왔다. 깨끗하다고 했고, 깨끗하다는 표현이 참 마음이 말끔해지는 좋은 말이구나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햇살에서 벌써부터 여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병원에 다녀오면 새삼스럽게 내가 살아있고, 변하고, 늙어간다는 게 실감 난다. 그럼 왠지 감격스러운 마음이 든다.

눈이 부셔서 손으로 햇살을 가리고, 동네를 걸어서 김밥과 오이 바게트, 하겐다즈 초코맛 두 통을 샀다. 내 첫 집에서 새롭게 시작한 유미의 세포들 3의 1,2화를 봤다. 나를 꼭 안아주는 것 같은 공간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과 콘텐츠와 함께한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20260416

요즘에는 행복하다. 사실 내내 행복했는데, 요즘에는 마음까지 편안하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면 되고, 지금 내 모습이 그 자체로 좋다. 이런 마음이 하루만이 아니고 꽤 오래 지속되고 있다.

나에게 맞는 삶을 오래 찾았는데, 이제 뭔지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다. 고정된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계속 변하고 그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어떤 속도감으로 어떻게 내 시간을 구성하면서 살면 되는지, 그리고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들과 내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다. 호기심이 드는 걸 발견하고, 그걸 향해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새로운 자극을 주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큰 목표에 힘들어하기보다, 꾸준한 한걸음이 어딘가에 닿을 거고 한걸음 한걸음이 즐거우면 가닿은 결과도 멋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왠지 다 동글동글한, 이번 주 먹고 마신 것들이에요.
귤껍질 드림
essayhee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