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예정작 <엔딩까지 천천히: 미화리의 영화처방 편지>를 [월간소묘: 레터]를 통해 사전 공개합니다. 출간 예정작 <엔딩까지 천천히: 미화리의 영화처방 편지>를 [월간소묘: 레터]를 통해 사전 공개합니다. 5월 2일부터 23일까지 매주 목요일, 네 통의 편지를 띄워요.
<엔딩까지 천천히>는 영화처방사 미화리의 본격 영화처방 에세이입니다. 영화가 삶의 크고 작은 순간마다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준다고 믿는 이미화 작가가 200명의 고민 사연을 받아 25가지 고민을 추린 뒤 사연자들에게 한 편의 영화를 처방하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일, 꿈, 가족, 관계, 사랑… 살면서 품게 되는 고민들을 소중히 마주하며 미화리가 꺼내놓는 아끼는 영화들. 때로는 영화에 깊숙이 들어가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관여도 참견도 없이 다만 사려 깊게 건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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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화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결말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야기의 3막 구조(처음-중간-끝)인데요. 이를 갈등이 생겨나고 해결되는 단계로 좀 더 세분화한 것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5막 구조입니다. 주인공의 상황을 보여주는 발단,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전개, 고난이 닥치는 위기,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절정,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어 변화하는 결말로 구성되어 있죠.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것만이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나는, 그래서 주인공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즐겁습니다. 인간은 참 변하지 않는 존재인데 영화 속 주인공은 변하잖아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변하게 되지요. 그래서일까요. 나는 위기나 절정이 아닌 변화된 주인공이 너덜너덜한 깨달음을 손에 쥐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엔딩에 더 감화되곤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될 새로운 이야기가 궁금해지고요.
하지만 영화가 꼭 이 지점에서 끝이 나는 이유, 인생 2막이 펼쳐질 시작점에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이유는 앞으로 주인공에게 벌어질 일들이 영화로 다룰 수 없을 만큼 보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보통의 이야기요. 꿈을 이룬 사람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사랑이 이루어진 사람도 이별한 사람도, 떠난 사람도 다시 돌아온 사람도. 드라마틱한 서사는 딱 거기까지. 앞으로의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건 또 지겨우리만치 평범한 날들이라서, 그다음 전환점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이전처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매일의 곡선을 그려나가야 할 뿐이니까요. 그런 시시한 날들만 담은 영화가 있다면 아무도 찾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좋아지는 영화가 있더라고요. 아니, 오히려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좋으니 이제부터 시작될 주인공의 매일은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기를 바라게 되는 영화. 자신을 100엔짜리 여자라고 부르는 이치코가 주인공인 〈백엔의 사랑〉입니다.
모든 물건을 100엔에 판매하는 백엔숍. 그곳에 뚱한 얼굴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서른두 살의 이치코가 있습니다. 밤 열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해대는 40대 동료와 몰래 폐기 도시락을 가져가는 할머니, 인사도 무시하고 한심한 듯 내려다보는 손님들을 대하다 보면 “100엔, 100엔, 100엔 생활. 싸요, 싸요, 뭐든 싸요!” 흘러나오는 로고송처럼 여기서 일하는 자신도 100엔짜리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전문대를 졸업한 뒤로 별다른 기술도 경력도 없이 몇 년간 부모에게 의지한 채 살아온 이치코가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백엔숍뿐이라서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까지 보는데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릅니다. 이치코가 도무지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거든요. 이치코의 문제는 이치코 자신, 이치코로 살아가는 삶 자체라서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사회생활도 못 하고 인간관계도 별로인 이치코라면 얼마 못 가 백엔숍마저 때려치우고 다시 부모 집으로 들어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다 주인공이 파멸하며 대단원을 맺는다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처럼 끝이 날까 봐 조마조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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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엔의 사랑〉, 타케 마사하루 감독,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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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치코의 100엔짜리 일상을 지켜본 지 어언 한 시간, 이미 영화의 위기도, 절정도 모두 본 것 같아 예고된 (파멸) 엔딩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치코가 선택한 건 미래를 위한 자격증이나 취업 준비가 아닌 복싱이었습니다. 영화가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 복싱을 시작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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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도 할 수 있나요?” “서른두 살이면 쉽지 않은데. 여자 선수 테스트는 서른두 살까지거든.” “아직 서른두 살이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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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에 복싱장을 구경하던 이치코는, 정확히 말하면 운동 중인 권투 선수 유지를 훔쳐보던 것이었지만, 계기야 어떻든 복싱을 시작하게 됩니다. 정말 시합이라도 나가려는 사람처럼 백엔숍에서도, 집에서도, 일하는 날에도, 쉬는 날에도 줄곧 복싱만 합니다. 그때부터 영화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건강하지 않은 생활 습관 때문에 불어난 이치코의 몸에 단단한 근육이 붙기 시작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부모님이 운영하는 도시락 가게를 돕기도 하면서, 불퉁했던 자신에게서 서서히 탈출합니다. 잠시 사귀다 자신을 차버리고 떠난 유지 앞에서도 우물쭈물 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일요일에 열리는 시합에 자신을 보러 오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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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야. 복싱 왜 시작했냐.” “서로 막 패고 또 어깨도 두드려주고 그런 모습들. 왠지 그런 걸 하고 싶더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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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에 나간 이치코는 경험 많은 상대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경기에서 패하지만 후련해 보입니다. 그동안 연습하던 왼손 훅을 (한 번뿐이었지만) 상대의 턱에 제대로 날렸고, 땀범벅이 된 서로에게 매달리듯 뒤엉켜 어깨도 툭툭 두드려주었거든요. 자신의 인생에서 이렇게 원 없이 열심인 적은 없었고, 그래서 얻은 결과이니 패배라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치코의 시합이 결정된 날, 복싱장 대표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인생 다시 시작하게 딱 한 번만 시합시켜 달랬지? 네 펀치로는 한 방도 못 칠 수도 있지만 어디 한번 나가 봐.”
아, 이치코는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었던 거구나. 그래서 복싱을 선택한 거구나.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이겨보고 싶었다고, 이겨서 승자가 되고 싶었다고 엉엉 우는 이치코를 보며 엔딩 이후에 펼쳐질 이야기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이치코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다시 시작된 인생을 어떻게 그려나갈까요? 아무래도 이치코가 복싱 선수가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영화가 지속된다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새로 시작된 인생에도 생계는 중요하니 계속 백엔숍에서 일할 수도 있고 부모님의 도시락 가게를 이어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는 사이사이 땀범벅이 된 채로 섀도복싱을 하거나 가끔 링 위에 선 모습도 볼 수 있을 거예요. 아마 지극히 평범한 삶이 이어질 겁니다.
너무 쉽게 그녀를 포기한 내게 한 방을 먹이듯 멋들어지게 반전을 일으킨 이치코에게, 스스로 복싱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주인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밋밋한 엔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아쉽지 않았던 건 이 영화의 엔딩곡 덕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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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이 영화도 끝이 나니 시시한 내 얘기는 잊어주세요. 지금부터 시작될 매일매일은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평범한 날들이라도 괜찮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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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가 원하던 새로운 인생, 복싱으로 되찾고 싶었던 인생은 영화처럼 극적인 사건이 난무하는 인생이 아니라 남들만큼만 괴롭고 남들만큼만 행복한, 지루하리만치 무탈하게 흘러가는 보통의 인생이었겠구나. 그러곤 떠올려보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치코 자신도 자기가 어떤 시기를 통과했는지 잊고 지낼 무렵, 고단한 하루 끝에 마신 맥주 한 모금에 “아우 살겠다~” 신음을 내뱉는 장면을. 비로소 바라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옅게 웃음 짓는 장면을. 나는 안심하며 보통의 이치코로 살아갈 그녀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도 않을 만큼 뻔하기를 응원하고 싶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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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시절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1년 정도 집 밖을 나가지 않고 히키코모리 생활을 했어요. 그때 살이 많이 쪄서 온몸에 튼살이 주홍글씨처럼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살은 빠져서 원래대로 돌아왔고, 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가지 일도 해보며 현재는 취업준비 중이에요. 예전의 내 모습에 비하면 훨씬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주변 친구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늦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사실 제가 1년 동안 힘들었던 시절은 그 누구도 몰라요. 오직 나만 알고 있는 비밀 같은 건데 온몸에 있는 튼살들처럼 여전히 감추기에만 급급합니다. 이런 내 모습이 어떨 땐 처량하게도 느껴져요. 어떻게 해야 내가 가진 모습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요?
-H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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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상처가 깊은 복숭아를 자르다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다 물러버린 복숭아의 상처 부분만을 온전히 도려내기란 힘든 일이구나. 나의 상처 나고 연약한 시기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지워내기 힘들겠구나. 복숭아를 자르다가 이게 뭔 청승맞은 생각인가 싶어서, 그러고 나니까 괜히 닭살이 돋아서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었는데. 인제 와 다시 생각나는 걸 보니 H 님에게 들려드리려고 그랬나 봐요. H 님이 듣고 싶었던 말, 어떻게 해야 내 모습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제게도 큰 숙제입니다. 저도 저로 사는 게 너무 어려운 문제거든요. 그냥 이렇게 생각할 뿐이에요. 그 모든 시기를 감당해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나라고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오며 끝나는, 히키코모리를 다룬 영화의 엔딩을, 다시 말해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게 되는 전환점을 H 님도 맞이한 거겠지요. 지금 H 님이 보내는 일상은 엔딩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일 거고요.
이 책의 면면에는 살면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삶의 고민과 질문들이 담겨 있는데요. 짐작하건대 H 님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누구나 하는 고민을 나도 한다는 것, 가끔 저는 그게 내가 남들과 다름없이 무탈하게 잘 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긴 터널을 통과한 H 님의 인생이 앞으로 아주 뻔하게 흘러가더라도, 제가 그 영화의 관객이 될게요. 그러니 오늘의 가장 큰 고민은 저녁 메뉴뿐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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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공인 영화처방사. 영화를 곁에 두고 글을 쓴다. 여전히 이야기의 힘을 믿고 있다. ‘영화책방 35mm’를 운영했고, 지금은 망원동에서 ‘작업책방 씀’을 동료와 함께 운영한다. 《Moved by Movie》(2024), 《영화관에 가지 않는 날에도》(2022), 《수어》(2021), 《삶의 어느 순간은 영화 같아서》(2020)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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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영화처방사!] 첫 번째 고민 사연에 처방할 나만의 영화가 있다면 꼭 추천해 주세요.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 출간 후 저자 사인본을 보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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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리X콘텐츠 로그] 고민을 알려주세요! 영화처방사 미화리가 영화를 처방해 드립니다.(~5/10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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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신청하기: 네이버 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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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까지 천천히] 출간 전 연재,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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