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창업치고는 굉장히 운이 좋은 상황이네요. 물론 개발력이라는 실력도 있었겠지만요.
"제가 은인이 되게 많은데, 당시 정보통신부에서 했던 창업 경진대회의 심사위원 중에 한 분이 데이콤의 신사업 담당 상무셨어요. 되게 좋게 봐주시고요. 대회가 끝난 이후에 사무실로 불러서 조언도 많이 해주시고, 나중에 데이콤이 저희 소프트웨어를 약간 공동 사업 형태로 본인들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하는 것도 도움을 주셨고요."
"첫 창업회사인 에빅사의 한국 사업은 데이콤이 인수했어요. 일본 사업은 그 당시에 일본 지사장이었던 친구가 스핀오프 했어요. 여기는 지금 일본에 아직도 있습니다. 그래서 'EVIXAR'라고 검색해 보시면 아직도 24년 된 기업으로 살아있고, 제가 뽑았던 친구가 지금 대표이사로 있고요. 제가 창업자로 남아 있습니다. 지분은 없습니다만, 제가 만들었던 소프트웨어와 히스토리는 아직 남아 있죠."
-에빅사를 중도에 매각한 이유는?
"한국 사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당시만 해도 B2B 소프트웨어로 한국에서 돈을 벌기에는 좀 일렀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사업이 잘 성장하기도 어렵고요."
"두 번째로 공동 창업자들이 휴학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징집 영장이 떨어져서 군대를 다들 가야 했어요. 그 창업 멤버 중 하나가 지금 루닛의 창업자인 백승욱 의장입니다. 백승욱은 카이스트 방송국 동아리 후배인데, 공동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에요. 그 친구도 군대를 갔어야 했고, 같이 창업했던 다른 친구도 군대를 갔어야 했고요. 저는 운 좋게 당시 병역 특례 제도로, 곰플레이어를 만든 그래텍이라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그래텍 병특 출신인거네요?
"거기서 병역 특례를 3년간 했고요. 그때 기업이라는 걸 제대로 배웠던 것 같아요. 그전에는 학생이었잖아요. 비록 투자는 받았지만, 모든 것들을 그냥 책을 보고 했어야 했던 때입니다. 재무부터 모든 걸요. 너무 힘들었던 건,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죠."
"당시는 선배 창업자들이 후배들과 많이 교류하던 시기도 아니고, 벤처캐피털이 당시에도 있긴 했지만, 시드 투자를 해줬다고 지금처럼 VC가 붙어서 도와주는 때는 아니었고요. 모든 걸 맨땅에 헤딩하면서 해야 했던 게, 사실은 지금의 밑거름도 됐지만 굉장히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당연히 경영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으니까, 공동 창업자들은 어떻게 대우해야 되는지, 직원들은 뽑아서 어떻게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되는지, 이런 거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봤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던 시기였죠. 어찌 보면 에빅사를 잘 성장시키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텍은 당시엔 네이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 벤처의 대표주자' 중 한 곳이었죠.
"그래텍이라는 회사는 당시에 엄청난 성장을 할 때였어요. 제가 병특으로 입사할 때는 강남파이낸스센터에 네이버와 한 층을 같이 쓰던 시절이었어요."
"당시에 배인식 대표님과 이해진 의장님이 아주 가깝게 교류하시던 시절이었죠. 당시 그래텍이라는 회사의 창업자 네 분은 삼성전자 출신들이셨어요. 회사가 굉장히 잘 구조화되어 있었어요. 재무팀, 인사팀, 법무팀부터 해서, 개발 쪽은 CTO 산하에 프론트 개발팀과 백엔드 개발팀이 있었죠. 저는 그래텍이라는 회사에서 개발도 하고 신사업도 기획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던 3년이었습니다. 당시 배인식 대표님이 스물넷, 스물다섯이었던 저에게 막중한 임무를 많이 맡겨주셨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스케일러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쓰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설계를 해야 되고 어떤 걸 고민해야 되는구나'부터 '이런 것들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이 필요하고 또 제휴와 비즈니스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최전선에서 배울 수 있었고요. 어떻게 보면 지금 창업자들도 그런 기업의 경험이 있는 게 아마 '트라이 앤 에러'를 줄일 수 있는 되게 중요한 방법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병특 끝내고 다시 두번째 창업? 장병규 의장이 도와주셨다고?
"병특 생활이 끝나고 또 끓어오르는 이 욕망을 주체를 못하고 동료 창업가들을 좀 찾고 있었는데, 당시에 소프트뱅크벤처스가 EIR 제도라는 걸 만들어서 저한테 오퍼를 했었어요. VC가 창업가에게 급여를 좀 주면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도 같이 하고, 대신에 이 창업가가 창업을 하게 되면 거기에 투자를 제일 먼저 하는 거죠."
-전직 창업자에게 프로젝트를 맡기고, 진짜 창업하게 되면 시드를 태워주겠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창업가에게 오피스도 주고 급여도 좀 주면서 정보도 주잖아요. 포트폴리오들에게 조언도 받고. VC는 이 창업가가 창업했을 때 제일 먼저 투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까요. 미국은 그걸 많이 합니다. EIR 제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액티브하게 하지는 않는데요. 그게 제가 소프트뱅크벤처스에 처음 조인했던 때였고요. 심사역은 아니고 EIR로 들어갔죠."
"그때 크래프톤의 창업자이자, 학교 선배셨던 장병규 의장님한테서 전화를 받았어요. '준표야, 재미있는 기회가 하나 있는데 너 와서 좀 들어볼래?'라고요. 엔써즈의 대표 창업자였던 김길연 대표를 소개해 줬어요."
-이미 준비 중인 엔써즈 프로젝트에 공동창업자로 참여하는 형태?
"맞습니다. 장병규 의장님이 '엔써즈라는 동영상 검색 회사를 만들려는 팀이 있는데, 내가 봤을 때 너처럼 미디어 회사에서 일을 해봤고 기술도 알고 하는 친구가 여기 공동 창업자로 하면 좋을 것 같겠다'라고 소개했죠. 코파운딩 팀이 만들어졌었고, 엔써즈라는 스타트업의 창업 멤버로 합류했었습니다. 이게 두 번째 회사고요."
"엔써즈라는 회사는 앞의 회사에 비해서는 다들 경험들도 좀 있고 각자의 전문성도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잘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투자자는 장병규 의장님이셨고요. 그리고 제가 참여하면서 소프트뱅크벤처스까지 또 투자를 했죠."
-당시 장병규 의장님은 첫눈으로 엑싯해서 자금이 있던 상황이죠?
"사실은 그때 장병규 의장님이 그걸 파시고 약간의 휴식기였는데, 그때 후배들에게 투자를 하셨어요. 당시 본엔젤스 만들기 전입니다. 개인적으로 엔써즈에도 투자했죠. 너무 감사한 선배죠. 인생에 큰 은인 중 한 분이시죠."
"당시 엔써즈는 지금 돌이켜봐도 대한민국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모았던 회사였습니다. 카이스트, 서울대, 포항공대의 전산과 중에서도 좋은 인재들이 모였죠. 그때 모토가 'Beyond Google'이었어요. 동영상 검색에 있어서는 우리는 구글보다 잘할 거다라는 모토로 만들었고 실제로도 정말 끝내주게 검색을 잘했습니다."
-엔써즈는 말하자면 동영상 검색 서비스 벤처였던건가요?
"짧게 설명을 드리면 그 당시만 해도 구글 비디오 검색이 굉장히 후졌어요.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검색하면 인기 있는 동영상 몇백 개가 똑같은 게 나왔습니다. 분간할 방법이 없어서 구글의 크롤러가 모으기만 한 거죠. 근데 엔써즈는 동영상을 긁어와서 동영상을 분석해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동영상의 DNA라고 표현하는데, 몇 가지 특징점을 뽑으면 이 동영상이 아무리 변형이 되고 아무리 편집이 돼도 같다는 걸 알 수 있죠. 전 세계에 있는 동영상을 긁어서 같은 걸 다 묶어요. 그룹핑이 되잖아요. 그룹핑이 되면 저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이 그룹이 클수록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걸 추정할 수 있죠. 검색 결과에 제일 중요한 건 랭킹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또 보잖아요."
"이 그룹의 크기와 얼마나 최근에 올라왔느냐에 대한 시의성을 합쳐서 랭킹을 내려봤더니 너무나도 압도적인 검색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만반의 준비를 해서 공식 서비스 런칭을 했습니다."
-구글보다 좋은 동영상 검색 기술이었는데도 시장에선 안 먹혔다?
"일단은 포털들이 본인들 카페나 이런 데 있던 영상들을 저희가 크롤링해서 가져가는 거에 대해 대단히 불편했고요. 차단을 했어도 긁어올 수도 있긴 했는데, 보니까 프라이버시 이슈도 있었어요. 왜 이 포털들이 불편했냐 하면 저작권이 없는 영상들이 엄청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예요."
"당시에 유튜브도 마찬가지였고요. 암묵적으로 그냥 묵인하던 시절입니다. 저희가 이걸 다 긁어내니까 그 당시에 너무나도 많은 컴플레인들이 들어왔고요. 저희도 이걸로는 머니타이징을 못하겠다 생각했죠. 뭐냐 하면, 우리가 너무나도 좋은 콘텐츠 결과를 보여주지만, 이게 다 불법인데 이걸 어떻게 수익화를 시키지라는 고민을 했고, 결정을 내렸어요. 그 검색 엔진을 닫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