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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FEB. WINTER LETTER



문경연
Mun Gyeongyeon
아날로그키퍼 대표이자나의 문구 여행기저자. 기록의 힘을 믿으며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문구를 생각하고, 만들고, 소개합니다.
미술관에서 천장을 보는 사람

안녕하세요. 안에 있는 시간이 부쩍 길어진 겨울 아침에 편지로 인사를 건넵니다. 저는 아날로그키퍼라는 문구 브랜드의 대표이자, 기록의 힘을 믿으며 저만이 쓸 수 있는 원본으로써의 기록을 쌓아 가는 쓰는 사람입니다. 

계절을 차별하고 싶지는 않으나 유독 겨울이면 코트를 맡기고 가벼운 몸으로 거닐 수 있는 미술관이 그리워집니다. 살랑살랑 춤을 추듯 몸을 움직이며 미술관을 걸으면 건물 밖에 내려앉은 추위나 코트와 함께 맡겨버린 삶의 크고 작은 숙제들은 금세 잊혀집니다. 미술관과 작품 그리고 나만이 존재하는 느낌을 받는데요, 어느 날은 피난처로 느껴지기도 해요.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 미술관(Hamburger Bahnhof Museum fur Gegenwart) ⓒ문경연
4년 전 겨울, 저에겐 정말 그랬어요. 저는 취업을 하기 전 모아둔 돈을 긁어모아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첫 여행지인 파리에서부터 저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나를 만나버렸고, 여행의 의미를 시작부터 놓치고 말았는데요. 가난한 여행자인 저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내내 미술관으로 숨어들곤 했습니다. 그곳에선 그래도 시간을 그저 뭉개고 있다는 느낌을 덜 받을 것 같았거든요. 

하루 온종일 있을 수 있는 곳에서 작은 작품 앞에선 허리를 잔뜩 굽히고 키가 큰 작품 앞에서는 까치발을 들며 작품 사이사이를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피난처처럼 숨어들어간 곳에서 된통 혼나고 말았다는 것인데요, 어떤 확실한 시작도 펼쳐지지 않은 취준생의 눈엔 갤러리에 걸린 모든 작품이 도착지에서 화환을 받은 마라톤 선수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치기 어린 질투심과 부러움에 휩싸였어요.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 미술관(Hamburger Bahnhof Museum fur Gegenwart) ⓒ문경연
저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 앞에선 유독 주저앉고 싶었고, 마음이 계속 구겨졌습니다. 겨우 붙잡고 다음으로, 그다음으로…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모르는 골목 귀퉁이를 돌고 돌았어요. 

그러던 중 무심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봤습니다. 미술관에선 오로지 전진만 있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과거의 저는 무척이나 답답했나 봅니다. 수많은 작품들 앞에서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들고 미술관의 천장을 바라본 거예요. 그 순간의 기분은 잊히지가 않습니다.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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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음식을 먹고 
얼음 콜라를 벌컥 마신 것처럼, 
지난한 등산 후 정상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신 것처럼, 
엄마의 속 시원한 해결책처럼, 
때마침 튀어나온 재채기처럼, 
헤매지 않고 선택한 완벽한 단어처럼, 
오래 걷고 난 후에 뒤꿈치를 들어 종아리를 
길게 스트레칭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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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와이탄미술관(Rockbund Art Museum) ⓒ문경연
그렇게 개운하고 깔끔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지금까지 억지로 욱여넣었던 감상, 감정, 생각과 기분들이 차곡차곡 다시 정리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취할 감정은 거두고, 군더더기의 생각은 흘려보내는 방법을 찾은 거죠. 

그날부터 저는 미술관에서 천장을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미술관에선 갤러리에 들어가기도 전 로비에서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구요, 작품보다 중정의 유리천장으로 기억되는 곳도 있습니다. 갤러리 중간에 의자나 벤치가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구요. 

오르세 미술관(Orsay Museum) ⓒ문경연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정리하고 있으면 천장의 디자인과 상관없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는 듯했습니다. 좋았던 색, 액자와의 조화, 당당한 터치감, 뭉개진 부분이 주는 상상의 여지, 인물화 속 눈동자가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 내 작업으로 연결시키고 싶은 부분,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작가의 이름, 내 앞에 서있던 사람의 고뇌하는 뒷모습을 곱씹을수록 내가 만든 뭉글뭉글한 구름이 두둥실 떠오르는 듯했어요. 

그렇게 천장을 보며 정리했던 마음이 모여 지금의 제가 되었을까요. 여전히 미술관은 저에게 피난처처럼 느껴지지만 적어도 미술관 출구에서 발끝에 정리되지 않은 미련을 질질 흘리며 나오는 일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 ⓒ문경연
편지의 가장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추위를 몸에 칭칭 두른 이 계절은 미술관이 나를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끌리고 마는데요.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요즘은 무슨 전시가 진행 중인지 더욱 관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들어 간 미술관에서 오롯한 흡수의 경험보다 나의 어지러운 생각이 크게 느껴진다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요? 벤치가 있다면 앉고, 벽이 있다면 기대도 좋아요. 재빠르게 다음, 이다음으로 건너가기 전 눈과 마음을 정리하는 거예요. 그렇게 차곡차곡 정리한 마음을 가득 채워 미술관 밖으로 나왔을 때, 푹 잔 밤이 지나고 깊게 기지개를 켠듯한 기분이 들 거예요. 

그러니 우리 미술관에서 함께 천장을 보기로 해요. 맑은 하늘에 내가 빚은 구름을 띄우며, 그것들이 모이고 모이다 비가 되어 나를 흠뻑 적실 때까지요. 내린 비로 땅은 단단하게 굳고, 그 위에 자라날 무언가는 나 자신 그 자체일 거예요. 

그날까지 우리가 도는 골목마다 맑은 하늘이 펼쳐지길 바라며. 겨울 아침의 긴 인사를 마무리합니다. 
모두의 겨울에 개운하고 깔끔한 기억이 가득하기를!

    For your wonderful winter.
    계절의 경계에서 당신께 편지를 띄웁니다. 겨울의 이름을 담은 편지는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따스한 마음을 나누면 좋겠다는 소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나눈 온기로 올 한 해를 안녕히 지내길 바라봅니다. 

    모든 예술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봅니다. 그림을 통해 사람과 삶, 나를 만난 9인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월부터 3월까지, 겨울과 봄 그 사이에, 매주 금요일마다 당신의 편지함으로 찾아갑니다. 답장을 써보내주셔도 좋아요. 우리 함께 예술의 찬란함을 느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요.
    EDITOR 박세연  DESIGNER 제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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