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유망주, 중고 신인과 같은 말을 연예·스포츠 뉴스 면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한 시기에 큰 주목을 한 몸에 받고 미래가 기대되는 듯하다가 큰 임팩트 없이 그 시기가 지나가고, 또 얼마 후 다시 잠깐 주목을 받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이들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반짝 스타보다 나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짝하고 지는 별이 아닌 꾸준히 누군가 눈 여겨보길 바라며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스타덤에 오를 날이 올 수도 있겠죠?

상권이 형성된 지역들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랜 시간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상권이 어떤 테넌트나 리테일러로 인해 갑자기 눈에 띄는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주변으로 다른 리테일러들이 몰리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 상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고 재방문 고객을 잡지 못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지역이 다시 쇠락하기도 합니다. 이태원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며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온 이들이 자유로운 감성으로 형성한 ‘경리단길’과 홍대에 있던 소자본 상인과 예술가들이 대체 공간으로 찾은 ‘문래동 골목’들, 대학가 주변 상권으로 만들어진 ‘샤로수길’ 등은 처음엔 새로운 거대 상권이 될 것처럼 높은 관심을 받았으나 반짝 인기를 끌어모은 뒤 대형 자본의 침투, 젠트리피케이션 등으로 인해 오랜 기간을 버티지 못한 채 시들해져 갔습니다. 이에 반해 뜰 듯 안뜰 듯 매년 잡지나 매체에 소개되면서 꾸준히 잔잔한 주목을 받고 있는 지역이 있습니다. 용리단길로 명명되기도 하고, 삼각지로 통합되어 불리기도 하는 이 지역은 어떤 방식으로 꾸준히 주목받으며 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는 것일까요?

삼각지는 본래 4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환승 지역으로 하차하는 승객보다 환승하는 승객들이 훨씬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때문에 지역 상권이 활발히 성장하거나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특별한 요소가 있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목적지를 향해가는 중에 지나치는 곳에 지나지 않았었습니다. 삼각지 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대구탕 골목과 근처 맛집들은 40여 년을 그 자리를 지키며 꾸준히 사랑받아온 공간입니다. 처음 매스컴에 집중적으로 삼각지 부근이 소개된 것은 수요 미식회에서 이곳의 맛집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던 2017년 경입니다. 대구탕 맛집 ‘원 대구탕’, 생선구이로 유명한 ‘대원 식당’ 등이 알려지며 지역 주민들과 아는 사람만 알던 오래된 노포들이 점차 전국적으로 유명한 맛집으로 변해갔습니다. 비슷한 무렵 미식가로 유명한 래퍼 최자가 SNS를 통해 삼각지의 ‘평양집’을 내장 곰탕 맛집으로 추천했고, 이는 삼각지를 젊은 세대들도 즐겨 찾는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신용산역 1번 출구부터 삼각지 역 3번 출구 사이 이면 도로가 ‘용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트렌디한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이 시점과 멀지 않은 미래의 일입니다. 일찍이 LS 타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기존 상권, 래미안 용산, 용산 푸르지오 써밋등의 입주와 맞물려 개관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유동인구의 증가와 함께 상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급 주거 거주민과 뷰티 브랜드 특성상 주를 이루는 여성 직장인 층, 사옥 내 감도 높은 F&B 브랜드들을 찾아오는 젊은 방문객들은 인근 상권의 주 타깃이 되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한남동 한식 맛집으로 유명한 ‘파르크’, 용산의 줄 서서 먹는 태국 음식점 ‘콘타이’, 식빵으로 유명한 베이커리 밀도의 카페 ‘카페 알토 바이 밀도’ 등 서울 각지의 유명 맛집들을 모았으며, 신용산부터 삼각지에 이르는 지역들엔 이곳을 찾은 젊은 층을 흡수할 수 있는 감도 높은 신규 공간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식 브런치를 만드는 브런치 카페 겸 베이커리 ‘카데트’와 반반 카레의 중심을 밥으로 나눈 모양이 이색적인 대구에서 올라온 ‘모나미 카레’, 건강한 패스트푸드를 지향하는 ‘위믹스’, 독일식 홈메이드 디저트와 가정식을 만드는 레스토랑 ‘카키바움’ 등은 이 시기 처음 용리단길을 이끌어간 주역들이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과 근처의 분위기를 바꾸는 새로운 공간들

아모레퍼시픽 사옥과 이어지는 용리단길만 용산으로 사람을 불러 모았던 것은 아닙니다. 삼각지역 8번 출구, 다른 맛집들과는 조금 동떨어진 이곳에 위치한 ‘몽탄’은 오직 이곳 만을 위해 용산을 찾은 사람들로 줄을 세웠습니다. 별다른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주변 공간들 사이 홀로 우뚝 서 있는 붉은 적산가옥의 외관이 입장 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비장하게 느껴집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의 시그니처 우대 갈비를 짚불에 훈연하고 있는 모습이 시각과 후각을 압도합니다. 맛집이라고 해서 방문했는데, 줄만 길뿐 별다른 특징이 없는 곳들도 많지만 몽탄은 재방문 고객들로 점점 더 긴 줄을 세워 나갈 만큼 그 맛으로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전국 맛집을 꿰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개그우먼 이영자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몽탄을 맛집이라 언급하며 방문하자 이후엔 줄 서서도 먹기 힘든 맛집이 되어 현재까지도 그 열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삼각지를 멈춰 서게 만드는 가장 핫한 지역으로 만들었음은 물론 우대 갈비라는 메뉴에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2019년 이 권역을 각인시킨 또 하나의 외식 브랜드를 묻는다면 베트남 요리 전문점 ‘효뜨’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전까지 용리단길의 맛집들은 메뉴의 특색이나 공간의 콘셉트는 있었어도 개별 공간들이 크게 지역의 분위기를 좌우하거나 지나가다가 눈에 띄어 들어갈 수 있는 공간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오픈한 효뜨는 한순간 동남아로 여행 온 듯한 분위기의 시선을 압도하는 외관으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더불어 현지를 떠올리게 하는 쌀국수의 깊은 맛은 이들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며 용산의 숨은 맛집으로 자리 잡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후 효뜨에 좋은 반응들이 지속되자 이곳을 구심점으로 주변에 강한 콘셉트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브랜드들이 하나 둘 모여들며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모습의 용리단길의 윤곽이 잡혀갑니다.

작년부터는 이 거리가 본격적으로 들썩입니다. 용리단길이라고 해도 거리를 두고 하나 둘 생기던 작은 가게들과 그 사이 많던 공백들이 점차 밀도 있게 채워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긴 골목 중간중간 점처럼 존재했던 기존 가게들 사이에 생겨난 감각적인 브런치 카페, 레스토랑, 와인바들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거리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갔습니다.

안쪽에 작은 테라스를 가진 ‘베르트’는 이전에 이 근방에 없던 유럽 감성을 담은 브런치 카페 겸 와인바로 붉은 벽돌의 건물에 곳곳 보이는 콘크리트 노출부와 음각으로 새겨진 레터링이 이국적이면서도 모던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구획이 나뉜 내부엔 큰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 채광이 있는 공간, 프라이빗하게 안쪽에 숨겨진 공간과 테라스까지 다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갈한 식기들, 먹음직스러운 플레이팅으로 당장이라도 SNS에 올리고 싶은 비주얼을 자랑하는 음식까지 젊은 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무렵 생긴 ‘해피 블루’나 ‘파브’ 또한 지역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일조합니다. 이들은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로변에서 바로 마주할 수 있어 용리단길 골목 안쪽 숨은 공간들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해피 블루의 1층은 와인과 치즈를 구매할 수 있는 보틀 숍, 2층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눈에 띄는 와인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와인의 가격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며, 레스토랑이 아닌 와인바들은 보틀로만 주문이 가능한 곳이 많은 데 반해 오늘의 와인을 잔으로 즐길 수 있어 가볍게 방문하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통유리로 시원하게 매장의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감각적인 공간에 자리한 파브는 다른 와인바보다 조금 더 요리에 집중한 공간으로 내추럴 와인에 페어링 하기 좋은 요리들을 내어 방문하는 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습니다. 가격대는 조금 있는 편이지만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의 대표가 추천하는 메뉴에 어울리는 와인 리스트는 언제나 실패가 없어 파브는 늘 만석을 이룹니다.

올해는 작년에 이어 삼각지와 신용산역 사이의 골목골목, 공실 공간들이 빠른 속도로 빼곡히 채워져 나가며 손님들로 북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효뜨의 대표가 만든 ‘꺼거’는 중화요리 전문점으로 효뜨처럼 외관과 인테리어까지 갖춘 현지식 콘셉트로 지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맛집이 되었습니다. 바로 건너편 골목에선 이탈리아 길거리에서 지나친 듯한 모습의 ‘포카치아 델라 스트라다’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포카치아와 샌드위치, 프로슈토를 만날 수 있으며 여기에 이탈리아에서 마셨던 아페롤까지 더하면 잠시 이곳이 이탈리아가 아닌지 착각하게 만듭니다. 서스와 유리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모던한 외관에 그래픽 사이니지를 보고 찾아야 하는 ‘PPS’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생 버거 맛집으로 불리며 많지 않은 메뉴로도 손님의 발길을 끊이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지역이 만들어낸 무드를 고급스럽게 풀어낸 어프로치는 한남동, 도산공원 부근에서 볼 법한 이미지의 브런치 카페로 골목 안쪽에 숨듯이 위치한 단독 주택을 개조하여 터를 잡았습니다. 큰 나무가 보이는 야외 테라스 자리와 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가 어프로치의 메인 포토존으로 항상 가장 먼저 자리가 찹니다. COFFEE & ALL DAY BREAKFAST라는 모토로 간단한 영국식 브런치 요리들을 저녁까지 판매하며 매장 입구 쪽엔 ‘어프로치 숍’이라는 이름의 작은 편집매장이 있어 어프로치의 감성이 담긴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용리단길에 모여든 감성공간들의 방점을 찍는 듯한 어프로치의 등장은 이 일대의 무드를 새롭게 정의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어프로치가 유럽 감성으로 상반기 용산을 태그로 한 SNS를 물들였다면, 감성은 감성인데 미국 감성이 물씬 풍기는 ‘쌤쌤쌤’은 하반기를 평정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가게들을 닮은 외관과 인테리어, ‘초코를 사랑하지 않아도 분명 사랑에 빠질 브라우니 타르트’, ‘미국에 살 때 셰어하우스 이모님이 해주셨던 그 맛의 새우 파스타’ 등의 위트 넘치는 메뉴 설명은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와 오픈 직후부터 당연하단 듯 긴 웨이팅을 감당하게끔 했습니다. 쌤쌤쌤을 포함해 용리단길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카페, 레스토랑, 바들은 같은 거리 안에 있으면 안 될 것처럼 이질적이지만 그런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공간들이 모여 있다는 자체로 새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어 이 다양성을 아이덴티티로 한 하나의 큰 상권으로 점차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5년간의 타임라인을 돌아보면 이미지만으로도 이 거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삼각지에서의 저녁을 떠올리면 익숙했던 대구탕 골목, 곱창 맛집에서 마시는 맥주와 소주가 어느새 브런치 메뉴와 이탈리안 요리에 곁들인 내추럴 와인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기가 있던 공간들이 입지를 빼앗기거나 이 지역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공간이 하나씩 늘어 갈 때마다 그 공간을 즐길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의 규모가 키워져 나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다른 지역의 대체 공간으로 형성되었다가 시들해진 동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내몰림으로 무너져버린 상권들과는 달리 한 번에 우르르 몰리진 않았지만 퍼즐을 맞추듯, 구획 별 색칠놀이를 하듯 채워지는 이 거리는 차근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동네를 바꿔가고 있습니다. 주차공간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근원적인 한계와 발전 정도에 따라 피치 못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등은 지역이 더 큰 상권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중심지에 있다는 접근 용이성과 인근 고급 주거를 중심으로 한 탄탄한 배후수요, 최근 이국적인 풍광으로 이미 사진 명소로 핫하고 점진적으로 개방되어갈 용산공원의 방문객 유입 등으로 점차 상권은 커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하루아침에 번쩍하고 뜬 대형 상권은 아니지만 노포와 모던한 공간들이 공존하고,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브랜드들이 계속해서 늘어가는 이 지역은 매년 몇몇의 상징적인 외식 브랜드의 오픈과 비슷한 결을 가진 작은 가게들로 꾸준한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만년 유망주인 것 같던 삼각지부터 신용산까지의 골목들은 아직도 더 반짝이게 빛날 날들을 기다리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F&B 외에도 다른 문화, 예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리테일 공간들까지 유입되어 더욱 반짝이고 롱런할 수 있는 상권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