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호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정의란 무엇인가

ft.〈살인자ㅇ난감〉, 《죄와 벌》

현재 네이버 웹툰을 영상화 한 <살인자o난감>이 국내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최근 넷플릭스 흥행 K콘텐츠들처럼 잔혹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가득한데요. 창비 문예지 2022년 여름호에 실린 내용이자 쇼트레터 4호에서 언급한 내용, “예술의 비판이 비판 대상에게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 혹은 그러한 비판의 내용 자체가 자본주의 문화 상품의 클리셰이자 유망한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우려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느낌입니다.

 

범죄의 적나라한 연출은 때로 사건의 진실을 직시하게 하고, 위험을 경고하고, 나쁜 이들의 잘못을 부각시키고, 악을 경계하게 하지만 최근 K콘텐츠들과 소비 과정을 보면 그런 의도들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작품은 원작의 의도가 훼손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데요.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경향신문 칼럼에서 잘 다루고 있습니다. 본 내용도 이 칼럼의 작품 리뷰를 전제로 합니다.

 

@넷플릭스 <살인자ㅇ난감>, 원작의 미덕은 어떻게 흔한 핏빛 K드라마로 변질됐는가

(이하 칼럼 인용문은 문장 끝에 *를 표시했습니다.)


“살인과 불법촬영, 강간 등 온갖 흉악한 범죄와 악의가 넘쳐나는 작품 속 세계에서 꼬마비 작가 특유의 이등신 캐릭터와 네 컷 만화 형식을 이용한 간결한 연출은 이야기의 심각성과 문제의식을 유지하되 반사적 혐오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의도치 않게 죽인 이들이 알고 보니 법망을 피해온 인간말종이더라는 주인공 이탕의 능력을 비롯해 <살인자ㅇ난감>의 설정과 반전 상당수는 일종의 사고 실험에 가까우며 이러한 만화적 형식을 통해 범죄의 잔혹성에 매몰되지 않고 그 잔혹함의 죗값을 판단할 도덕적 전제나 믿음, 상식에 대한 질문을 더 효과적으로 던질 수 있었다.*

 

“전차 이야기 같은 가상의 이야기는 실제 선택 상황에서 부딪히는 불확실성이 빠져 있다. … 하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는 도덕적 분석에 유용한 도구가 된다. 가상으로 만든 예는 ‘만약 작업자들이 전차를 먼저 발견하고 옆으로 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같은 만일의 경우를 배제하여, 중요 도덕 원칙만 따로 분리하여 그 원칙의 힘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_<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p.47

 

원작은 ‘트롤리 딜레마’와 같은 설정처럼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람 간에 거리감이 지켜졌지만 이번에 공개된 넷플릭스 <살인자ㅇ난감>은 확실히 자극과 사적 제재의 통쾌함에 매몰되어 새로운 철학적 고민으로 시청자들을 이끌지 못했다는 겁니다.

 

곧 <오징어 게임2>도 나오고, 계속 이런 소재의 작품들이 흥행하는 현재에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쇼트레터 20호는 영상화 작품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원작의 원래 의도는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런 소재의 작품이 원래 우리에게 제공했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앞으로 이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 고민해 봤습니다.

*스포주의

*해석이 틀릴 수 있습니다

죄와 벌

주인공 이탕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기 전 읽던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입니다. 살인보다 그에 전제된 주인공의 사상(정의관) 및 행동 심리에 초점이 맞춰져 지금까지도 철학적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인凡人(평범한 사람), 비범인非凡人(특별한 사람)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살인 후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며, 딜레마에 휩싸이고, 그를 돕는 이가 있다는 점에서 <살인자ㅇ난감>과 많이 유사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원래 자신이 죽이려던 노파 외에 무고한 그의 여동생까지 의도치 않게 죽이게 되면서 자신의 정의관과 행동에 모순이 생깁니다. 자신은 나쁜 사람을 죽이고 비범인이 되고자 했는데 무고인을 죽이면서 비범인이 되는 데 문제가 생긴 것이죠. 또한 비범인의 조건이었던 ‘다수를 위한 대의’ 목적도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는 개인적 의도에 의해 흐려졌다는 사실이 주인공을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천만에요, 당신은 도망치지 못합니다. 혹시 농사꾼이라면 도망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이미 자기의 이론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무얼 믿고 도망치겠습니까? 도망치면 그곳에 당신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공기가 있다고 믿나요? 혹시 도망친다 하더라도 당신은 결국 제 발로 돌아오게 될 겁니다.”_죄와 벌

 

자수를 하지 못하고 딜레마에 시달리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모순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가 대의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죠.

진짜 비범인이 있다면 어떨까?

“한편 원작에서 이탕의 능력은 슈퍼히어로의 초능력이 아닌 신의 권능에 가깝다. 악의에 대한 감지 능력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죽이면 악인임이 밝혀지는 기적. 여기서 옳고 그름은 이탕이 증명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에겐 이미 선결된 일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할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의 허락에 비하면 법의 허락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인자ㅇ난감>은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짜 비범인이 있다면 어떨까?’ 라스콜리니코프가 실패한 일을 성공시켜 보는 것이죠. 살인을 하면 족족 나쁜 놈이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증거도 남지 않는다. 이 전제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새로운 철학적 질문이 이것입니다. 이런 ‘신적인 폭력’*(판결)은 정당한가?

 

이 새로운 3의 정의에 대한 정당성 판단을 위해 우리가 자주 사용하던 것부터 써봅니다.

 

  1. 사적 제재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공식 예고편  

라스콜리니코프의 정의에 제약을 걸었던 것은 행동에 대한 모순된 의도와 믿음입니다. 믿음과 의도가 한치의 오차도 없다면 그 행동은 정의인 것입니다. 즉, 각 정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을 믿는 대상의 ‘믿음’에 달려있으므로, 각각 정의에는 이를 믿는 인물이 존재합니다. 난감은 법을, 송철은 사적 제재를, 이탕은 신적 판결을 대표합니다. 이들의 믿음과 신념에 모순이 생기면 이 정의의 정당성도 사라집니다.

 

다만 난감은 두 개의 정의에 걸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난감은 이탕의 살인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사적 제재를 하고 다니는 무법자 송철을 검거하지만 다시 보복당합니다. 마지막화에서 송철에게 다시 보복하기 위해 반납하지 않는 총기를 소지하고 그를 만나러 간 난감은 이제 사적 제재의 영역에 속합니다. 법을 대표하는 인물의 행동에 모순이 생겨 법이라는 정의도 정당성을 잃은 겁니다. 송철의 믿음도 흔들리고 있었고 이 영역에 새롭게 들어온 난감도 일회성으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사적 제재라는 정의도 오래가지 못하고 정당성을 잃습니다. 정의를 운운할 자격을 잃은 난감은 탕을 보내줍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해오던 두 정의는 모순에 부딪히고 믿음에 빈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나쁜 놈만 골라 죽이는 이탕의 신적 능력은 인간이 하는 법적 제재나 사적 제재와는 급이 달라 보입니다. 우발적 살인이라 의도는 애초에 없었고, 나쁜 놈만 골라 죽이는 능력 덕분에 모순이 생길 수가 없었죠. 또한 신은 인간에 의해 존재합니다. 이탕은 단단한 믿음을 가진 노빈이 만든 신이고요. 이탕이 가지지 않은 의도와 믿음은 노빈이 대신합니다. 그러면서 이 정의는 살아남습니다.

 

이 장면만 이렇게 보면 신적 폭력이라는 세 번째 정의가 잘 느껴지지만 드라마 전체를 본 관객들은 원작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몰립니다.

 

“이탕(최우식)의 첫 살인의 경우 원작에선 손님에게 폭행을 당하다가 휘두른 망치에 의한 살인의 우발성에 방점이 찍힌다면, 영상물에선 원작보다 과격해진 폭행과 이탕이 과거 겪었던 심각한 학교폭력과의 교차 편집을 통해 폭력에 대한 반발과 응징으로서 살인의 정당성에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이탕이 죽인 첫 피해자가 실은 수배 중이던 연쇄살인범이라는 반전이 드러나기도 전에 이미 시청자들이 이탕에 이입하도록 유도한 것에 가깝다. 비판적 거리감은 애초에 없다.”*

유도된 관객들은 ‘제 3의 정의’의 의미를 고민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탕은 사적 제재의 영역에 머무릅니다. 법을 벗어난 그의 행동, 즉 무서울 것 없이 사적 제재를 하는 안티 히어로의 통쾌함 쪽으로 흐르는 것이죠. 이는 원래 우리가 사용하던 도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 원작의 의도가 잘 전해졌다면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있었던 진짜 질문들과, 새롭게 제안된 정의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고민해볼까요?

작가는 이탕의 행동(3의 정의)을 옹호하려는 것이었을까?

다시 마지막 장면을 돌이켜보면, 송철과 난감 둘이 나누는 대화는 두 정의를 한 선상 위에 두는 일입니다. 기존에 치켜세우거나 낮춰놓았던 정의들을 불러 모아 비교해 보면서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당신이 믿는 더 나은 것은 과연 옳은가. 혐오의 시대, 폭력을 폭력으로만 되갚을 수 있는 세상이라며 우리는 법을 무시하지만 우리가 무시하고 더 낫다고 말하는 다른 정의는 과연 옳은가. 한편으로 사적 제제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 또한 이 세상에 벌어진 피해들은, 그 원망과 분노 또한 무시하지 않는 것이 현실 직시이자 위선적이지 않은 도덕주의가 아니냐는 물음이 여기서 나옵니다.

 

1, 2를 점검하고 4를 떠올리게 하는 3의 역할

“원작은 이탕에게 드라마의 초능력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를 부여하지만, 그 모든 게 거대한 허구이자 망상이며 언제든 틀릴 가능성 역시 열어둔다.”*

 

신적 정의인 탕은 계속 높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전지전능한 존재인 신이라도 이는 모순덩어리인 인간(노빈)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합니다. 노빈이 죽으면서 이 사실이 다시 상기되고요. 신이 (어떤 정의에서)착한 이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신의 존재(3의 정의)에 의심이 생기게 합니다. 신의 권력을 잃게 되는 것은 이 부분에서 이루어졌어야 합니다. 결국 이탕과 노빈의 정의도 1, 2의 정의와 같은 선상에 서게 되지만 그렇다고 이 역할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탕은 이미 두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을 결국 한자리에 모은 것도 탕이었고요.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 3의 역할입니다. 즉, 3의 정의는 서로 다른 정의들을 데려와 같은 선상 위로 올려두고 기존에 있던 정의의 완전함을 의심해 보게 하며 1, 2의 정의와 결국 같은 선상에 서게 되더라도 또 다른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역할입니다.

 

이렇게 이 작품은 무언가를 맞다고 주장하는 대신, 보는 이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도록 일부러 불신을 제조합니다. 사실 어떤 정의의 정당성은 한 사람의 단일한 믿음이 아니라 다른 정의들과의 비교로 인해 완성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옳은 행위에 대한 견해나 확신에서 시작한다. 그러고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근거가 되는 원칙을 찾는다. 그다음 그 원칙에 반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혼동되는 상황을 생각하고 이를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으로 가는 기폭제다.”_<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센델, p.53

내가 아니라도 너는 분명히 잡힌다

이 작품에서는 한 선상에 의도적으로 놓으면서 포화하고 범람했던, 아니면 오히려 저평가되었던 정의들을 다시 비교해 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화 <괴물>을 다룬 지난 레터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같은 선상에 두고 모두가 나쁘니 입을 다물자는 메시지가 아닐 겁니다.

 

마지막에 난감이 이탕을 보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 분명히 잡힌다. 내가 아니라도”. 이 말은 ’나는 널 못 잡지만 누군가는 너를 잡을 수 있다, 너를 잡을 만한 사람(또 다른 정의)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연출자와 창작자는 제도 안에 있는 사람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비평가도 마찬가지고요. <살인자ㅇ난감>원작자는 스스로 그걸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려고도 노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창작자들이 제안한 선지 외에 다른 선지를 스스로 생각해내야 합니다. 인생은 객관식이라지만 이 선지들 가운데 답이 없다고, 문제에 오류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한 옳음과 그름이 섞여 있다면 작품 속 어떤 것이 그런 부분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역할일 것 같습니다. 이 작품들을 보며 느껴야 할 무서움은 소재나 장면의 잔혹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무서움일 테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이게 이런 종류의 소설이 가진 진정한 무서움 중 하나일지 모른다. 언젠가 커트 보니것이 ”우리는 대체로 칠판 위에 무엇이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나쁜 소식인지 그리지 못한다.“고 했을 때 그 무서움.”_릿터 43호 <나의 유령문학 유랑>

✍️ 2월 서평도서 + 한 문장

▪️디 에센셜3_다자이 오사무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동물농장_조지오웰

그들의 삶이 고생스럽고 자기들의 희망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기네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배고프다면 그것은 전제적인 인간들에 의해 사육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들이 고생스레 일한다면 적어도 그들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 모든 동물이 평등했다.

▪️평범한 결혼생활_임경선

결혼은 참으로 복잡하게 행복하고 복잡하게 불행하다.

오늘 레터는 여기까지!
다음 달에 만나요!

발행: 에디터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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