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뉴스레터 39호를 발행합니다.
이번 호에는 특별한 이야기마당을 준비했습니다. 젊은 시절 조국에서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재일동포 유영수-김영희 선생님 부부를 지난 27일 초청해 가졌던 토크쇼를 싣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다소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습니다. 가수 노영심 씨였습니다. 재단에서 노씨에게 모임을 알린 것은 행사 하루 전이었습니다. “나는 쑥스러워서 못하겠는데 혹시 노영심 씨한테 올 수 있는지 물어봐주면 고맙겠다”는 문자를 김영희 선생님한테 받고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일정 조정이 안 돼 끝까지 있지는 못하지만, 참석하겠다”는 답이 왔고, 시간에 맞춰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 관계에 대한 궁금증은 노씨가 중간에 자리를 뜨면서 인사말을 할 때 풀렸습니다. 그가 밝힌 사연은 이랬습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담은 KBS 다큐 《간첩과 섬소녀》를 보고 두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답니다. 부부가 오사카에서 운영하는 식당 ‘샘터’라는 이름이 다큐에 스쳐지나가듯 나온 것을 기억하고는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노씨의 따뜻한 심성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바쁜 사람조차 시간을 쪼개 찾아오게 만드는 두 분의 매력은 뭘까가 궁금해졌습니다.
이야기마당이 이어지는 내내 작은 객석은 부부를 따라 함께 울다 웃다를 반복했습니다. 김영희 선생님만 눈물이 많은 줄 알았더니 유영수 선생님도 못지않은 울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는 것은 과거 고통이나 서러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민주화운동과 친구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죄책감, 그럼에도 아무것도 못했다는 자책감이 더 컸습니다.
이들의 연애담도 청춘남녀의 순전한 사랑 얘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을 사랑했다가 조국으로부터 버림 받은 재일동포 청년은 “이제 거창한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분단의 아픔에 상처받은 김영희씨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일”이라고 다짐했고, “이 남자가 나사가 빠진 모양”이라며 청혼을 거절했던 섬소녀도 마침내 “나도 이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면서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서로의 진심이 통하게 된 결정적인 일화에는 청중석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영혼에 난 깊은 상처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메워 나갔습니다. 이날도 두 사람은 꼭 “유영수 씨” “김영희 씨”라고 호칭했습니다. 사랑과 존중이 충만한 가정에서 두 아이는 반듯하게 자랐고, 둘 다 대학은 스스로 한국을 택했습니다.
2시간에 걸친 두 사람의 얘기를 다 듣고 나자, 노영심 씨가 식당을 찾아간 이유로 “아픔이 있어서보다는 아름다운 사랑을 이뤄온 분”이라고 했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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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슬기로운 감방생활 두번째 글을 싣습니다. 1977년 겨울부터 시작해서 1980년 1월9일 광주교도소서 만기 출소할때 까지의 글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가족에게 보내는 봉합엽서와 상고하는 이유를 쓸 때 말고는 집필이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 감옥생활을 김학민 선생님은 여러 명의 감방동지들 취재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리영희가 박정희의 죽음을 알렸다는 이유로 징벌방에 갇혔던 기록은 수형기록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리영희는 출소하면서 한 재소자가 칫솔로 만들어준 조각품을 선물로 받아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의 삶을 원경이 아니라 근경으로 보고 겪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사건의 발단이 된 ‘농사군 임군에게 띄우는 편지’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우상과이성> 초판에 실렸다가 절판후 80년 복간하면서 타협의 산물로 빠지게 됩니다. 이후 84년 <분단을 넘어서>를 발간할때 일부 문장을 삭제하고 제목도 ‘어느 젊은 농사꾼에게’로 바꿔서 실립니다. 본문 중에 링크를 걸어두었고 볼드체가 원문에 있었으나 재수록되면서 빠진 부분입니다. 하나의 글이 공안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변화를 겪는지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