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몇 시지?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린다.

오후 10시 44분.

이런, 늦었다.

부랴부랴 줌에 접속한다. 이미 네 명의 남자가 모여 있다. 줌 화면 해상도가 아무리 낮아도 얼굴에 비친 삶의 고단함은 감출 수 없다. 화면 속 내 얼굴이 제일 피곤해 보인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이 재우다가 저도 깜빡 잠들었네요.”

“괜찮습니다. 제일 늦게 오셨으니 뉴스레터 발행할 때 첫 번째 순서로 쓰시면 됩니다. 오늘 회의 내용은 나중에 단톡방에도 공유드릴게요.”

내가 첫 순번으로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몇 명이 돌아가며 뉴스레터를 맡을지, 레터 이름은 어떻게 부를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때, 첫 만남부터 40분 넘게 지각했으니 여전히 면목이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했던 점은 누구 하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다들 ‘그럴 수 있지’라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기게 된 걸까.

육아를 하면서 너그러워진 건 마음뿐이 아니다. 시간을 인지하는 감각도 너그러워졌다. 이제 막 10개월 차에 접어든 딸 ‘송이’를 키우는 동안 시간이 정말 선형적으로,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보통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송이를 재운다. ‘재운다’는 표현을 쓴 까닭은 송이가 절대 호락호락하게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잠들 때 불안한가. (이건 분명 엄마를 닮은 거 같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고 말똥말똥해진 채 옹알이하는 걸 듣노라면 어느새 정신이 몽롱해지고, 그러다가 내가 먼저 잠들기 일쑤다.

지금 몇 시지?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린다.

오전 3시 50분.

이날은 송이를 재운 뒤 육퇴를 기념하며 맥주 한 잔에 감자칩이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애매한 시각에 깨어버렸다. 마무리하지 못한 젖병 설거지, 마감해야 하는 원고 등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침대에서 눈 감은 채로 30분을 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차라리 출근이라도 일찍 할까? 지하철 첫 차를 검색해 보니 오전 5시 13분 출발. 여전히 1시간가량 남은 상태라 하릴없이 거실로 나와 일하다가 출근했다. 이것도 일종의 ‘미라클 모닝’인가. 

또 다른 깜깜한 새벽. 송이가 잠깐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깼다. 다행히 몇 번 토닥여주니 아이는 다시 잠들었다. 이제 나만 다시 잠들면 된다. 문득 잊고 있던 과거가 떠올랐다. 2015년 모터사이클을 타고 노르웨이 로포텐 제도를 가로지르던, 생애 가장 찬란했던 여름의 한 장면이 바이크 배기음과 함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때의 남자는 오히려 넘쳐나는 자유 때문에 어쩔 줄 몰라 괴로워했는데, 7년 전 지금을 상상이나 했을까.

<인터스텔라>, <테넷>으로 시간 왜곡 현상을 풀어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도 시간을 언급한다. 그는 톰 숀의 《크리스토퍼 놀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 시간이란 감정적인 문제죠.

(…)
젊은 사람은 향수에 잘 젖어요. 굉장히 빠른 변화를 겪고 있으니까요. 열한 살이나 열두 살 때 알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곧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두의 인생은 여기저기로 펼쳐져요. 상황은 매우 빠르고 신속하게 변하고요. 대체로 이십 대나 삼심 대 무렵에는 시간이 안정적으로 흐를 것이고, 그래서 시간을 좀 더 객관적으로, 좀 더 논리적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러다가 중년이 되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감정적인 측면에 다시 집착하면서 우리가 그 흐름에 갇혀버렸다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

우리한테는 벽시계도 있고 손목시계도 있지만, 시간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에요.”

시간 흐름은 선형적이지 않다. 푹 삶은 파스타면처럼 휘어지는가 하면, 툭툭 끊어지기도 한다. 덜 익으면 덜 익은 대로 이 시간을 소화해 내야 한다. 이렇게 시간 흐름에 따른 감정적 측면에 집착하는 걸 보니 나도 중년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 시간이 똑바로 흐르는 대신, 때론 통째로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하는 건 분명 스트레스다.

한편, 아내와 나를 빼닮은 아이 얼굴을 보며 시간을 비틀어보기도 한다. 만약 시간이 줄어드는 대신 늘어난 거라면?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현재 시간과 이중으로 함께 사는 거라면?

딸에게 묻고 싶다. 그럼 넌 누구니. 출생신고를 하면서 주민번호까지 받았으니 독립된 인격체는 맞는데… 혹시 우리 부부의 시간과 생물학적 코드가 그대로 이식된 컴퓨터인가. 이제는 컴퓨터도 고양이와 강아지 그림책을 보며 기계학습을 하는 시대니까.

요즘 딸은 윙크하는 법을 배웠다. 두 눈을 1~2초 정도 지그시 감았다가 뜬다. 그 찰나가 모터사이클로 여행하며 자유로웠던 6개월보다 큰 감동을 준다. 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생각을 고친다. 부모의 시간과 아이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내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는 대신 아이의 시간을 기록해봐야겠다고.

다행히 기록을 같이 할 동지가 생겨 기쁘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이란 프로젝트는 ‘월간서른’으로 잘 알려진 콘텐츠 기획자 강혁진 님이 처음 제안했고, 모두 다섯 명의 아빠들이 참여하기로 했다.

2022년 현재. ‘밀레니얼 주 양육자’ 또는 ‘밀레니얼 보조 양육자’라 불리기도 하는 아빠의 역할은 어때야 할까. 여러 고민을 안은 채 레터를 시작해본다. 육아를 소재로 글을 쓰는 부담도 크다. 글은 곧 생각의 반영인데, 육아를 대하는 내 생각이 틀렸음이 만천하에 공개돼 망신당할 위험도 크기 때문이다.

기꺼이 비난받고 망신당할 준비가 돼 있다. 잘못된 생각을 고칠 수 있다면 적극 받아들일 맷집을 키우고자 한다. 다른 의견이 있다면 메일 또는 인스타그램으로 통해 알려주시길 바란다. 멤버들과 상의하여, 가능하다면 독자 의견을 소개하며 우리 생각도 덧붙이고자 한다. 주변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거나, 가보지 않은 길이 궁금한 사람에게 뉴스레터 구독 링크를 공유해주셔도 좋겠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 아빠들도 어쩌면 처음부터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내 마음대로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 현실을 빨리 수용하거나 체념하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에 너그러워지는 쪽을 선택했을 수도.

그나저나 지금 몇 시지?

송이가 하루를 시작할 때가 됐다.

님, 오늘 보내드린 편지는 어땠나요? 썬데이 파더스 클럽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제안/피드백이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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