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언서에 관하여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번 주 에세이 당번 파주입니다.

(야심한 밤에 발칙한 제목으로 메일함을 두드려 송구합니다.)
혹시 메일 제목을 보고 깜짝 놀라셨나요...?
오늘의 이야기 주제가 마침 ‘인플루언서’라서요.
요즘 보내는 업무 메일의 제목을 차용해 보았습니다.

최근에 시작하는 프로젝트마다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필수로 진행하게 되는데요.
영상 하나가 제 연봉보다 비싼 결과물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현타에 빠지게 됩니다.
(와, 이게 내 연봉보다 비싼 영상이라니!)

협업 메일을 보내면서, 무수한 릴스를 모니터링하며 속으로만 웅얼거리던 말들을 꺼내 적어보았습니다.

오늘도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플루언서의 시대>

재택 근무를 마치고 침대에 눕는다. 편한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벌써 릴스를 넘기기 시작했다. 누가 어디서 뭘 먹고 어디로 여행을 갔는지, 갖가지 영상들이 정신 없이 지나간다. 의식을 붙잡고 세어 보니 열 개 중 다섯 개가 ‘광고’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있었다.


옛날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요즘 마케팅의 모든 길은 인플루언서로 통한다. 주방세제도, 유산균도, 점심 메뉴나 여행 패키지도 결국 누군가의 피드나 릴스에 포장되어 온다. 로마는 정복한 땅에 세금을 매겼다는데, 요즘 것들은 정복한 우리한테 협찬 광고를 판다.


몇 년 전 회사 동료 중에 인플루언서에 도전한다는 사람이 있었다. 퇴근 후엔 릴스를 찍고 주말엔 기획안을 짠다고 했다. 회의 시간엔 늘 반쯤 의식을 잃은 듯한 동료였는데, 점심시간에 “오늘 조회수 3만 넘었다”는 말을 할 땐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그 순간 젓가락질을 멈추고 3만 짜리 영상을, 사실은 그의 얼굴을 조금 오래 쳐다봤던 것 같다. 부캐가 본캐보다 생기 있어 보이는 사람을 마주치면 이상하게 할 말이 없어진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그’가, 본인이 원하는 자신은 아닐 것 같아서. 어쩌면 출근하는 그가, 부캐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다음으로 넘어간 릴스엔 ‘사기꾼이 되기엔 정직하고 인플루언서 하기엔 끼가 없어서 오늘도 출근하는 나’라는 영상이 등장했다. 어디, 끼만 없을까. 신사역 길 한가운데에서 삼각대를 설치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면 ‘저것도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끼가 있다고 믿는 재능과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꾸준히 하는 재능이 있어서라고.


그 뒤로도 수 백 개의 릴스를 넘기고 나서야 스마트폰을 덮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잠들기 전에 계정 이름을 몇 개 떠올렸다. 프로필 사진도 골라보고, 나의 정체성을 축약한 문구도 떠올렸다. 릴스 하나가 빵 터져서 하룻밤 사이에 팔로워가 잔뜩 유입되는 달콤한 상상까지도 했다. 어느 브랜드에서 먼저 연락이 왔고, 몇 번의 견적 씨름 끝에 광고 협업을 수락했다.


알람이 울렸다. 잠시 망상에 빠졌을 뿐인데, 아침이라니. 폰을 마구잡이로 눌러대며 알람을 껐다. 인플루언서가 될 만한 끼도, 꾸준히 할 재능과 그럴 의지조차 없는 나는 꾸역꾸역 출근 준비를 한다. 지하철에서 어제 점찍어둔 계정명을 ‘나에게 보낸 카톡’에 올려봤다. 구려서 못해먹겠단 생각에 백스페이스를 연타하곤 가뿐하게 포기했다.


마침 출근 직후부터 해치워야 할 업무가 인플루언서에게 섭외 메일을 보내는 일이었다. 메일은 늘 ‘평소 즐겨보고 있다, 애정하는 분과 협업할 기회가 생겨 몹시 기쁘다’로 시작한다. 말미에는 역시나 ‘팬으로서 모쪼록 협업할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으니 긍정적인 회신을 기다리겠다’로 끝을 맺는다. 물론 이 메일을 쓰기 직전까지도 이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일이니까. 메일을 받은 사람이 기분 좋게 회신을 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는다.


[발송] 버튼을 누른다. 로마로 가는 길은 내가 걷지 않는다. 그저 그 길 위를 걷는 사람한테, 잘 좀 봐달라고, 이왕이면 내가 파는 물건을 뽐내며 걸어달라고 메일을 쓸 뿐이다.


야백 :  일상 속 모든 시간을 이런저런 테크놀로지가 집어삼키고, 디지털 세상이 통째로 ‘광고지면’처럼 변한 지는 좀 됐죠. ‘인플루언서 되기’는 이 새로 열리는 일터에서 개인이 돈을 벌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고요.
이걸 기회라고 봐야 할지, 먹고 살기 위해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필드가 늘어난 걸로 봐야 할지. 생존 비용이 갈수록 높아지는 세상에서 한정된 에너지로 여러 게임을 동시에 해야 하는 게 점점 더 '기본값'이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생존을 위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벌려야만 하고, 그래서 모두가 피곤한 거라면. 그래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갈수록 서운해질 일이 많아지는 거라면. 돈도, 시간도, 마음도 여유가 있어야 인심이 날 텐데 갈수록 우정의 조건이 희소해지는 것 같아 뭔가 씁쓸하네요.

아무튼, 건투를 빕니다. 본캐든 부캐든, 클래식한 일터에서든 새로운 디지털 일터에서든 행운과 알고리즘의 가호가 따르길. 종종 시간이 허락된다면 건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꿔보기도 하자구요. 아, 혹시 유튜브 시작하면 아이디 알려주십쇼. 시청 지속 시간에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지난 호에 보내주신 답장에
다시 짧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풀칠러 A : 이번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 뒷자리에 앉은 선배도 지난 주에 갑자기 퇴사를 선언했거든요. 무슨일이든 놀라울 정도로 척척 잘 해내서 제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불렀었는데… 돌연 그만두겠다고해서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황금알 선배를 보며 ‘저 선배도 버티는데 나도 좀 더 힘내야지.’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많았는데 그랬던 사람이 사라진다니 나는 앞으로 어찌 버텨야하나 싶더라고요. 근데 또 한편으론 이번 편지를 읽다보니 ’내가 먼저 튈걸…‘하는 마음도 있었겠다 싶어요. 다음 편지를 읽고있을 때 쯤엔 황금알 선배의 자리는 아마도 텅 비어있겠네요. 그 자리에 앉으셨던분들이 자꾸 나가시는 것 같아서 저도 살포시 그 자리로 옮겨보아야겠습니다?! 히힛
야백 : 지금쯤이면 황금알을 낳는 선배 자리로 옮기셨겠죠? 회사가 참 신기한 게, 없으면 어쩌나 싶은 사람의 빈 자리도 1-2주 지나면 어찌어찌 메워지고 익숙해지더라고요. ('쇼 머스트 고 온' 뭐 그런 건지)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들은 남은 사람끼리 어찌어찌 잘 해봐야 하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야속하기도 애틋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힘내 보아요.

오늘은 초복이고, 이번 주 금요일은 제헌절이라 하루 쉬네요.

하루하루를 살아내다보면 이런 저런 이벤트가 참 많은 것 같아요. 

바쁜 나날이겠지만 이 이벤트들을 계기 삼아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저희는 2주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정을 담아, 풀칠 팀 드림.
credit
에세이 | 파주
코멘트 |  야백
풀칠러스케치 | 야백
편집 | 야백, 파주

Published by
풀칠 | 밥벌이 미학 연구회
먹고 사는 게 다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