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기억'하는 일

Season 4 🌊🏄‍♀️ Vol 12. 2024.06.21. ~ 2024.06.27.

'인구 국가비상사태'와 '프러포즈 존' 사이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 올바른 판결"
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 예술이 되다

'인구 국가비상사태'와 '프러포즈 존' 사이

< [속보] 윤대통령, '인구 국가비상사태' 선언…"범국가적 총력 대응" >

지난 19일 오후, 요란한 진동과 함께 제 휴대폰엔 이런 뉴스 알림이 떴습니다. 다른 일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들여다봤는데요, 순간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습니다. 인구 국가비상사태, 선언, 범국가적, 총력, 대응. 🤯 단어 하나하나 너무나 진지하고 무거운 이 문장이 제겐 한없이 가볍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 올해는 0.6명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수치는 심각한 게 맞습니다. 남녀 성비가 절반으로 같다고 할 때 여성 100명이 낳는 자녀가 60명뿐이라는 뜻이니까요. 그 다음 세대는요? 여성 30명이 낳는 자녀가 18명으로 뚝 떨어지게 되겠죠.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들고, 일하는 사람 1명당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인구 국가비상사태 선언'에는 이런 국가적 위기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이 엿보입니다. 정부는 그간 대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골든타임이 지나기 전 "범국가적 역량을 결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어요. 이번에 대통령 직속 저출생고령위원회가 내놓은 대책엔 육아휴직 급여 인상, 출산·육아 휴가 확대, 초등학생 늘봄프로그램 확대, 신생아 특례대출 소득 기준 완화 등이 담겼죠. 👶🍼

그런데 여기에 실제로 공감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국가가 관심 있는 건 숫자다, 인구와 노동력을 유지하는 데 신경쓸 뿐이다, 라는 메시지를 받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최근 몇주 동안만 해도 그렇습니다. 😡 "여성들은 1년 조기 입학시키면 향후 적령기 남녀가 매력을 더 느끼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했던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보고서, 기억하시죠? 서울시의원이 "아기 낳을 때 장점이 있다"며 케겔 운동법 위주로 짠 '댄조'(댄스+체조)는 큰 비판에 행사를 중지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구에선 홍준표 시장이 도심 하천 공원에 110억원의 예산을 들여 '프러포즈 존'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내놨습니다. "특색있는 프러포즈 프로그램을 운영해 전국 선남선녀들의 프러포즈 명소로 만들 것"이라는 홍 시장의 설명에는 한숨만 나옵니다. 🤦‍♀️

시민들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케겔 운동'이 부족해서인가요? 프러포즈할 장소가 없어서 결혼을 하지 않나요? 🙄 정부는 뚱딴지 같은 대책, 얄팍하고 경박스러운 발상으로 시민 개인의 삶, 생활, 일과 가정, 여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문제를 한순간에 뚝딱 해결하기를 기대해선 안되겠죠. 정책 발표 이후 김송이 기자가 만난 시민들이 "장시간 노동과 성차별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반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 건 이 때문입니다.

저출생 대책엔 '인구'만 있지 '인간'은 없다는 김종목 기자의 근본적인 지적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저임금과 무주택, 소수자 혐오와 젠더폭력, 노키즈존과 육아휴직 부재, 일과 가사의 이중 부담에 시달리는 개별 인간에 대한 고려가 없다. 10년 내리 저출생 문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등인 자살률과도 이어진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가, 이런 세상이 살 가치가 있느냐는 실존의 물음과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로 태어난 아이가 차별로 고통받는 일 없이,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가 산재와 저임금에 시달리는 일 없이, 엄마·아빠가 되려는 이들이 아이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일 없이 잘 사는 사회로 만들면 될 일인데, 이런 본질적인 노력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가 도외시한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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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 올바른 판결"

👩‍⚖️ 지난해 11월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다가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폭행당한 피해자 A씨가 "재판부에서 이 사건이 여성 혐오범죄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어요.

👩‍⚖️ 창원지법 형사1부는 20일 A씨와 그를 도운 50대 남성을 폭행한 20대 남성 B씨에 대한 항소심 첫 공판을 열었어요. 앞서 1심에선 재판부가 B씨가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죠. 이에 대해 A씨는 "피고인이 여성혐오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피해자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건 당시 가해자는 변별력이 충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심신미약이라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정효진 기자

🗞️ 밀양 성폭력, 우리의 마음이 함께

🌻 지난주 레터에서 '밀양 청소년 집단 성폭력 사건'을 다루며 피해자 일상 회복을 위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모금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는데요. 시작 5일 만에 1억원을 넘어섰다는 소식입니다. 20일 목요일 오후 5시 기준 2909명이 참여해 총 1억 1193만5999원이 모였어요. 👏👏👏 놀라운 결과입니다!

🌻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칸이 없었는데도, 후원자 중 입금자명에 피해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겨주신 분이 많았다"고 했어요. "단순 후원이 아니라 피해자의 곁에 서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 같다고"요. 단순히 분노하기만 하는 사회가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회로 한걸음 또 나아간 것 같아 고무적입니다.

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 예술이 되다

💬 '자수'라고 하면 입주자 여러분은 뭐가 떠오르세요? 전 어린 시절 할머니집에 놀러가서 봤던 자수 병풍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성인 키보다 조금 작은 2폭 병풍에는 소나무와 학이 촘촘한 바느질로 새겨져 있었어요. 회화나 조형물이 아닌, 실의 짜임이 주는 느낌은 정말 따스하면서도 독특했습니다.

💬 그런데 딱 그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자수 자체가 너무 한국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 자수 병풍을 작품으로서 바라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관에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요. 🌝

💬 이 전시는 오랫동안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있었던 자수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바라보고 재조명합니다. 저의 편견에서도 잘 드러나듯, 자수는 여성들의 '규방 공예' 정도로 여겨졌어요. 😲 그래서 문화유산이나 전통 자수에 초점을 맞춘 전시들은 있었지만, 이렇게 근현대 자수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죠.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 자수의 미학과 역사성을 확장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 제 기억에 가장 남는 작품 중 하나는 이장봉의 '파도'(1995)입니다. 아래 사진이에요. 비단에 자수를 놓은 이 작품은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가파른 암석 위에서 거친 바다를 바라보는 구도인데요.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속의 방랑자'를 차용한 작품입니다. 쓸쓸해보이지만, 마냥 절망스러워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왜 그렇게 느꼈을까, 생각했는데 작가의 뒷이야기를 알게 된 후 고개를 끄덕였어요.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인 이장봉은 결혼 후 육아와 가사에 매진하다가 뒤늦게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어요. '파도' 속 여성은 어쩌면 인생의 말년에 딸·아내·엄마로서, 자수 작가로서의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작가의 모습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