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좋아하는 것을 전하고, 나누고, 남기고 싶은 우리의 빌드업이다. 요즘 우리의 카톡과 dm창에는 절반 이상이 패션이다. 이 근황이 답이 될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다.

나는 옷이 좋아서 4년간 전공을 했고 하는 일도 대체로 패션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너는 유독 패션에는 관심이 없었다. 교복을 벗는 순간 용돈의 대부분을 옷에 쏟아부었던 나와 달리 너는 여전히 공부가 중요한 것 같았다. 영어, 금융 등 강의와 교재를 사는 데 큰 지출을 하는 네가 신기했다.

너와 함께 쇼핑을 하는 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몇 안 되는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때 너에게 골라준 옷이 아직도 옷장에 걸려있는데, 이제 보니 그 당시의 내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보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샀던 옷들을 싸그리 모아 그 돈으로 더 좋은 하나의 옷을 샀겠다 싶긴 하지만, 그때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취향도, 트렌드도 변하기 마련이니까.

패션에 있어서 나에게는 항상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이 스타일도 저 스타일도 다 예뻐 보인다는 것. 주변의 의상학과 친구들은 무채색, 빈티지, 미니멀 등 자기의 취향과 스타일이 확고해 보였다. 그런데 나는 공주 같은 옷도, 힙합래퍼 같은 옷도, 일본 소녀 같은 옷도 다 좋아했거든. 나도 취향이 직진이라면 옷을 사는 것도 스타일링하는 것도 더 수월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내 사진첩을 쭉 내려보면 취향이 참 자유분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네가 뜬금없이 패션을 일로 시작하고, 마음으로 좋아하게 되면서 내 고민도 사라졌다. 네가 패션에 눈을 뜨고 나서 처음에는 집으로 잡지가 한두 개씩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말이나 신발 같은 것들이 생기더니, 점점 옷장이 가득 채워졌다. 그 후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옷장을 공유했던 것 같다. ‘이 치마 어때? 바지가 낫나?’ 가끔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을 입다가 너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도 생겼고, ‘나 오늘 이거 입어도 돼?’ 포근한 향이 나는 네 옷을 슬며시 대보고는 빌려 입는 일도 생겼다.

나보다도 다양하고 과감한 패션을 좋아하게 된 네 덕분에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것저것 다 예쁜 게 고민이었는데, 오늘의 착장과 내일의 착장이 정반대라도 이제 그냥 그 날 예쁜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을 뿐. 서로 좋아하는 브랜드를 알려주고, 예쁜 옷을 빌려 입으면서 이런 옷을 입고 어디에 가고 싶으며, 저런 디자인의 옷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요즘 우리의 큰 낙이다. 그러다 보면 영감이 떠올라 우리가 직접 해봐? 하는 충동이 들곤 했는데, 어쩌면 곧 그게 현실이 될지도?

빨주노초파남보 중에서 오늘 입을 티셔츠 색깔을 고르는 것은 내가 꽤나 오랫동안 해온 일 중 하나였다. 웃음이 적은 사람이 사회생활하랴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올리듯, 색깔만 다른 쌍둥이 티셔츠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으로 최소한 꾸미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양말은 애매하게 복사뼈를 걸치는 캐릭터 양말을 신었으며, 느슨하게 조인 워커는 자꾸만 옆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등잔 밑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 불빛이 들어오기 전까진, 달리 말해 반짝이는 ‘관심사’가 되기 전까지는 극단적으로 한 분야에 무지한 사람. 패션이란 분야가 나에겐 그랬다.

의상학과를 전공한 룸메이트는 당연하게도 옷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너의 옷을 빌려 입으며, ‘가끔은 러블리하게 옷 잘 입는 애’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당시 다니고 있던 스타트업 대표님이 패션 에디터 일을 제안했을 땐, 이상하게도 속에 뜨거운 태양의 불길이 이는 감정이었다. ‘패션 에디터’라는 단어를 입에서 몇 번 굴려보자 이건 마치 하늘이 떠미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새롭게 파진 명함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 하고 말거라는 다짐이 마음에 멍울멍울 피어오르는 느끼며, 나는 매일 새벽마다 패션 매거진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달라졌다. 패션 스타일 정석대로도 입어보고, 마구 뒤섞어 입어보기도 했다. 쨍한 채도와 심플한 모노톤을 왔다 갔다 반복하면서. 옷 잘 입는 인플루언서를 한 명 워너비로 택해서 그대로 따라 입어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하이패션 패션쇼를 보고 옷을 비슷하게 따라 입는 날이면, 그 정도가 오버스러워 친한 친구들이 사뭇 부끄러워하기도 했는데, 점차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멋져 보인다고 칭찬해주는 지경이 됐다. 비싼 하이엔드 브랜드 옷, 값싼 빈티지 옷 마구마구 사 입었다. 나는 어쩐지 ‘패션이 너무 좋아져 버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울리는 옷을 찾아가는 게, 나를 알아가는 과정과 닮아있었다.

한 달에 많게는 12편, 적게는 8편. 패션 칼럼을 꾸준히 작성하면서 나는 드디어 ‘패션 에디터’라고 할 만한 것이 되었다. 그것도 믹스매치를 좋아하는, 취미로 패션쇼 보는 걸 즐기는 에디터. 줄곧 외면해왔던 분야인데 흥미를 넘어 적성까지 잘 맞다니, 그래서 더욱이 감사하다. 패션에 무지한 나였지만 가능성을 알아본 대표님께, 공부하는 동안 전공지식으로 반짝이는 가르침을 줬던 내 룸메이트에게. 아, 유진이 네가 내 옷을 입고 외출해 준 날이 기억난다. 드디어 말짱하게 예쁜 옷을 빌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뻤던지. 다른 취향대로 입고 쐬는 공기는 색다른 걸 잘 아니까.

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