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덥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정신 생일을 축하해
2019 9 14 홍진경."
이 글도 그런 식으로 문득 생각이 나 인터넷에서 홍진경의 글을 찾아보다 발견했습니다.
솔직히 이 편지만큼은 제가 좋아하는 취향의 글이 아니긴 해요. 그렇지만 가만히 편지를 읽으면 이렇게 자신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고백받기도 하고, 한 사람의 나날들을 바꾸어 놓은 정신이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더라고요.
말하자면 <정신과 영수증>을 읽고 싶었던 것은 오직 홍진경이 이토록 사랑하는 정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홍진경의 글에서 부푼 궁금증으로 시작된 정신의 일기 같은 메모들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인연이나 친구, 삶의 의미와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았어요.
이번 설에 님은 무얼 하며 보내셨나요? 사실 저는 설 당일이 생일이었답니다. 오랜 시간 저와 함께 알고 지냈던 분은 아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난 몇 년간 생일이 되기 며칠 전부터 생일이 표시되는 SNS를 비활성화한다거나,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된 듯이 집에 틀어박혀 숨어 있곤 했어요. 생일만 되면 찾아오는 우울함으로 인해 생일이 달갑지 않았거든요.
지난 편지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요. 아마도 그 우울은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의 잘난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내가 태어난 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겠어" 같은 ⋯. 특히 생일은 그러한 사실을 더욱 여실히 느껴지게 만드는 하루가 아닐까 싶었어요. 그래서 생일마저도 특별한 하루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굳이 챙기지 않아왔습니다. 유별나죠? 하하.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의미 없는 것들에 구태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점철된 것이구나. 그저 반복되는 시간 중 일부를 떼어 내어 우리가 명절이라 이름 붙이고 기념하는 것처럼, 의미 없는 것들 가운데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작은 의미부여들이 모여서 내 삶 전체의 의미를 이루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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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일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잖아요. 잠깐의 순간에 우리가 부여한 의미만이 잠시 머무르다가 사라질 뿐이죠. 의미부여를 멈추는 순간 나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요.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소멸하는 일시적인 것들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한 후로는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동시에 의미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후회도, 미련도, 슬픔도 모두 의미를 부여해야만 생기는 것이니까요. 지나가 버린 것,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 사라진 것들은 우리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의미를 허무는 법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홍지호 시인은 '토요일'이라는 시에서 묻습니다. “무의미는 무의미한가”라고요.
무의미는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로 초점을 맞춘 물체의 주변을 뿌옇게 흘러가는 풍경처럼요.
제가 사진 촬영이라는 소소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사진을 찍을 때 '보케'라고 해서 의도적으로 이미지에 초점을 날려 사진을 더욱 예쁘게 만드는 기법이 있어요. 마치 이 보케처럼, 내가 바라보고 싶은 대상을 잘 바라보기 위해서는 역시 무의미함도 꼭 필요한 것일 테죠.
그래서 이제는 의미에만 혹은 너무 무의미에만 집착하지 않고, 무의미와 의미의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괴로움을 느낄 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면 무의미가 필요한 곳에서 의미를, 의미가 필요한 곳에서 무의미를 찾는 제가 있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홍진경이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간 한 해 동안, 홍진경의 삶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지 않았을까요?
님의 삶에도 굳이 의미 있는 일들이, 그리고 기꺼이 무의미한 일들이 행복하게 함께 공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또 잊을만할 때쯤 다시 찾아뵐게요.
그날까지 안녕히 잘 지내세요.
명재현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