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장인 (현)밥집사장 아매오의 기고입니다.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오랜만에 찾아온 아매오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저는 여전히 밥을 팔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개업 1주년이 곧이네요.
작년 이맘때 열심히 가게를 보러 다녔는데 말이죠. 시간이 쏜살 같습니다.

연고 없는 동네에서 장사를 하며 보낸 1년. 새로운 공동체에 정착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넉살 좋게 안부 나누는 게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동네 사람 다 됐죠. 그런 이야기를 담아봤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요! 잊을 만할 때쯤 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휴재 공지
필진의 혼사(!)로 다음 호 <풀칠>은 한 텀 쉬어갑니다. 11월 4일에 뵈어요!

<동네를 걸을 때면 착한 눈을 하게 된다>


반찬을 세팅해주는데 단골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어제 요 앞 카페 갔었죠? 아는 척 하려다가 사장님 표정이 심각한 게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참았어.”

매일 오전 10시경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산다. 장사 준비를 마치고 밥을 먹은 뒤다. 당연히 어제도 카페에 갔다. 그 날 새벽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렸다. 내가 응원하는 아스날과 PSG의 경기였다. 작년엔 준결승에서 패했다. 올해는 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또 패했다. 분했다. 아쉬웠다. 하루종일 기분이 별로였다. 우리 매장에선 당연히 표정을 관리했다. 카페에선 그러지 않았다.

철렁했다. 사회적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을 들킨 기분. 하지만 정신 차리자. 지금은 매장이다. 접객 중이다. 사회적 가면에 숨어 적당히 둘러댔다.

“앗, 진짜요? 별일 없었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다음엔 그냥 막 아는 척 해주세요!”

이 근처에선 방심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카페에서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이 꼭 우리 식당의 서비스 퀄리티와 직결되는 건 아니다. 다만 굳이 부정적 인상을 심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 뒤로는 나도 모르게 동네를 걸을 때면 착한 눈을 하게 된다. 매장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눈에 힘부터 푸는 것이다. 입꼬리도 살짝 당겨 올려본다. 이 근처에선 누구든 언제든 편히 아는 척 할 수 있도록.

물론 거리에서만 그래야 하는 게 아니다. 차량 점검 받으러 간 정비소, 잔돈 바꾸러 간 은행, 간식거리 사러 간 편의점, 행정 업무 보러 간 주민센터 등 곳곳에 손님들이 있다. 물론 그곳에서는 내가 손님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손님이 되는 셈. 착하게 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절로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동네 주민들을 상대한다’는 공통점에서 오는 묘한 연대감의 영향이다.

알아본다. 아는 척을 한다. 연대감을 느낀다. 울타리 안쪽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완전한 외지 사람인 내겐 우리 식당을 맛집으로 소문나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미션이다. 손님들과 판매자와 소비자라는 경제적 관계를 넘어 사회문화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얘기니까. 그런데…그렇게 됐습니다. 뭐랄까. 너무 일찍 주어진 영광 같았다. 마음껏 누릴 수 없으니 괜히 착한 눈을 하면서 눈치봤던 것이다.

얼마 전 퇴근길이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주차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던 중 미용실 앞에 서성이는 조 씨 할머니를 봤다. 불은 켜졌는데 문은 잠겨있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른 척 지나갔다. 이내 마음을 바꿨다. 일종의 단골관리라고 생각하며 뒤돌아 말을 걸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원장님 방금 저쪽으로 내려가던데요! 잠깐 뭐 사러 갔나봐요.”
“아, 안녕하세요. 그래요? 좀 기다려야겠네. 사장님은 이제 퇴근?”
“예. 오늘 조금 늦게 끝났네요.”
“저번에 밥 먹으러 갔는데 없더라고?”
“화요일에 오셨나보다! 화요일마다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근데 끝났어요. 이제 제가 나올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미용실 원장님이 돌아오고서야 끝났다.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조 씨 할머니도 이만 들어가 자야겠다며 댁으로 향했다. 딱히 미용실에 볼 일이 있진 않았던 것이다. 어쩐지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아 수다나 떨기 위해 나온 듯했다. 대문 앞 화분을 좀 살피더니 금세 쏙 들어갔다.

차를 타고 동네를 벗어났다. 크게 원을 그리는 램프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라갔다. 빠른 속도로 서울을 향해 달렸다.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내일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지금 내게 출퇴근은 돌아감의 반복인 셈이다. 회사원일 때는 못느꼈던 것이다. 그때는 돌아갈 곳이라곤 집뿐이었으니까. 

요즘 나는 ‘우리 동네’라는 말을 중복해서 쓴다. 집이 있는 동네와 식당이 있는 동네, 모두 다 우리 동네다. 후자의 경우 아직 부연 설명을 붙이지만 곧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아마 그쯤이면 의식해서 착한 눈을 하고 다니지도 않을 테다. 희노애락을 골고루 담은 표정을 아주 편하게 지을 테니 말이다.
야망백수 :  네. 돌아갈 곳이라곤 집밖에 없는 회사원입니다. 저는 이팀 저팀의 이해관계자들과 이런저런 협업을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초년생 때는 이 '일'이란 게 나의 꿈이나 자아실현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남을 위해서, 남이랑 같이하는 팀플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네요. '나'가 아니라 '남'이 핵심인 거죠. 이걸 닳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철이 든 거라고 해야 할지.

남을 위해서 일하고 그 대가로 월급 받아서 풀칠하기. 이게 좋든 싫든 내가 맺은 계약이고 일상의 토대라는 게 갑갑할 때도 많지만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혹여나 주변을 적으로 돌려버리면 그땐 적을 위해서 표정 관리까지 해야 하는데, 그게 무서워서라도 미리미리 친절해 둬야죠. 일찍 일어나서 세수도 하고 면도도 하고, 말도 두 번 세 번 생각해서 가려서 하고, 감사하지 않아도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아매오님은 계신 곳에서 잘해 나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면 적으로 드글드글한 그런 공간은 아니겠다 싶어서요. 저도 마음을 곱게 먹고, 입꼬리를 올리고, '이놈의 회사' 대신 '우리 회사'라고 한번 불러 봐야겠습니다. 우… 리… 회… 사…. 후. 광대가 파르르 떨리네요. 마그네슘이 부족해서 그런가. 밥심이 딸리나 봅니다. 언제 한번 또 밥 먹으러 가겠습니다. 건승합시다.

파주  :  한 평론가는 본인이 평론을 할 때만 빨간 안경을 쓴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평론가 모드로 변신!'인 셈이죠. 출근 직후 사무실 벽에 정권을 날리거나 화장실 주식거래칸에 앉아 업무 전투력을 끌어올린다거나… 저마다 일을 시작하는 루틴이 있을 텐데요. 아매오님의 사례를 보니 표정을 다듬는 것만큼 확실한 준비도 없을 것 같네요.

당장 내일부턴 출근할 역에 근접했단 안내가 나오면, 회사까지 걸어가는 길엔 웃상인 척 입꼬리를 올려보겠습니다. 길거리에서 혼자 실실 웃는 사람이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지만… 죽상인 것보다는 아무래도 낫겠죠.
지난 호에 보내주신 답장에
다시 짧은 답장을 보내드립니다.

풀칠러 A : 풀칠 뉴스레터를 읽다 보면 묘한 감정을 느낍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생각과 동지애 비슷한 것을 품고 있습니다. 모쪼록 앞으로도 우리 함께 밥벌이 잘해 나가봐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풀칠러 B : 오늘 글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저는 요즘 직장에서 동물적인 본능을 발휘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에는 본능은 사라지고 실패의 여운만이 남네요. 그러나 오늘도 출근했습니다.
파주 : 품앗이를 받으니 저만 터덜터덜 출근하는 게 아니었구나 싶어 외롭지 않네요. 괜히 뒷배가 있다는 안도감도 들고요. 풀칠러님도 레터를 받고 저와 비슷한 감정을 가져주셨으면 더 바랄 게 없겠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풀칠러 C : 줏대가 맥없이 꺾이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한 다음엔 사무실에서 오가는 번복에 '그럴 수 있지' 되뇌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역치를 넘을 때, 유독 운수가 나쁜 날엔 또 그럴 수 있지가 안되곤 하고요. 모순되고 일관성 부족한 게 인간이 가진 유일한 일관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물은 본능을 대할 때 일관성이 넘치네요. 후회할 틈을 지워낸다는 점에서 인간사회에도 효험이 있어보입니다. 물론 저에게도요.
파주 :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다'라는 자각보다 빠른 건 생각이 나쁜 쪽으로 브레이크 없이 흐르는 거 말이에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후회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다큐 속 동물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그치만 동물로 태어나면 이 맛있는 한정선 생딸기 찹쌀떡의 맛을 평생 모르며 살겠죠. 그냥, 조금 괴로워도 사람으로 사는 편이 낫겠다 싶습니다.
풀칠러 D : 맛난 것 많이 드셨던 추석 되셨길요! 재방송 너무 좋네요.. 올해가 거의 세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부모님께 여쭈었더니, 두 분 다 놀랄 정도로 동일하게 "시간은 유수와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이것이.. 연륜? 하지만 저도 내년에 앞자리가 드디어 바뀌는 것이 설레고 기대됩니다. 부디 남은 한 해 행복하게 보내시고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파주 :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OOO?'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제가 쓰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세상에나! 벌써 4분기라니요. 아홉수와의 작별을 준비하고 있는 풀칠러님에게도 행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참, 건강도 잊지 마시고요!
내일 나가면 또 휴일이라니!
숨돌릴 틈이 많은 10월 초네요.
이번 연휴엔 '우리 동네'에서 한껏 느슨해진 표정으로 선선한 날씨 즐길 수 있길 바랄게요.

오늘도 읽는 마음을 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정을 담아
풀칠 팀 드림
credit
에세이 | 아매오
코멘트 |  야백,파주
풀칠러스케치 | 야백
편집 | 야백, 파주

Published by
풀칠 | 밥벌이 미학 연구회
먹고 사는 게 다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