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걸을 때면 착한 눈을 하게 된다>
반찬을 세팅해주는데 단골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어제 요 앞 카페 갔었죠? 아는 척 하려다가 사장님 표정이 심각한 게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참았어.”
매일 오전 10시경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산다. 장사 준비를 마치고 밥을 먹은 뒤다. 당연히 어제도 카페에 갔다. 그 날 새벽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렸다. 내가 응원하는 아스날과 PSG의 경기였다. 작년엔 준결승에서 패했다. 올해는 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또 패했다. 분했다. 아쉬웠다. 하루종일 기분이 별로였다. 우리 매장에선 당연히 표정을 관리했다. 카페에선 그러지 않았다.
철렁했다. 사회적 가면을 쓰지 않은 맨얼굴을 들킨 기분. 하지만 정신 차리자. 지금은 매장이다. 접객 중이다. 사회적 가면에 숨어 적당히 둘러댔다.
“앗, 진짜요? 별일 없었는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다음엔 그냥 막 아는 척 해주세요!”
이 근처에선 방심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카페에서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이 꼭 우리 식당의 서비스 퀄리티와 직결되는 건 아니다. 다만 굳이 부정적 인상을 심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 뒤로는 나도 모르게 동네를 걸을 때면 착한 눈을 하게 된다. 매장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눈에 힘부터 푸는 것이다. 입꼬리도 살짝 당겨 올려본다. 이 근처에선 누구든 언제든 편히 아는 척 할 수 있도록.
물론 거리에서만 그래야 하는 게 아니다. 차량 점검 받으러 간 정비소, 잔돈 바꾸러 간 은행, 간식거리 사러 간 편의점, 행정 업무 보러 간 주민센터 등 곳곳에 손님들이 있다. 물론 그곳에서는 내가 손님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손님이 되는 셈. 착하게 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실 절로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 동네 주민들을 상대한다’는 공통점에서 오는 묘한 연대감의 영향이다.
알아본다. 아는 척을 한다. 연대감을 느낀다. 울타리 안쪽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완전한 외지 사람인 내겐 우리 식당을 맛집으로 소문나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미션이다. 손님들과 판매자와 소비자라는 경제적 관계를 넘어 사회문화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얘기니까. 그런데…그렇게 됐습니다. 뭐랄까. 너무 일찍 주어진 영광 같았다. 마음껏 누릴 수 없으니 괜히 착한 눈을 하면서 눈치봤던 것이다.
얼마 전 퇴근길이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주차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던 중 미용실 앞에 서성이는 조 씨 할머니를 봤다. 불은 켜졌는데 문은 잠겨있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른 척 지나갔다. 이내 마음을 바꿨다. 일종의 단골관리라고 생각하며 뒤돌아 말을 걸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원장님 방금 저쪽으로 내려가던데요! 잠깐 뭐 사러 갔나봐요.” “아, 안녕하세요. 그래요? 좀 기다려야겠네. 사장님은 이제 퇴근?” “예. 오늘 조금 늦게 끝났네요.” “저번에 밥 먹으러 갔는데 없더라고?”
“화요일에 오셨나보다! 화요일마다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근데 끝났어요. 이제 제가 나올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미용실 원장님이 돌아오고서야 끝났다.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조 씨 할머니도 이만 들어가 자야겠다며 댁으로 향했다. 딱히 미용실에 볼 일이 있진 않았던 것이다. 어쩐지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아 수다나 떨기 위해 나온 듯했다. 대문 앞 화분을 좀 살피더니 금세 쏙 들어갔다.
차를 타고 동네를 벗어났다. 크게 원을 그리는 램프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라갔다. 빠른 속도로 서울을 향해 달렸다.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내일이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지금 내게 출퇴근은 돌아감의 반복인 셈이다. 회사원일 때는 못느꼈던 것이다. 그때는 돌아갈 곳이라곤 집뿐이었으니까.
요즘 나는 ‘우리 동네’라는 말을 중복해서 쓴다. 집이 있는 동네와 식당이 있는 동네, 모두 다 우리 동네다. 후자의 경우 아직 부연 설명을 붙이지만 곧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아마 그쯤이면 의식해서 착한 눈을 하고 다니지도 않을 테다. 희노애락을 골고루 담은 표정을 아주 편하게 지을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