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이 편지를 읽고 계신다면 그건 아마 제가 드디어 기말과제를 마쳤다는 의미일 거라고, 24시간 전의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난번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이번 주 초면 자유의 몸이 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마감 기한이 며칠 더 주어지는 바람에 과제를 좀 더 탄탄하게 준비…했을 리가 있나요? 고통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난번 편지인 ‘아이 없는 40대와 인생의 의미’를 쓰면서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저 역시 어디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할지 몰라 헤매며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중이다 보니, ‘저도 고민입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이야기 들려주는 분들이 계셔서 놀랍고 기뻤습니다.

30대 후반 딩크인데 퇴근 후 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쉬다가 문득 시간이 아까워 이 시간을 더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셨다는 도라님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웠던 건, 이 잠깐의 저녁 시간도 그냥 쉬지 못하는 게 어쩌면 한국인의 특징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었어요. 사실, 사람이 씻고 옷을 차려입고 집 밖에 나가 사회인으로서 자아를 장착하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잖아요. 저는 아직 직장에 다니던 30대 중반에도 퇴근만 하면 파김치가 되었거든요.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뭔가를 더 배우지 않고 더 움직이지 않는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져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잠은 죽어서 자자” 같은 말을 격언처럼 듣고 자란 한국인이기에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쉴 필요가 있다는 거죠. (물론 저처럼 할 일을 끝까지 외면하며 미루는 건 제대로 쉬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리고, 지난 번 편지를 읽다가 문득 웃음이 나서 답장을 쓰셨다는 요정 님의 이야기도 꼭 소개하고 싶었어요.

[20대에 아이들을 낳은 저는 30대가 되었을 때 불안했어요. ㄱ님은 아이가 없어서 뭔가를 더 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있다는데, 저는 아이가 있어서 뭔가 더 해야만 할 것 같았거든요. ‘쟤는 애만 낳았지 뭐 이룬 게 없잖아.’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고 지금도 그 부담감이 있어요. 아이러니했던 건 저 역시 전업주부면서 전업주부로, 엄마로 사는 여성들을 보며 ‘저렇게 살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같은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찌질한 생각을 하는 걸까 고민했어요. 저는 평생 자식과 남편만 바라보다 늙어가는 윗세대 여성들의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저 역시 남편과 자식 곁에서 그런 삶을 밟고 있으니 막연히 나에게 닥치게 될 미래를 거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미혼이나 아이 없는 기혼 여성의 자유가 부러워서 내가 그들이라면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을 건데!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타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아이가 있고 없고 만으로 저울질할 수 없는 각자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나는 아이라는 부담이 있으니 이렇게 살려고 애쓰나? 이렇게 능동적이지 못하다니. 하는 생각에 빠지면 또 스스로가 한심해져요. 그런데 ㄱ님의 글을 읽으니 뭐랄까… 위로가 되네요. 결국, 인생은 스스로가 가치를 정하는 거구나. 아이가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고. 여자로 태어나 갖게 되는 수천 가지 위험과 수만 가지 고민은 모두의 공통분모구나. 싶어지네요.

- 요정]

아이가 없어서 뭔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아이가 있어서 뭔가 더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이 두 삶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상황은 다르지만, 인간이고 여성이고 한 번뿐인 삶이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같은데 말이에요.

저는 종종 우리가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할 수 있고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만, 인생의 모든 요소가 나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선택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내가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은 상당 부분 운이고, 타인의 잘못된 선택처럼 보이는 것도 아마 그렇겠지요. 제가 윗세대 여성들보다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제가 그들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여성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이 과거보다 다양해진 덕분이고 그런 변화를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또, 어떤 선택을 하든 그로 인해 발생할 모든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출산과 육아라는 변수를 인생에 두지 않는 선택을 했지만 그렇다 해서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삶의 ‘가벼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헤매는 중이니까요. 그러니 이 변수를 삶으로 가져온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나 어려움과 마주쳐 힘들어할 때 당신의 선택이니 알아서 감당하라는 건 너무 냉혹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요정님이 주부이자 엄마로 사시면서 느끼셨던, 다른 여성들에 대한 이율배반적 감정을 제가 충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요정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신 덕분에 저는 이제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 어떤 마음을 안고 고민해왔는지 조금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ㄱ님의 글에 위로받으셨다는 요정님의 말씀에 저도 위로받았어요. 타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아이가 있고 없고 만으로 저울질할 수 없는 각자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나와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한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서로에게 좀 더 관대해질 수도 있을 거고요. 또, 그건 무엇보다 나에게 좋은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타인의 삶에 관해 경청할 기회를 얻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맥락을 좀 더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반갑고도 친밀한 감정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괜히 날 서곤 하는 마음을 다독이게 해주더라고요.

사실 요즘은 아이 있는 삶과 아이 없는 삶의 문제가 ‘충만한 행복과 무거운 책임’, ‘경제적·시간적 여유와 공허함’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밸런스 게임처럼 다뤄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리고 어느 쪽을 택해야 승자인가, 더 현명한가 판단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죠. 하지만 삶은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시험도 경쟁도 투자도 아닌, 그냥 각자의 길일 뿐이죠. 

그럼 저는 이제 현실의 고통인 과제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수강한 세 과목 중 두 과목 기말 과제를 미디어와 무자녀 부부로 정했는데, 보고서를 쓰는 건 너무 어렵지만 주제는 흥미로웠어요. 어쩌면 다음 편지에서 이 얘기를 좀 더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이번 편지로 ‘없는 생활’이 1주년을 맞았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분이 읽어주시고 이야기 나눠 주셔서 늘 신기합니다. 별 게 없는 제 인생의 의미 중 하나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