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의 여정을 당신과 함께합니다

💌 매달 두번째 레터에서는 이달의 키워드를 하나 정하고, 그 키워드에 맞는 콘텐츠를 큐레이션합니다!
💬 이달의 키워드 : 시 💬
오늘은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시를 쓰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시'가 가지는 역할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미조는 수영 언니의 추천으로 한 회사의 면접을 보러 갑니다. 면접을 맡은 관리팀 차장은 미조의 잦은 퇴사와 이직 이력을 보며 미조의 자질을 의심하고, 미조는 떨어질거란 예감을 가지고 면접에 임합니다. 그렇게 가망 없는 면접을 끝내고 나오는 길, 미조는 엄마에게서 집주인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엄마는 수영 언니에게 받은 고물 노트북으로 매일 시를 씁니다. 미조는 귀가를 하면 습관처럼 엄마에게 묻습니다. '오늘도 시 썼어?' 그러면 엄마는 미조만이 시라고 생각하는 짧은 글을 짐짓 웅장한 목소리로 낭독하곤 합니다.
"도시의 주인이 나의 발끝에 불을 놓았다" (『미조의 시대』 중 엄마의 시)
   수영 언니는 회사에서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는 어시스턴트로, 수위가 높은 성인 웹툰을 그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언니는 원형탈모증을 얻을 정도로 이 일을 힘들어하지만 그만두지는 못합니다. 대신 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에 바쁘죠. 수영 언니는 종종 시는 아니지만 꼭 시처럼 쓰여진 문자를 미조에게 보내옵니다.
"미조야, 나는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려서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레종과 도림천에 버려져있다. 미조야, 나는 예쁘지도 않고 날씬하지도 않은데 그게 한 번도 걱정된 적은 없는데 지금 담배가 다 떨어져 가고 있는 게 너무 걱정된다. 이게 돛대야. 잘 자라." (
『미조의 시대』 중 수영 언니의 문자)
   
   『미조의 시대』 속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항하는 고독한 저항이기도, 영영 해소되지 않을 불안과 걱정을 눌러두는 누름돌이기도 하죠.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시'의 형태와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미조는 그것을 계속해서 '시'라고 부릅니다. 미조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다보면, 인력사무소 거리에 붙은 구인 공고마저도 시처럼 보이는데요.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시'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남루한 우리의 삶도 조금은 낭만적으로 읽히게 될까요?
"양돈장 남 구함, 월급 180~200만, 비자무, 불법됩니다, 연락주세요. 배추작업, 남녀 부부 구함, 일당 10만 원, 전라도 해남, 비자 C-38, C-39. 모텔 남녀 부부 환영. 고물상 남녀 부부 환영. 굴 까기 작업 공장, 연령 제한 없음, 1개월 후 300만원 인상됩니다. 꽃게 배 타실 5명 구함, 건강한 남자, 비자 F-4." (『미조의 시대』 중 구인 공고)

2. 『추앙』, 임솔아
   정원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합류하기 위해, '시인'이라는 준거집단에 속하기 위해 이해되지 않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던 중, 정원이 B강사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정원은 이에 항의 메일을 보내고, B강사는 사과의 의도를 가졌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보이는 난해한 답장을 보내옵니다. B강사의 답장 말미에 붙은 "너는 참 좋은 문학적 자질을 가졌다네"라는 문장은, 정원을 모멸감에 휩싸이게 만듭니다. 
   정원은 이후 이 일을 성평등 상담소에 신고하고, 여성 운동에 관심이 많은 현석에게도 털어놓습니다. 현석은 문학계 내 여성혐오에 대해 한탄하며 여성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인물이지만, 정작 B강사에 대해서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입니다. 급기야 가장 존경하는 시인으로 B강사를 꼽기도 하죠. 
   B강사와의 일 이후, 정원은 '시적 허용'이라는 말을 곱씹는 습관이 생깁니다. 부당함을 시적 특권으로 포장하는 문학계 내 관행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이죠. 
"글을 쓰는 한 '시적 허용'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강압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잠자기 위해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앉는 밤들이 지나갔다. B강사는 대학 강사이자 유명 시인이었다. 정원은 대학생이자 습작생이었다.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진 자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화는 평등할 수 없었다. 정원은 일방적으로 들어야 했고, 일방적으로 수긍해야 했다. 정원은 매번 하고 싶은 말을 참아야했고, 내 생각은 다르다는 말이 안에서 쌓여갈수록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다." (『추앙』 중)
   
   '시'가 폭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순간, 시가 가지는 문학적 의미는 빠르게 퇴색되고 그 자리에 가해자들의  변변찮고 형편없는 합리화만 남게 됩니다. 시가 존재하기 이전엔 인간이 있었고, 그 인간의 범주에는 언제나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가해자들은 이렇게 자명한 사실을 자주 잊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가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순간, 그것은 그저 의미없는 글자의 나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나'는 뒤늦게 시를 배운 늦깎이 습작생입니다. 내가 시를 배우게 된 배경에는 순조롭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동생의 학비 지원이 있었습니다. 그 덕에 나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꿈을 키울 수 있었죠. 하지만 시를 쓰는 일은 내 삶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담보해주진 않았습니다. 학교 동기와 선후배들의 등단 소식이 들려올 동안 등단과 수상에 계속해서 실패한 나는 계속 우울해져만 갑니다.
"뭐든 다 때가 있는 법인데. 공부를 할 때, 결혼을 할 때, 아이를 낳고,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와 헤어지고 새로 만나는 것 모두가 그 시기에 걸맞은 때에 행하는 것이 보편의 삶인데. 내가 보편의 삶을 살지 못해서 나에게는 늦거나 이른 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적인 벽에 맞닿으면 자꾸 잘못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걸 깨닫는 것조차 너무 늦어버려서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자꾸 어쩌지 못했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중)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들른 동생의 집에서 동생이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동생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동생이 그 집에서 나오도록 종용하고, 대신 동생의 두 아이는 같이 키우자 말합니다. 그렇게 본가로 돌아온 동생은 양육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다시 시작하고, 부모님은 각자 자신의 일들로 분주합니다. 같이 키우자고 이야기했지만, 집에 머무는 사람인 내가 두 아이를 떠맡게 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이렇게 된 배경에는 과거 자신을 위해 선뜻 학비를 내어 준 동생에 대한 부채감도 있었습니다. 부채감으로 떠밀려 시작한 일은 언제나 해소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기 마련이고, 이에 가족의 갈등도 점점 깊어져만 갑니다.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녹록치 않습니다. 아이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각종 집안일도 나의 몫이었죠. 자정이 다 된 시간, 일과를 마무리하고 책상 앞에 앉아보지만 피곤함에 제대로 된 글이 써질리 없습니다. 3년. 나는 머리도 마음도 텅 빈 것처럼 깜깜한 상태로 아이를 돌보며 3년을 보냅니다.
"시를 쓰기 전에/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여자//시를 쓰기 전에/이불을 깔았다 개고 걸레질을 하는 여자
시를 쓰기 전에/밥을 안치는 여자//(... ...) 뒤숭숭한 세간들 사이로 시만 실뱀처럼 빠져나간 여자/꽉 차 있으나 늘 텅 비어 있는 여자" (「시 쓰는 여자」, 이선영)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의 '나'는 시를 통해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자, 쓸모는 없지만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히 나를 증명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시. '나'는 비록 사회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넣는 일에는 번번이 실패하지만, 시에 자신을 그려 넣는 일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행복한 상상으로 결국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나'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합니다. 매일 우리의 쓸모를 내보이면서 우리는 무엇을 누리고자 하는 걸까요? 우리는 어쩌면 행복의 모습을 오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행복은 나를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타이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갖춰지는 것인지도 모를텐데 말이죠.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나의 존재를 사회에 각인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를 진정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나에게 '시'가 그랬던 것처럼, 무용하고 초라해보이는 것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달의 번역가 : 박현주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작가이자 번역가, 그리고 칼럼니스트. 2018년 『하우스프라우』로 제12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함. 그외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을 시작으로 『호수의 여인』, 『호밀빵 햄 샌드위치』, 『조용한 아내』, 『여자는 거기에 있어』 등을 번역함

『푸시: 내 것이 아닌 아이』 (애슐리 오드레인 저, 박현주 옮김)
   많은 담화에서 다양성이 화두가 되는 요즘, 여전히 획일화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개념 중 하나가 모성이 아닐까 합니다. 오죽하면 모성 본능이라는 표현을 아직도 사용할까요. 이 작품에서는 여성이라면 천부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모성의 신화에 대하여 모성이란 대체 무엇인지, 모성이 그렇게도 공고한 개념인지 물음표를 던집니다.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전개가 빠른 심리 스릴러인 이 소설은, 엄마와 딸의 관계 속에서 이전까지는 상상해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쉴 틈 없이 읽게 되더라고요. 다만 읽는 중에든, 다 읽고 나서든 책장을 덮을 때면 머릿속에 어떤 메아리들이 울립니다. ‘딸이 진짜 이럴 수 있다고? 엄마가 오해하는 건 아닐까? 엄마의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엄마(그리고 아빠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어떤 의심이 생겨버린 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부모 탓을 해도 되는 걸까? 아니, 엄마를 의심하면 내가 또 정상 엄마 프레임으로 여성을 검열해버리는 건 아닐까사실 끝끝내 이 질문들의 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뿐이었어요. 그 가운데 모성에 대한 저의 가치관도 생각해볼 수 있었고요.
   사실 한 개인을 어떤 틀로 가두어 규정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 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이런 규정,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한 걸까요? 저는 이 작품을 읽고 제가 품었던 이 의문을 또 한 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찾기도 결정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을 어떤 범주에 속하도록 결정하는 절대적인 속성 같은 건 없으며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데는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겹겹의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요.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다른 그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끝으로 이토록 흥미진진한 소설이 성 역할이라는 고리타분한 호수에 돌까지 던져주어 기쁘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 함께 보면 더 좋아요 💖
   ‘모성 신화에 도전하는 또다른 작품들도 소개합니다. 박현주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소설 『케빈에 대하여』『다섯째 아이』를 언급했습니다. 『케빈에 대하여』는 틸다 스윈튼 주연의 영화로도 나와 있고요. 그리고 영화 『툴리』도 새로운 사고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함께 추천해봅니다.

메리 읽고 씀.

🐚 메리 :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번역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한 달에 두 번 번역 덕분에 읽을 수 있는 여성 서사를 소개합니다. 여성 서사가 모두의 것이 되는 날을 바랍니다.

 💫 팟캐스트 <두둠칫 스테이션> 절찬방송중!
   들불레터에서 mixtape 들불을 연재하셨던 ㅎㅇ님께서 편집자 에디터리님과 함께 <두둠칫 스테이션>이라는 팟캐스트를 운영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 기존의 mixtape 들불 연재 종료로 아쉬워하셨던 분들께서는 <두둠칫 스테이션>의 '믹스테이프픽션'을 청취하시면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더욱 더 다채롭고 풍성한 소설X케이팝 큐레이션과 이야기들이 준비되어있으니, 문학과 케이팝에 관심이 많은 독자분들께는 특히 반가운 소식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들불의 운영자 구구도 믹스테이프픽션에 고정출연하고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청취해보세요! ^0^ 

<두둠칫 스테이션> 들어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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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빵
👥 <2021 비학술적 학술제> 사전세미나 참여 모집!
   올해로 3회를 맞이한 <비학술적 학술제>가 사전세미나의 형식으로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공동의 텍스트로 삼아 공정 담론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들불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참여팀으로 함께하게 되었는데요. 사전세미나에는 참여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려요!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사전세미나 신청페이지로 이동하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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