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는 이상한 존재다

  무언가를 기른다는 것은 이상한 경험이다. 일반적인 표현을 빌려 ‘기른다’라고 쓰긴 했지만 동물과 식물은 알아서 자란다. 인간은 그저 이들을 아껴주며,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이들의 성장을 서포트할 뿐이다. 나의 돌봄이 부족한 이유로 이들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기른다는 것은 책임을 수반한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러한 책임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운 아주 평화로운 케이스, 그러니까 인간은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상황을 다루려고 한다. 인간이 동식물을 기른다고 하지만 이들의 성장은 주체적이다. 

  9월 13일 월요일은 고모네 강아지 보리의 생일이었다. 고모와 집이 가깝고 그 집에 자주 가기 때문에 보리가 처음 그 집에 왔을 때부터 일주일에 2번 정도 꾸준히 보리를 만나고 있다. 보리가 월요일에 만 3살 강아지가 되었고, 생후 3개월에 이 집에 왔으니 거진 3년을 꽉 채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보라노사우르스]

  보리, 보라노사우루스는 말티즈라고 믿기지 않는 5.6킬로그램의 몸무게와 덩치를 자랑하며, 다른 강아지들에 비해 모량도 많고, 털도 빨리 자라고, 앞 발도 잘 쓰고 힘도 좋다(그래서 동물병원에서는 보리를 조금 버거워한다). 하지만 보리는 다른 어떤 강아지들보다 겁도 많고, 성질도 더러우며, 낯도 많이 가린다. 보리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나의 친구들이 줄을 섰는데 이 아이가 하도 짖어대는 바람에 대부분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다. 

  그래도 보리는 우리 집에는 하나 밖에 없는 고모의 귀여운 막내 아들이다. 하얗고 복실거리는 사촌 누나 같은 곱슬머리에 까맣고 반짝이는 눈동자, 뻔뻔스럽고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촉촉한 코, 뷰러 입술과 작은 발, 내 발을 밣아도 아프긴 커녕 ‘우리 보리가 누나 발을 밣았어요?’라고 하트 뿅뿅하게 되는 발바닥의 젤리, 다른 말티즈보다 크고 자주 뒤짚혀있는 귀까지. 이 예쁘고 귀여운 생명체와 친분을 쌓게 되어서 황송할 따름이다.
  아무리 사고를 쳐도, 귀찮게 굴고 하고 있는 일을 방해해도 보리가 미웠던 적은 없다. 권력을 쥐고 있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보는 듯한 인간과 강아지 사이의 원초적인 위계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강아지니까, 강아지는 인간이랑은 다르니까 우리가 이해해야해’라는 마음 때문일 수도 아니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귀엽고 깜찍한 외모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강아지를 절대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데려온 강아지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선택해서 데려온 생명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강아지를 씻기고, 용변을 치우고 산책을 시키는 등의 귀찮은 일들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책임감은 그 원동력의 전부일까? 정과 사랑과 애정과 책임감은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할까? 
[기른다는 것]
  강아지를 기르는 것은 아기를 기르는 것과 비슷하다. 아기와 강아지 둘 다 말이 통하지 않으며, 밥을 줘야 되고, 용변을 치워주어야 되며, 적당히 놀아주어야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아지에 대해서는 이런 돌봄을 평생 해야 된다는 것이고, 인간은 강아지보다 기르기 까다롭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아기는 동종이지만 인간과 강아지는 이종이다. 인간은 인간을 낳을 수 있지만 강아지를 낳을 수는 없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기는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 또는 두 사람과 혈연관계에 있지만 강아지는 그렇지 않다(여기서 강아지가 아기와 행동이 비슷하다는 것은 또다른 하나의 씹덕 포인트다.새로운 장난감을 가장 좋아하고 엄마 바라기의 면모를 보일 때 이 점을 너무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강아지에게 열과 성을 바치는 것, 강아지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시간을 들이는 것은 강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그렇게 이상한 존재다. 이 말 이외에는 입주 강아지와 동거하는 인간에 대해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가족 간의 애증을 혈연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우정과 사랑 같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깊은 관계를 혈연이 아니라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 강아지에게 정성을 다하는 이유를 강아지 그 자체에서만 찾아볼 수도 있다. 강아지의 귀여운 외모도 이유가 되지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이 강아지에게 홀랑 넘어가는 부분은 이들의 순수함이다. 이들은 아이 같고, 감정적인 공감이 가능하지만 때때로 아주 이기적이다. 이들도 이들의 의견이 있고 종종 인간과 싸우거나 삐지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귀여움을 느낄 때마다 내가 강아지를 인간보다 낮은 존재로 보는 것 같아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귀엽다. 때론 이성에 앞서는 감정이 있는 법이다. 
[참을 수 없는 강아지의 마력]

  구구절절 말하는 것이 보리의 귀여움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강아지라는 존재가 가능하게 하는 신비한 교감의 경험과 안정감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동물의 복실복실한 털이 인간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연구결과들이 있지만 나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 데엔 털을 비롯한 귀여운 외모, 격한 반김과 때로는 이기적일 정도의 순수함과 왕자병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런 까탈스러움과 고고함을 보고 있으면 ‘그래 한 번 사는 인생 저렇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보리를 보고 격한 반응을 하며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일이 없는 음주가무를 즐기고 나면 기분이 풀리듯이. 

  몇 주 전에 보리가 사고를 쳤다. 자주 가지고 노는 실 공에서 나온 실밥이 이 사이에 낀 것이다. 고모가 실을 빼주려고 하였으나 입 안에 손을 넣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동생 포로리의 방으로 도망을 갔다. 침대에 누워 얇은 여름 홑이불을 덮고 있는 포로리에게 자신을 이불 속에 숨겨달라 요구했으니 포로리는 이불을 자신의 몸에 돌돌 말며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보리는 숨겨달라는 고집을 부리며 입으로 이불을 당겼는데 세상에 이 과정에서 이불이 조금 튿어졌다. 

  ‘엄마한테 이를거야!’. 포로리는 이불을 들고 거실로 뛰쳐나갔고 포로리보다 먼저 거실에 도착한 보리는 이르지 말라는 뜻으로 포로리를 향해 멍멍 짖었다. 그 뒤로 이불에 관해 이야기하면 눈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보리가 이르지 말라고 했는데 누나가 일렀어? 누나 혼내줄까?’라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본 뒤에 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질 수 있어서 기뻐]
  이렇듯 강아지와의 교감은 신기하고 이상하다. 너와 내가 아무리 다른 생명체일지라도 우리는 생태계의 일원으로 묶인 운명 공동체다. 늑대가 인간에게 빌붙어 살기 위해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강아지로 진화하였다면 인간은 그 눈빛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안다고 해도 말이다. 오늘도 나는 우리 고모의 가슴으로 낳은 막내 아들에게 졌다. 하지만 졌기 때문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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