즙이 많은, 다디단 열대 과일의 맛

이 책을 읽어나가는 도중에 내가 한 번 읽었던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소리에 홀린 주인공이 마침내 신비로운 소녀 리마를 만나는 장면을 보자마자 보이지 않는 줄에 걸리듯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문학 고전을 무릎 꿇리고 가지치기하여 얇은 두께에 맞춰놓은, 폭거로 이루어진 해적판으로 말이다.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면서 재차 놀랐는데, 엄청난 훼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망각으로 떠내려가지 않았을뿐더러 읽어나가는 동안 압화된 꽃잎이 새로 피어나는 것처럼 싱싱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굉장한 책들이 무자비한 세월과 운명을 이겨내는 방식을 보면 항상 경이롭다.

《녹색의 장원》은 많은 소설이 그러하듯 ‘들려주는’ 형식의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듯이 말하는 책 속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소설의 질감을 형성한다. 이 목소리에 실리면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이국적인 풍물과 대자연 속을 유유자적 여행할 수 있으며 도취적인 기쁨을 들이켤 수 있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베네수엘라 밀림으로 달아난 젊은이가 숲속에서 신비한 소녀를 만나 사랑하고 상실하는 이야기. 그럼에도 ‘로맨스’라고 한정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랑 역시 주인공이 겪는 탐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핵심은 거대한 경이와 맞닥뜨린 인간의 반응이다. 경이란 무엇인가? 미지의 세계를 대할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으로 매혹과 두려움을 수반한다. 경이로운 세계와 만났을 때 물러서지 않는 사람은 모험가인 동시에 호기심 많은 탐구자라 할 수 있다. ‘경이’라는 감정에는 환희와 더불어 ‘궁금증’, ‘앎에 대한 갈증’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벨은 리마를 사랑하기 이전에 리마의 숲으로 들어갔고, 그 이전에는 인디언 마을을 편력했다. 말하자면 문명 세계에서 점점 자연 깊숙이 들어간 것이다. 모험 이야기는 왜 흥미로운 것일까?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와 접하면서 겪게 되는 감각과 사고, 그로 인한 확장감을 독자에게 안겨주기 때문이 아닐까. 리마를 잃은 후에 펼쳐지는 아벨의 복수와 방황 역시 끝나지 않는 여정을 의미한다. 그녀의 유골과 섞일 때까지 아벨은 끝없이 탐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강렬한 주인공 못지않게 조연들도 흥미로운데, 특히 추장의 어머니인 ‘클라클라 할멈’이 인상적이었다. 이 할머니의 가장 큰 역할은 잠들기 전 모든 이에게 말을 걸어주고 재워주는 것. 모두가 해먹에 들어가면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지막 한 사람이 잠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누군가 깨거나 뒤척거리면 중단된 대목부터 다시 이어진다. 상상만 해도 근사하지 않은가? 부족 사람은 매일 밤 할머니의 이야기에 자신의 꿈을 섞을 테니까. 클라클라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들의 공유 자아, 혹은 전뇌와도 같을 테니까 말이다.

작가인 윌리엄 허드슨은 자신이 태어나 살았던 아르헨티나 대자연에 대한 사랑을 평생 간직했다. 그리고 자신의 대표작에서 생태학자와 같은 세밀함으로 산호뱀, 거미, 짖는원숭이, 벌새, 꽃들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숲은 인물 뒤의 멈춰진 배경이 아니라 활성을 가진 존재, 생생하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투과한 햇살이 녹음에 걸러져 차분해진’, ‘공기처럼 가벼운 초록빛 캐노피’와 같은 숲의 이미지는 리마의 외양 묘사와도 연결되는데, 그것은 리마가 숲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천사인 리마, 그러나 사랑에 눈을 뜬 생생한 인간인 리마는 자신의 기원에 대해 알고자 한다.

줄거리가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라면 곳곳에 등장하는 풍성한 묘사는 가지 위에 앉아 노래하는 새들과도 같다. 꽁지깃과 노랫소리가 더할 수 없이 화려한 새들. 이 책을 읽는 것이 기나긴 노래를 듣는 것과 비슷한데 작품 전체에서 가장 눈부신 대목들이 여지없이 묘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사실상 묘사로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즙이 많은 다디단 열대 과일을 먹는 것과 흡사하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에 과즙이 가득 찬다. 이토록 풍요로운 맛은 애석하게도 21세기의 소설에서는 희소한 것이다. 21세기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감각, 이런 소설이 태어나기 쉽지 않다. 그러나 21세기 독자인 우리는 앞선 모든 세기를 탐닉할 수 있기에, 주인공 아벨의 환상적인 여정에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