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영본색 26호

2022-06-21 하지

  안녕하세요 이하오입니다.


  중영본색 26호에서는 단오절 화제작이었던 맹인 검객 무협영화 <목중무인 目中无人>, 칸이 주목한 중국의 90년대생 영화인들, 스마트폰 밀수업자가 된 소녀 <열여섯의 봄 过春天>을 소개합니다.

1. 이백의 <협객행>을 스크린으로 옮긴 무협영화

  6월초 중국의 ott 아이치이에서 공개된 75분짜리 웹영화 <목중무인 目中无人>이 화제입니다.

<목중무인> ©더우반  

  현상금 사냥꾼인 맹인 청씨는 수배자를 잡아 관아로 향하던 중 결혼식 준비에 한창인 양조장에 들립니다. 술 한 잔에 졸음이 밀려와 양조장 구석의 마구간에서 한나절 단잠을 자고 깨어난 청씨는 코 끝에 스치는 피비린내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합니다. 청씨는 더듬거리는 지팡이 끝으로 한 더미의 시체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조장의 젊은 여주인 을 발견합니다. 힘깨나 쓰는 집안 자제의 행패에 결혼식 당일 남편과 오빠, 지인을 모두 잃고도 신고조차 할 수 없어 분노한 옌은 ‘정의 구현(公道)’하고자 낙양으로 향하는 청씨에게 동행을 요청합니다. 낙양에 도착한 청과 옌은 각자의 길로 흩어지지만, 머지않아 청은 옌이 낙양에서 ‘정의 구현’은커녕 더 큰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낙양으로 향하는 청씨와 옌 ©더우반

  도박을 즐기는 ‘맹인 검객’ 설정은 2003년 일본의 무협 영화 <자토이치>를 연상시키지만, <목중무인>은 중국적인 요소를 더해 차별화를 시도했습니다. 수많은 무협지의 모티프가 된 당나라 시인 이백의 <협객행>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목중무인>은 순식간에 관객들을 무림세계로 데려갑니다.

十步杀一人,千里不留行

열걸음에 한 사람씩 죽이며 천리를 가도 막을 자가 없고

事了拂衣去,深藏身与名

일을 마치고는 옷을 털며 사라져 몸과 이름을 깊이 감추었다

  단순하고 강렬한 시구만큼이나 영화의 내용 역시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전개됩니다. 정의를 위해 칼을 뽑아든 맹인 검객의 무술은 묵직하고 날카로워 마치 강한 필압으로 짧은 시간 내에 그려낸 동양화 같은 인상을 줍니다. 75분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각종 액션씬에서는 중국 무협지에서나 볼법한 기발한 기술을 넣어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멀리서 숨을 죽이고 화살을 겨누는 상대의 위치를 오감으로 파악하여 칼끝을 겨누는 장면에서는 우아함과 낭만까지 느껴집니다.

©️더우반

  매년 700편 이상 쏟아지는 중국의 웹영화 중에서 <목중무인>은 단연 올해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웹영화는 온라인 플랫폼 상영을 목적으로 상업영화에 비해 작은 규모로 제작되지만, 수익에 대한 부담이 적어 젊은 영화인들이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시도함으로써 중국 영화계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목중무인>은 무협물의 마니아들이 모여 작업한 작품입니다. 프로듀서 위군자(魏君子)는 홍콩 액션 영화 60년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용호무사 龙虎武师>의 감독으로, 적은 예산으로 퀄리티 높은 액션씬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맹인 검객을 완벽하게 소화한 배우 사묘(谢苗)는 아홉살에 아역배우로 데뷔하여 이연걸, 구숙정, 오맹달, 주윤발 등 홍콩의 전설적인 배우들과 함께 무협물을 작업했으며, 오랫동안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가 최근 각종 무협물에서 활발하게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92년생 감독 양병가(杨秉佳)는 꾸준히 무협, 액션물의 각본을 쓰다가 <목중무인>으로 첫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2. 칸이 주목한 중국의 90년대생 영화인들

  중국의 젊은 영화인들의 기세가 대단합니다.

75회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중국 신인감독들의 작품 ©️더우반

  ▲단편부문 황금종려상 95년생 진검영(陈剑莹): <The Water Murmurs(海边升起一座悬崖)> ▲퀴어 종려상 97년생 황수립(黄树立): <Will You Look At Me (当我望向你的时候)> ▲시네파운데이션(학생 경쟁) 2등상 98년생 이가화(李家和): <Somewhere(地儿)> ▲신인감독을 대상으로 프로젝트 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선정된 91년생 곽용비(郭容非)까지 총 4명의 90년대생 중국 감독들이 지난 75회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왼쪽부터 진검영, 황수립 감독 ©️웨이보  

  단편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The Water Murmurs>는 운석 충돌로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한 마을에 도착한 소녀가 마을의 마지막 모습을 관찰하는 공상과학 영화입니다. 중국 화웨이의 설립자인 임정비(任正非)의 셋째딸 요안나(姚安娜)가 주인공을 맡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진검영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무엇보다 나의 조국 중국에 감사한다.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내가 중국 땅에서 느낀 정취와 정겨움이었다”라고 언급해 중국 네티즌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지난해 <노매드랜드>로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한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자오 감독이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 발언을 한 것이 알려져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고 중국 내 상영이 전면 금지되었던 것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입니다. 수상한 감독들 중 학생 경쟁 부문 수상자인 이가화를 제외하면 모두 뉴욕의 대학원에 재학중입니다. 중국 정부의 규제와 검열을 벗어나 미국에서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며 세계적인 무대에서 인정받는 젊은 영화인들에게 중국의 네티즌들은 응원과 찬사를 보냈습니다.

3. 밀수업자가 된 열여섯 소녀
<열여섯의 봄> ©️더우반

  열여섯 페이는 부모님의 이혼 후 심천의 엄마 집에서 지내며 매일 아침 국경을 넘어 홍콩으로 등교합니다. 눈을 보는 것이 소원인 페이는 절친 와 함께 겨울에 일본 여행을 가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읍니다. 조를 따라서 파티에 간 페이는 우연히 조의 남자친구 하오가 벌이는 스마트폰 밀수범죄를 도와주게 되고, 수고비로 큰돈을 받습니다. 여행 경비를 금방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하오를 쫓아간 페이는 화사장의 밀수 범죄조직에 합류하고 심천과 홍콩을 오가며 물건을 전달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페이는 일찍이 필요한 돈을 다 모았음에도 화사장과 가족 같은 팀원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껴 조직에 머무르고, 일 때문에 자주 마주치게 되는 페이와 하오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페이와 하오 ©️더우반  

  국내에서 <열여섯의 봄>으로 소개된 이 작품의 원제 '过春天'은 중국 밀수업자들 사이에서 ‘안전하게 세관을 통과하다’라는 뜻의 은어로 쓰입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홍콩의 면세품을 중국 대륙에 가져다 팔아 차액을 남기는 범죄가 성행했습니다. 한편 过春天을 직역하면 ‘봄을 넘다’로 해석됩니다. 이 제목은 어느 곳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넘어 다녀야 하는 페이의 상황을 함축합니다. 이혼한 페이의 부모는 각각 심천과 홍콩에 새 가정을 꾸렸습니다. 페이는 이따금 아빠를 찾아가지만 새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는 아빠의 모습에 서운함을 느낍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페이의 절친 조는 유학 가려면 영어 공부를 해야 된다는 배부른 투정만 늘어놓습니다. 가정과 학교에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던 페이는 되려 끼니마다 함께 밥을 먹는 밀수 조직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을 수양딸이라 부르며 아껴주는 화사장을 엄마처럼 따릅니다. 형편이 비슷한 하오와의 대화는 페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페이의 고민은 깊어만 집니다.

화사장과 페이 ©️더우반

  84년생 감독 백설(白雪)은 직접 심천과 홍콩을 수십 번 오가고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을 인터뷰하며 페이의 이야기와 고민을 세밀하게 그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전형성을 탈피한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 또한 인상적입니다. 가냘픈 체구의 주인공 페이는 대담한 성격과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금세 밀수 조직의 팀리더가 되고 성인 남성과의 기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습니다. 생각 없어 보이는 부잣집 딸 조는 아빠와 남동생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집안의 의사결정 구조에 불만을 가집니다. 페이의 엄마는 매일 밤 애인과 친구들을 불러 모아 밤새 마작을 치고 담배꽁초를 화분에 버리는 철없는 인물이지만, 누구보다 페이의 안전과 행복을 걱정합니다. 조직원들에게 끼니마다 밥을 차려주고 다정하게 돌봐주던 화사장은 조직 내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배신자를 잔인하게 처벌합니다. 관객들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에 이야기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조와 페이 ©️더우반

  <열여섯의 봄>은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촬영, 연출, 미술, 음악, 연기 등 모든 방면에서 어설픈 데 없이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감독 겸 배우 천장장(田壮壮)이 제작을 맡아 왕가위, 지아장커 등과 함께 작업해온 베테랑 제작진을 꾸려주는 등 대대적인 지원사격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장예모, 천카이거와 함께 5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인 천장장은 중국 정부에 타협하지 않고 소수민족을 주제로 작업하는 등 꾸준히 소신 있는 행보를 이어왔습니다. 최근에는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제작과 연기 등 여러 방면의 도움을 주며 중국 영화계 신인들의 성장에 거름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열여섯의 봄> 제작진. 왼쪽에서 첫번째 백설 감독, 네번째 천장장 감독 ©️더우반

이 작품은 네이버시리즈온, 티빙, 웨이브, 왓챠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입니다.🌞 오늘 북경의 일출시간은 4시 45분, 일몰시간은 19시 46분으로 낮 시간이 15시간에 달합니다. 하루 일과를 다 끝내도록 지지 않는 해를 감상하시며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발행인 이하오
이메일 주소 lihao29@naver.com  
stibee

이 메일은 스티비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