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줌마들
언니들과의 적당한 동침
입원 첫날 받은 환자복이 너무 컸다. 가슴 아래까지 한껏 추켜올려서 허리춤을 말았다. 그래도 허리가 커서 줄줄 내려온 바짓단이 바닥에 닿았다. 병실 개수대 앞에서 마주친 옆 침상의 골수종 환자가 “질질 끌리니까 나처럼 바지를 좀 접어서 입어” 했다. “네에” 하고 착한 척 대충 대답하고 내 침상에 들어가 커튼을 쳤다. 좁은 침대칸 안에서 짐 정리를 하느라 몇 발짝 움직이다 허리춤을 올리고 또 몇 발짝에 허리춤을 올렸다. 서랍에 티슈와 속옷 뭉치를 정리하고 있는데, 손이 불쑥 들어왔다.
세상이 주책이라고 하는 행동.
세상이 오지랖이라고 하는 행동.
세상이 지들밖에 모르고 제멋대로 구는 여자들이나 한다고 하는 행동.
그는 커튼 너머에 쪼그리고 앉아 손만 쭉 빼서 내 바지를 둥둥 걷어 올렸다.
“이렇게 걷어야 바닥에 안 끌려.”
말 안 듣는 내가 오죽 보기 답답했던 모양. 그건 그의 사정이고, 내 공간과 옷을 마음대로 침범하고 만지는 그에게 순간 기분이 팍 나빠졌다. 하지만 간사하게도 바지를 걷어 접고 났더니, 정말로 움직이기 편해져서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원치 않는 이 공동생활에서 불필요하게 감정을 쓰지 않기 위해서, 완전한 타인으로 지내기 위해서 굵게 그어놓았던 선이 그렇게 1시간도 되지 않아 얼렁뚱땅 지워졌다.
*
50~60대, 그러니까 내 어머니 연배의 여자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아줌마라고 불렸다. 아줌마라는 단어는 중년 여성이나 기혼 여성을 이르는 말인 듯하면서도 분명한 멸시를 담고 있다. 다툼이 생길 때 “아줌마!”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은 기선제압의 의미가 다분하다.
‘여자 같지도 않은 여자’인 아줌마, 여기에는 나이 많은 여성이라든가, 외모가 빼어나지 않은 여성, 살이 찐 여성, 자동차 운전대를 쥐는 것보다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밥통 운전’이나 하는 게 어울리는 여성, ‘여성성’으로 서열을 매겼을 때 하위 계급을 형성하는 여성, 따라서 무시받아도 될 만한 여성이라는 의미가 몽땅 들어 있다. ‘아줌마’라는 말은 중년 여성 혹은 기혼 여성의 기를 죽이거나 다툼의 주제와 무관하게 심기를 긁어놓는 데에 효과가 있다(“뭐라고? 아줌마아?”). 아줌마로 호명된 이가 화를 낸다면 “아줌마니까 아줌마라고 하지”라고 하면 그만이다.
연령에 대한 말인 듯, 그러나 분명한 멸시였던 이 호칭은 더 촘촘하게 구획을 나누고 배치하고 이름 붙이는 혐오의 원리에 따라 ‘아줌마’에 ‘할머니’를 더한 ‘할줌마’라는 또 다른 구분을 낳았다. 아줌마는 때로 ‘가난한 살림을 도맡아 하는 억척스럽고 정 많은 중년 여성’의 이미지로 낭만화되기라도 하는 이름이지만, 할줌마는 ‘시대에 뒤떨어진 데다 우악스러우며 시들어 빠진 중늙은이 여자’라는 아주 선명한 멸시의 이름이다.
나도 도통 저이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 때가 있었다. 그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경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예쁘고’, ‘민폐 끼치지 않는’, ‘개념 있는’, ‘젊은 여자’였던 과거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을 넘나들 수도 있고, 규칙을 어길 수도 있고, ‘기분 좋은 날 잠깐 좀 시끄럽게 구는 게 뭐 어때?’ 하는 거, 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고, 아무에게나 말을 붙이고, 자기들끼리만 쓰는 공간도 아닌데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거, 그런 건 너무나 진상이고 개인성을 중요시하는 이 시대에 명백한 문화지체라고 그들을 내심 무시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진상’이고 ‘지체’된 사람들이 중년 여성뿐이었나.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청년들이 전철에서 소리를 켜놓고 게임을 하거나 영상을 시청하고, 중년 남성들은 카페에서 얼음 담긴 음료를 바닥에 와장창 쏟아놓고 점원에게 닦아달라는 요청도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산 밑에서, 공원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떠들다 셔츠를 가슴 아래까지 걷어 올리고 배를 내밀면서 싸우는 게 ‘할줌마’들의 소행인가? 내 눈이 도덕 경찰을 자처하면서 집요하게 그들만 쫓아다닌 이유가 사실은 ‘할줌마’들 때문에 나까지 개념 없는 여자들이라고 도매금으로 팔려나가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단 걸, 다들 돌을 던지니까 만만해서였다는 걸, 정의감을 채우는 손쉬운 방법이라서 그랬다는 걸 깨달으면서 내 속에 얌전하게 똬리 틀고 있는 비열함을 알아보았다. 날 섰던 시선이 조금씩 둥글어졌다.
하지만 그건 여전히 그들이 나와 타인으로 존재할 때, 가령 그들이 게스트하우스의 떠들썩한 옆방 팀으로 있을 때, 나에게 잠깐 사진을 부탁하며 카메라를 건넬 때, 그러니까 ‘중년 여성들이 있는 장면’이라는 화폭에 담겨 있을 때나 의미 있는 시선이었다. 아프기 전까지는 일이나 활동, 취미 생활 어떤 것으로든 접점 없이 맞닥뜨린, 나를 그저 ‘딸뻘 여자’로 볼 중년 여성과 어떤 모양새로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될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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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병동에 처음 입원했을 때 만나서 한 달을 함께 보낸 그 여자들을 나는 언니들이라고 불렀다. 각자 어디에서 왔는지를 통성명처럼 이야기하면서 내 옆자리 언니는 충청도 언니, 앞 침상의 언니는 경기도 언니, 대각선 자리의 언니는 강원도 언니가 되었다. 조금씩 알아가면서 경기도 언니는 오이지 언니, 강원도 언니는 사자머리 언니가 되었다. 나이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이 호발하는 60대 즈음, 나만 한 자식들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때 병동에서 젊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것 같다. 언니들은 저들도 암환자이면서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내게 안타깝다고 했다. 할 일 많고 창창하고 싱싱한 시절이 무기한으로 표백되어 버린 것에 대해 그들은 제 새끼를 바라보듯 나를 연민해 주었다. 그들이 내 젊음을 아까워하는 이유를 이해 못 할 건 아니어서 대체로 웃으며 넘겼다.
아픈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딱하다. 어린이는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험한 일을 겪기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서 안되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제 몸통 길이쯤 되는 카테터를 삽입한 채로 배밀이를 시작한 아기를 보면서, 내 또래의 양육자를 보면서 마음이 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살아온 늙은이라면 이제 편안히 쉬면서 빛 볼 날만 남아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서 휴게실에 대기 중인 내 또래의 자녀들을 보면서도 속이 시큰했다.
내가 불쌍해요? 언니들은 왜 자식들 다 키우고 자유로워진 지금에 와서 아프고 그래요.
쉬이 비틀어지곤 하는 마음을 언니들에게 내보인 적은 없었다. 내가 내 또래의 양육자나 보호자를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데이는 것처럼, 언니들이 내게 내비치는 마음도 자기 자식의 양육자로 살면서 생긴 맥락이 있지 않겠나 싶었다. 이를테면 내 앞 침상에 있었던 오이지 언니는 책 읽는 나를(내가 이제 책을 읽는다고 칭찬받을 나이는 아닌데도) 무척 기특해했다.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병든 젊은이인 나와 ‘일을 하고 있는’, ‘결혼한’, ‘건강한’, ‘연애를 하는’ 자녀들의 나이가 비슷해서 생기는 긴장이었다. 그들이 장성한 자녀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식 자랑 타임이 되면 조금은 내 눈치를 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식 불평 타임이 되면 오이지 언니는 아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투덜거리면서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 사람들이 이상해졌어…”라고 말했다. 비혼을 고수하고, 언니의 아들을 두둔하는 내가 이상하다고도 했다. 피차 아프고 기운 없는 사람들이라 언성을 높여 오래 다투지는 않았다. 적당히 기분이 상해서 대화가 중단되고, 그러다가 또 슬그머니 날씨 이야기나 하며 풀어지기도 했다.
이유, 논리, 타당이라는 원칙으로 똑똑 나뉘는 대화 패턴이 아니라 눈치껏 이야기하고, 안 맞는 건 눙치고 넘어가는 적당함. 그들의 ‘적당함’이 사자머리 언니나 나의 코골이도 견디게 해주었을 것이다. 사자머리 언니에게서는 은근한 쉰내가 났다. 옆 침대를 쓰던 오이지 언니는 냄새가 나서 힘들다며, 샤워를 하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부은 기관지 때문에 평소보다 코를 크게 고는 나 때문에 언니들은 사자머리 언니에게 그랬듯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을지 모른다.
살다 보면 민폐도, 침해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어느 선까지는 용인하며 선해하고, 어느 선을 넘어가면 ‘잘’, ‘적당히’ 말하는 것. 그건 인간관계에 대한 절륜한 기술이었다. 눈치와 분위기와 서로의 상태, 관계를 모두 생각하고 꿰맞추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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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수검사를 하는 날, 골수를 뽑아내는 희한한 통증에 별안간 오열했다. 의료진은 당황해서 많이 아픈지 물었다.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해놓고도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하필 뼈조직을 긁어내는 마지막 단계가 수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의료진이 장골에 꽂힌 골수천자를 힘주어 누르는 동안, 그에 맞춰서 몸뚱이가 조금씩 좌우로 흔들렸다. 처치 대상일 뿐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 몸. 화물처럼 취급되는 내 몸. “억, 억” 하고 목 끝을 치받는 비명이 울음으로 자꾸 비어져 나왔다. 검사를 마치고 모래주머니를 엉덩이 뒤에 대고 누웠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숨넘어가게 울고 있는 내 침상 커튼 밑에, 귀여운 지비츠들이 붙은 크록스가 와서 섰다.
“도미이, 괜찮아?”
오이지 언니가 커튼을 슬쩍 걷었다. 눈만 내놓고는 나를 살폈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 뒤로 쭉 길러서 숱 많고 새까만 까치집 머리에, 깊고 땡그란 두 눈. “많이 아팠지이.” 그 순간은 내가 여태까지 목격한 가장 사랑스럽고 다정한 장면일 것이다. 언니가 너무 귀엽고 고맙고 웃겨서, 괜찮다고 해놓고 또 오래 울었다.
그러고 나니 후련하기는 한데, 언니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해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울 일까지는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울었을까. 다들 쉬어야 하는데 소란스럽게. 지혈을 마치고 심란한 마음에 복도를 휘적휘적 걷는데, 사자머리 언니가 나를 붙들어 세웠다. 나를 보는 두 눈이 순식간에 빨개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들어찼다.
“아파서 우는 게 아니드만. 너가 우는 소리 들으니까 나도 눈물이 나데.”
힘내라느니, 나을 거라느니 하는 불필요한 응원 없이 그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서러워서 울드만….” 잘도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소음을 내지 않는 것은 보통의 매너다. 소음을 견딜 수 있다면, 소음의 주인공과 내가 친분이 있다거나 그 사람이 소리를 내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빽 소리를 내는 건 신나는 기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기의 돌고래 소리는 “신난다!”라는 언어가 된다. 그래서(노키즈존에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른은 기다린다.
그들은 오래도록 이어진 내 울음을 ‘내 딸뻘의 젊은 여자’가 골수검사를 받으며 겪었을 서러움으로 받아들였고, 비교적 긴 시간 동안 병실을 채운 소음이 저절로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콜센터 대기음에 “상담사는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입니다”라는 멘트를 삽입해야 할 정도로 가족을 경유해야 깊은 공감이 가능한 이 사회의 가족주의에 진저리가 쳐지지만, 내 고통을 함께 앓아준 사자머리 언니의 눈물이 거짓인 건 아니다. 나는 그 정도로 ‘적당히’ 이해했고,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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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지 언니는 나와 같은 급성골수성백혈병 환자로,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 뒤 1년 만에 병이 재발하여 이곳에 왔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한 이후로도 코로나19에 걸리거나 엄한 세균이나 곰팡이에 감염이 될까 봐 밖에는 나가지도 않고 집에서만 살았다고 했다. 언니는 모든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는 오이를 한 망 사다가 오이지를 담갔다. 그 오이지는 면역억제제를 끊고 일반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날 개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이지 뚜껑을 여는 날이 되도록 언니는 자기가 만든 그걸 먹을 수 없었다. 언니는 재발 판정을 받고 입원을 하던 날, 아침 일찍 오이지를 짜서 가족들의 식탁에 차려주고 나왔다. 입도 못 대본 오이지 맛이 궁금하고 아까워서, 언니는 종종 오이지를 무치고 나오던 날을 이야기했다.
요식업을 했다는 오이지 언니는 장사 수완이 무척 좋았던 것 같다. 지내보면 안다. 다정하게 늘어뜨린 음절로 말을 걸었다. 사람을 살피는 걸 좋아했다. 이전에 그를 만났던 간호사들도 병원으로 돌아온 그를 더러 ‘분위기 메이커’라고 불렀다. 좌중을 압도하고 쩌렁쩌렁하게 웃긴 말을 늘어놓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적당한 오지랖과 무관심을 발휘했다.
오이지 언니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부양한 중년 여성이라는 점에서 인생 경로가 비슷한 경상도 언니와 죽이 잘 맞았다. 경상도 언니는 사자머리 언니가 퇴원하고 나서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어딘가 통달한 듯, 체념한 듯 힘이 풀린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침상에 누워서 오이지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휴게실에 나와서 앉아 있다가 살아온 이야기를 조용조용 늘어놓곤 했다. 어쩜 다들 이렇게 똑같이 무척 억울하고 화가 나는 사연을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지.
“내가 살림하고 일도 더 하는데, 나한테 ‘내가 언제 너한테 일하라고 했냐’ 이러니까 내가 할 말이 없어. 내가 남편 길을 그리 들였다고 남편도, 우리 엄마도, 시엄마도 말하는데 또 할 말이 없데…. 그렇게 참으면서 애들 클 때까지 이혼을 기다렸는데 몸이 탁 터진 거지.”
몸이 말을 하는 거지.
질병을 어디까지 고된 삶의 후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고되게 살다가 병을 얻은 주변 사람들이 아픈 몸을 해석하는 방식은 이 중년 여성의 그것과 찍어낸 것처럼 닮아 있었다. 열심히 사는 동안 공부도 여행도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서 여한이 없다는 이 언니가 이 병 덕에 꼴 보기 싫은 남편 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덕에 자기만 생각하면서 이기적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역경을 딛고 새 삶을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고 다른 삶을 살아보는 기회로 읽어내는 주인공은 매력적이다. 경상도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병실 밖에서 무언가를 떠받치며 살다가 여기에 온 중년 여성들이, 아픈 몸으로 또 아픈 나를 떠받쳐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마찬가지로 중년 여성들인 청소노동자들과 공명하는 순간, 매일 아침 청소노동자들이 대걸레를 슥슥 밀어내며 언니들과 주거니 받거니 자기들의 인생론을 한바탕 늘어놓는 시간을 나는 제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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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지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병실 생활을 반복하면서 더러 겪는 일이다. 3개월 전 나는 그 병실에서 “언니 우리 잘 퇴원해서, 다음에는 생김치도 먹고 오이지도 먹어요”라는 말을 인사로 하고 나왔다. 매일 볶고 지져서 나온 볶음김치에 물린 오이지 언니와 나는 매 끼니 나오는 김치 뚜껑을 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이지 언니와 나는 비교적 식이 제한이 덜한 골수종 언니들에게 우리의 볶음김치를 간호사 몰래 넘겨주곤 했다. 그러다 내가 퇴원 날짜를 받은 무렵 오이지 언니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간호조무사가 언니의 커튼 안에 이동식 변기를 들여놓아 주었지만, 언니는 사용하지 않았다. 기어이 화장실에 걸어가려고 했다. 간호조무사들은 그 모습을 발견하면 뛰어와서 언니를 부축해 화장실에 데려갔다. 감염 예방을 위해 늘 닫혀 있던 커튼들 중 언니 침상의 커튼만 열려 있는 날이 늘어갔고, 언제나 곁을 향해 관심을 빛내던 짙은 눈동자가 조금씩 사위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통제로도 해결되지 않는 통증으로 끙끙대는 언니의 신음 소리가 잦아졌다. 악다문 어금니 사이로 짓이겨져서 나오는 흐느낌이 어떤 건지 나도 모르지 않아서, 언니가 신음 소리를 내면 나도 모르게 같이 배에 힘이 들어갔다. 언니들이 내가 혼자 처량하게 울다 그치기를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오이지 언니에게 새로 달린 진통제가 이번에는 듣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그 지경으로 화장실에 걸어가려는 오이지 언니를 다그치지 않았다.
오이지 언니는 오이지를 유품으로 남겼다. 다른 가족들은 싫어하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놓고 떠났다. 때늦은 부고를 듣고서, 사라진 미각을 돌아오게 해주지 않을지 기대감에 부풀어 소금물에 오이를 담그는 언니의 모습을 상상했다. 미처 꺼내지 못한 질문들이 떠올랐다.
언니도 오이지에 돌을 눌렀어요? 누름돌은 한 번 삶는 거예요? 나는 매실청에 들깨가루를 듬뿍 넣고 무쳐낸 친구 엄마네 오이지를 좋아하는데, 언니는 어떻게 무쳤어요? 크록스에 지비츠가 너무 많아서 무겁지는 않아요? 아이, 물론 예쁘죠. M, O, M, 하트 지비츠는 아드님이 사준 거예요? 센스 좋네. 환자복밖에 못 봤지만 옷도 잘 입으실 것 같아.
적당하게 눙치고, 적당하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반복하는 동안 나는 그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살갑게 굴걸 그랬다. 고맙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느닷없이 사라지기도 한다는 걸, 이제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