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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좋아하는 내 모습을 좋아한다
넌 내 모든 거야
내 여름이고
내 꿈이야
- 검정치마, Everything

자주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옛날 옛적에 도교라는 종교에서는 무위자연 즉 흘러가는 모습 그대로를 추구했다던데 나는 자꾸만 과거에 연연하고 후회하고 실망하고, 그러면서도 그리워 한다. 요즘 나를 가장 크게 사로잡고 있는 감정은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 많은 과거 중에서 내가 주로 생각하는 주제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사랑', '과거의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 '과거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해 내가 걷어차버린 좋은 인간 관계'인데, 결국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이다. 혼자 구상해본 결말 없는 소설도 대개 그런 그리움과 외로움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닮았다.
최근에 후회하는 주제 세 가지 중 첫번째, '과거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해 종일 생각한 적이 있어서 그 얘기를 가장 먼저 해보려고 한다. 내 소설 속 인물들은 주로 옛 인연을 잊지 못하고 꿈같은 첫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어떤 소설 속에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다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어떤 소설 속에서는 회상으로 그친다.
소재가 팟- 하고 떠오르면 얼른 메모를 해둔 다음에 야매 로맨스 소설을 자주 쓰곤 하는데 해피 엔딩으로 쓰자고 결심했던 것은 항상 많아도 5화까지밖에 못쓰고 방치해두고 만다. 내가 아직 그다지 해피 엔딩인 로맨스를 경험해보지 못해서인가. 아니 근데, 따지고 보면 해피 엔딩인 로맨스는 존재하지 않는 거 아닌가?
하여튼 내가 이성애 로맨스 소설들을 쓸 때 대부분의 남자주인공은 항상 어딘가 서툴고 귀여운 너드남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그런 부류. 여자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사랑스럽고, 높은 확률로 고양이상이다. 어느 쪽이든 그런 사람... 아직 못 만나봤다. 그리고 누굴 좋아해본 적은 있어도 사랑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혼자 앉아서 검정치마의 노래처럼, 새소년의 노래처럼 사랑하는 미래 언젠가의 나를 상상해보곤 한다.
내가 더 성숙해지면 내가 옛날 동화들에서 소위 '왕자님' 포지션인 주인공들처럼 되고 싶다. 어릴 때부터 왕자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물론 입고 있는 옷이나 말을 타고다닌다는 점을 좋아해서 였긴 하지만. 과연 난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보여주고 사랑 속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고 또 그 사람도 날 좋아해주는 상상을 하면 괜히 벅차다.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애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 버렸다. 쓰면서도 웃기다. 이런 주제로 뭔갈 쓰는 게 너무 즐겁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치원생 때부터 거의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항상 누군가를 좋아해 온 '프로 짝좋아함(?)러'였다. 한 번 좋아하면 홰까닥 돌아서 그 사람밖에 안 보이고 그 사람 생각밖에 안 하는, 그리고 그런 감정을 즐기는 호구 새끼였다. (그러면서도 사랑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다) 요즘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은지 벌써 반 년 정도 됐다. 확실히 편하긴 하지만 현재 머물고 있는 기숙사를 나가게 되면 금세 다시 좋아할 것 같다. 아무도 안 좋아하는 지금 혼자 다짐해 본다. 감정이 너무 달콤해도 그거에 날 다 쏟아붓지 말자.
내가 지치지 않도록 나에게 영양을 주는 속도와 온도로 감정에 빠져보고 싶다. 나는, 좋아하는 감정에 빠져 붉어진 얼굴로 말수가 많아지는 내 모습을 그 사람보다 더 좋아했다. 눈을 반짝이며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예뻤던 것 같다. 하지만 새벽에 구차한 노래를 듣다가 짝사랑 때문에 괴로워 하고 질투심과 떨어지는 자존감에 울던 모습은 싫어한다. 빠지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희망을 버리는 연습을 하자. 희망은 어떤 때엔 되게 나쁘다. 희망보다는 확신이 더 편안하다. 희망은 결국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거니까.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좋아하는 주체는 나고, 누군가를 좋아하자는 선택도 내가 했으니 그걸로 후회하지는 않도록 할 거다. 기숙사에서 나가면 여름의 마지막 달이 된다. 누군가 아주 내 취향인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예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계절을 너에게 줄 거야

wave to earth - seasons

"If i could be by your side, I'll give all my life my seasons"
(내가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내 모든 삶과 계절을 너에게 줄 거야.)

머릿 속을 스쳐가는 온갖 장르의 노래들을 제치고 처음으로 소개해주고 싶은 노래는 이거였다. 가끔씩 유독 인디 밴드 노래들에 빠져 사는 시기가 있는데 그 때 발견한 밴드고 노래이다. 듣다 보니까 나도 팬이 되버렸다.
이 노래가 좋았던 이유는 들을 때마다 사랑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직 사랑하는 상태로 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 관한 노래 같기도 하다) 사랑이 메마른 채 기숙사 생활을 했고, 짝사랑이고 연애고 사랑 비슷한 걸 안 한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 운명적인 누군가를, 내 한 몸 다 바쳐 사랑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랑에 형태가 있다면, 그렇다면 이 노래는 아마도 가장 부드러운 형태의 사랑이겠지? 세상의 끝이 서로인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이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고 싶다.

* 웨이브투어스 공식 유튜브 채널에 seasons 의 공식 오디오 영상 대신 해당 노래가 담긴 앨범의 풀버전 오디오 영상이 있어서 그 링크를 첨부했어요. ride나 light 같은 이 앨범의 다른 노래들도 다 좋으니 들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seasons는 세번째 트랙 :)
두렵기 때문에 우선 나에 관해 쓰곤 했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 (2018, 헤엄 출판사)

"하지만 나는 영영 나다. (...) 나는 지칠 줄 모르고 계속 내가 된다.
그 사실이 지겨워 죽겠을 때가 있다." -p.103

수필의 좋은 점은 그 글을 쓴 작가에 대해 마음이 생겨나 그의 일상을 눈여겨보게 된다는 것인 것 같다.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런 자신을 글로 잘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세상으로 들여오는 데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수필들도 그런 사람들이 쓴 것들이다. 처음으로 소개할 책을 고르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머릿 속에 온갖 책들이 떠올랐다. 소설을 소개할까, 비평집을 소개할까, 아니면 이거? 이러다 보니까 역시 처음에는 에세이 / 수필을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뭔가 비전문적이고 요상한 야매 경수필 쓰기를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책이 좋았던 이유 첫번째는 두꺼운 책이라 아껴읽기 좋을 것 같아서 였고 두번째는 읽는 것만으로도 작가님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이 퐁퐁 솟아났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때로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며, 내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는 모습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이 분 같은 사람과 만난다면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 핫한 작가님이고 유명한 책이지만, 수많은 이 책의 팬들 중 한 명에 슬쩍 내 이름을 끼워본다.

* 위 이미지에 일간 이슬아를 발행중이신 이슬아 작가님의 홈페이지 '이슬아 닷컴'의 링크를 걸어두었어요.
미래에서 기다릴게

시간을 달리는 소녀 (2006)

"내 유카타 입은 모습 보고 싶지 않아?"
"미안, 그건 좀 보고 싶네."

이 영화는 로맨스/ 판타지/ 성장/ 애니메이션 영화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축이라 처음으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대략의 줄거리 : 주인공 마코토는 어느날 내리막길을 내려가다가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기차에 치여 죽...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생긴 타임 리프 능력 덕에 극적으로 살게 된다. 그 이후 과거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언제든 '시간을 달려'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데, 어느날 마코토의 가장 친한 남사친 치아키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온다. 치아키와의 친구 관계가 좋았던 마코토는 시간을 되돌려 그 고백을 없던 일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여전히 필요에 따라 시간을 돌리며 살아가던 때. 우연히 또다른 남사친 고스케를 좋아하는 여자애를 알게 되고 고스케와 여자애를 이어주기 위해 과거로 시간을 돌린다. 시간을 돌려 마코토가 그 둘을 이어준 날은 다름 아닌 마코토가 죽었어야 할, 그러니까 타임 리프를 통해 아무도 모르게 되살아난 날이다. 고스케는 여자애를 집에 데려다 준다며 마코토에게 자전거를 빌려 달라고 하고,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를 타고 기차가 오기 직전의 내리막길을 내달린다. ...]
위는 내가 대충 흘러가는 대로 쓴 줄거리인데 반전과 결말은 빼놓고 정리해봤다. 내가 이 영화에 대해 느낀 점을 길고 두서없이 써둔 일기까지 있다. 유명한 영화라는 걸 알았고 언젠가 봐야겠다 싶었던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며칠동안은 이 영화에 되게 빠져 있었고 왜 이제야 봤나 싶었다. 심지어 OST도 너무 좋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본 사람들만 이해하는 먹먹한 감정이 있는 것 같아서 한동안 여기저기 다 추천하고 다녔다.

2021년 5월 30일
어제는 시.달.소를 봤다. 그런 거 볼 때마다 괜히 인물들이 살았던 그 한 시절에 가보고 싶어진다. 경험해 본 적 없는 그 향기를 마셔보고 싶다. 치아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하쿠 같은 느낌이 있다. 꼭 내가 걜 좋아하는 것처럼, 그 만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날 슬프게 하고 먹먹하게 하고 간지럽게 하고 그러다 상실감을 안겨줬다. 그런 게 좋은 영화인 것 같다. 시달소는 지브리도 아닌데 지브리 같은 냄새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끝나는 것에 대해 한없이 아쉬워지게 만든다. 울고 싶어진다. 캐릭터 주제에 내 마음을 꺼내어 보여주고 싶게 만든다. 기억 조작된 것 같고 되게 어이없게 좋다. 꿈 속에서 만난 사람이랑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디즈니의 황홀함이 꿈을 증폭시키고 꿈을 믿게 만든다면 지브리나 시달소 같은 이런 만화 영화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할 걸 알면서도 꿈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마 나는 시달소를 정주행할 때마다 이런 기분을 느낄 거다. 나중에 꼬오옥 일본에 가봐야 겠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 네이버 영화 리뷰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피드백 혹은 하고 싶은 말은 boyifall@naver.com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002에서는 저의 여름 기념 아이돌 노래 + 여름 느낌 영화 소개를 하고 + (클래식은 잘 모르는 저를 위해) 저의 친구가 클래식 음악 소개로 참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