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으로 가득 찬 그림자였어요, 다리를 절던 까마귀가 풍장되던 검은 거울이었어요 (혹은 잠을 위한 속삭임)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어쩌면 춤은 새의 다리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심리학자의 병도 어쩌면 나비의 심장에서 나온 것일지도 몰라요, 제 고향 바닷가에 있는 암벽에는 공룡의 발자국이 있지요, 새 발자국처럼 아련했어요,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나봐요,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새벽이면 먼 나라에서 새들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요, 마치 아주 어린 당신이 나를 마중 나오는 것 같아요
가슴에 꽉 찬 이 물은 해류처럼 자꾸 움직여요, 대륙보다 물이 더 많은 지구를 내 몸은 닮아가는 것 같아요, 차가운 물이 혈관을 지나갈 때마다 짐승들은 죽어가고 뜨거운 물이 지나갈 때는 식물들이 죽어가는데 속수무책으로 내 몸은 별로 향해 가고 있어요, 보금자리를 찾지 못한 성교처럼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은 흐느끼지요, 마치 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갈 때 정류장으로부터 따라오던 검은 비 같아요
저 마른 풀에도 보랏빛 꽃이 피었어요, 잎과 줄기가 말라가는데도 들양귀비꽃이 붉게 웃고 있어요, 불안한 저녁에도 밤은 왔구요, 어둠이 오자 꽃술처럼 떨리던 가녀린 불안은 사라졌지요, 다리를 오그리고 잠 속으로 들어가는 활짝 핀 꽃처럼요, 빛이 오기 전까지 오므린 다리 속으로 꽃술을 가
난하게 보호하는 꽃처럼요
밤이 이렇게 일찍 올 때 내 속에서 자꾸 죽자고 소리 지르는 당신은 누구인지, 거리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탄생에 대한 노래만 흘러나오고, 저 대양 위에는 흰 이처럼 번득이는 눈이 내리고 아직 목숨이 없는 아기의 얼굴을 한밤이 흘러가요, 빛을 잃어서 헐거운 나무들은 해안에 서서 밀려오는 물결을 향해 젖은 손을 자꾸 내미는데
여관에 누워 나는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사랑을 생각했어요, 잃어버리고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랑에 대하여, 그 오렌지와 레몬의 세월, 자두와 수박의 세월, 검고도 붉은 과육의 세월, 그 뱀 같은 땀의 세월에 대하여, 저 푸르른 심장의 나날들 그리고
날 보내지 말라고, 날 비행장에 두고 부두에 두고 터미널에 두고 도시 속으로 사라지지 말라고 날 여기에 두고 실종되지 말라고 문자를 보냈어요…… 별의 시간이 사마귀처럼 돋아나는 발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효 시절 동안 내가 뭉갠 건, 나의 몸이요, 내 몸은 새로운 냄새를 풍겼어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냄새를 향해 당신, 아직 어설픈 상처를 드러내본 적 있어요?
다만 청국장 끓이는 냄새를 맡으면 길고 긴 죽음의 잠 속에서 실종되어버린 곰 생각이 왜 날까요, 오래전에 한 밥집에서 청국장을 먹었을 때 김 속, 긴 잠 속에 빠져 있던 곰이 나타난 적이 있었어요, 그 곰을 잡아먹은 어미들이 곰의 가죽을 걸치고 우는 것을 보았지요, 먹어치운 곰의 살을 뱃속에 담고 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요, 시간이 시간이 아직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태어나서는 사라져요
고래의 가장 가녀린 실핏줄 속에까지 만신의 얼굴은 들어 있어서 저 무거운 점액의 생명인 바닷물은 일어나는지도 몰라요, 물결, 그것 자체가 만물인 바닷물 속에 가만히 들어가면 내 무시무시한 조상들이 아직 그곳에 살고 있어요, 아직 나이지 못한 나의 조상들은 바다를 헤엄쳐요, 나는 따뜻한 물속에서 내 조상이 지냈으면 했어요, 한류의 차가운 심장을 두들기는 물고기로 다시 시작해서 어느 식탁 위에 오르고 싶은 나는 인간의 여자 시간 사십오를 살고 있는데
어쩌면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숨만이 길인지도 몰라요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아주 늙은 당신이 나타나는 것은 왜일까요, 가녀린 손가락의 나날 동안만 연애를 하던 청춘의 별 같아요, 작은 개다리소반에 올려져 있던 영혼 같아요, 밭에서 따온 아침 오이 같아요, 그리고, 고추장에 박힌 아린 마늘 같아요, 아직 돌아오지 않는 새를 기다리는 숲 같아요, 검은 거울 같아요
증발한 수분을 기다리는 눈물 같은 시간 앞에서 푸른 미역의 말들을 그렸지요, 도자기를 굽는 가마 앞에 쪼그리고 앉아 흙이 굳어가는 시간을 추억했어요, 얼마나 깊이 바다로 내려가야 우리는 바닷속에 사는 모든 생명들을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심연에서 태어나서 불을 환하게 켜는 이름 없는 해파리들에게 저 가녀린 빛의 다리를 준 이는 누구일까요? 흐느적거리는 팔다리에 심연의 아늑함, 존재의 배를 타고 바다의 바닥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어 같아요, 이 밤은 그네의 흔들거리는 시간처럼 유모차 하나가 내 몸속에 살아요, 누군가 나를 언제나 실어나르는 그 유모차 속에 앉아 나는 노래하지요, 노래하지 않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악보는 날아가는 새의 귀에 들어 있지요, 눈 감은 물고기들 피곤한 물이 물고기들을 해안에 밀어놓았고 게들은 뻘 안에서 울었어요, 검은 손을 가진 바람이 와요, 태양은 자러 바다 밑으로 들어가네요, 그 바다 밑을 우리는 지구의 저편이라고 불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