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더위가 물러간다는 말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살짝 한풀 꺾여든 정도다. 오늘은 연인과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 날인데, 그런 설렘을 무색하게 할 만큼 날씨는 후덥지근하다. 살갗을 파고드는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어떤 데이트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연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내가 준 선크림 꼭 바르고 나와!

선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노화가 빨리 온다고 선물받은 선크림이다. 끈적한 녹아내림, 묘한 이질감, 뽀얗게 물드는 피부가 싫었던 나는 손사래를 쳤었다. 그러나 창문을 넘어 실내조명과 컴퓨터의 모니터에서도 자외선이 투과된다며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하는 연인 덕에 적어도 데이트 나갈 때마다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부담스러운 화이트닝 기능도 없었고, 무엇보다 피부에 펴 발랐을 때 순하고 산뜻한 느낌이거든.

외출할 때 모자를 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너로 인해서 최소한의 피부관리도 하게 되었다. 새삼 고맙다는 말을 전해본다. 그러자 너는 선크림은 그냥 비누로 지워지지 않는다며, 세정력이 뛰어난 클렌징 제품을 또 선물 주겠다고 말한다. 뿌듯해 보이는 얼굴이 참 사랑스럽다.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와중에, 내가 쓰는 슈프림 모자만큼 예쁜 모자를 찾았다며 밝게 웃는 연인이다. 자랑스럽게 내미는 휴대폰 화면 속에는 인정할 만큼 ‘정말 예쁜 모자’가 있다. 깔끔한 블랙 컬러에, 둥글둥글한 실루엣, 그리고 위트있는 내용의 레터링 포인트까지. 

패션에 있어서 신발만큼 임팩트있는 존재가 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매일 손이 갈 법한 데일리한 블랙 모자는 구원투수다. 특히 남자는 액세서리를 할수록 패션이 다소 과하게 보일 수 있는데, 이렇게 적당히 유니크한 모자는 담백하지만 시선을 끌며, 기능에 충실하고, 무엇보다 스타일링에서 중요한 ‘편안한 마무리’라는 멋을 선사한다. 그래서인가. 옷장에는 이미 블랙 모자가 세 개나 더 있지만 하나더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피어오른다. 커플 모자로도 괜찮아 보이지 않은가.

한두 걸음에도 식은땀이 흐르고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엿가락처럼 늘어지기만 하는 요즘, 시원한 물이 담긴 텀블러는 필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물을 많이 마시는 하마 같은 연인을 둔 덕에 외출할 때 얼음을 잔뜩 넣은 텀블러를 챙기는 것은 루틴이 되어버렸다. 특히 이 텀블러는 넓은 반달 모양의 손잡이가 있어서 들기에도 편하고 장시간 보냉 효과도 뛰어난 장점이 있다. 그래서 저녁에 함께 산책할 때면 이것만큼 소중한 존재가 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걷다 보면 목이 타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 한 모금 마시면 마치 오아시스 샘물처럼 느껴지거든.

여름 저녁의 공원은 뜨거운 불길이 일고 재가 쌓여가듯이 점차 고요해진다. 우리는 텀블러 속의 짤랑거리는 얼음 소리를 들으며, 아직 밝긴 하지만 어스름하게 보이는 둥근 달을 함께 바라본다. 그래도 올여름은 비가 많이 와서 죽을만큼 덥지는 않았던 것 같아, 연인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 자석에 이끌리듯 달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내년에 함께 보낼 여름에도 너와 데이트할 때 시원한 물을 먹일 수만 있다면. 이까짓 더운 계절쯤이야 앞으로 예순아홉 번쯤은 더 보낼 수 있겠다고.

오늘은 참으로 무더운 여름 날이었고, 맥주를 마셔 살짝 알딸딸하게 취한 채 연인과 함께 걸어가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세상이 워낙 어지러운지라 집까지 직접 데려다주는 사이라니. 연애 초창기를 떠올릴 만큼 정답다.

집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포옹을 해주는 연인. 목 언저리에 고개를 묻는데 포근하게 퍼져오는 향수 잔향에 온몸이 나른해진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은 부드러움과, 물에 젖은 시원한 솜에서 날 것 같은 깨끗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중성적인 향이다. 갓 세탁한 린넨 셔츠에서만 느낄 수 있는 프레시함도 있고 만다린의 적당한 상큼함, 네롤리와 시더우드까지 여름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릴만한 노트로 구성된 향수다. 그러나 아직까진 한국에 그다지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지. 연인은 여름마다 이 독특한 향수만을 고집한다. 덕분에 추운 계절에도 언뜻 이 향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지금도 나는 은은하게 퍼지는 그 네롤리 잔향을 기억해 내며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