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최초의 영수회담
“박정희 대통령,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1965년 7월 20일)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돼 국회 비준 절차에 들어갔지만 사회 각계각층의 반대의견도 강했음.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이 이끄는 민주당이 합당해 민중당을 결성해 한일협정반대투쟁에 나서는 상황이었음. 이 와중에 여당인 공화당이 7월 14일 단독으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과 ‘베트남전쟁 전투병 파병 동의안’을 날치기로 발의했음. 극한의 대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과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은 영수회담을 가졌고, 일주일의 냉각기를 가진 후 임시국회를 열어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논의하기로 합의하였음. 하지만 민중당 내부에서는 회담 결과를 둘러싸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의 심해졌음. 강경파를 이끌던 윤보선 고문이 민중당을 탈당하면서 강경파의 탈당이 이어졌음. 박순천의 온건파가 박정희 정권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며 야당은 분열되었음
✔️6월 민주항쟁
“전두환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1987년 6월 24일)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도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 조치'를 발표하고 시위대와 야당에 탄압을 계속 했음.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축소하려는 시도가 밝혀지고, 연대생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사경을 헤매면서 전국으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어 갔음. 야권과의 대화를 위해 전두환 정부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영수회담을 실시함. 김영삼 총재는 4·13호헌 선언 철폐,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장 사면복권, 6·10 민주항쟁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했지만,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권한과 책임을 넘겼다고 즉답을 회피함. 이에 김영삼 총재는 회담 결렬을 선언했음. 이후 노태우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재 개헌을 요구했고 다음날 전두환은 이를 받아들임
✔️어디서 본 듯한? 여소야대, 의약분업
“김대중 대통령,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2000년 6월 24일)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후 정국은 여소야대였음.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과의 혐치를 통해 정국을 풀어나가려고 했고 그 결과 8번의 영수회담을 실시 했음. 2000년에는 김대중 정부가 의약분업을 추진해 의사들의 반발에 직면한 상황이었음. 한나라당은 의약분업을 연기하자는 입장이었음.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가 만나 ‘예정대로 의약분업을 실시하되, 임시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약사의 임의조제 금지를 포함한 약사법을 개정한다'는 합의를 이뤄냈음. 이 후 각 당사자가 합의를 이루면서 의약분업이 실시되었음. 이는 대표적인(거의 유일한) 영수회담의 성공사례로 꼽힘
✔️대한민국 강타! 광우병 사태
“이명박 대통령,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 (2005년 5월 20일), 정세균 통합민주당 대표(9월 25일)
소위 ‘광우병 사태'로 불리는 한미 쇠고기 협상으로 인해 강한 시위대의 저항에 부딪힌 이명박 대통령은 이와 더불어 한미 FTA 비준의 처리를 의제로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실시함. 하지만 양측은 이견만 나타내고 회담은 소득 없이 끝남. 광우병 사태로 국회 원구성이 3개월 이상 밀리는 등 정국이 마비되자 새로운 정세균 대표와도 영수회담을 함. 회담 자체는 7개의 합의를 이끌어내나, 정세균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에 다 내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내 입지가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옴
✔️가장 최근의 영수회담
“문재인 대통령,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2018년 4월 13일)
2017년 당대표로 취임한 홍준표 대표는 "둘이 만나서 문 잠가놓고 무슨 말을 하는지 국민들 궁금하게 하는 그런 회담을 하는 것은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산물"이라 말하며 영수회담은 없을 것이라 말함. 하지만 그 해 10월 미국 방문 당시 북핵위기 대처를 의제로 영수회담을 제안하기도 함.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문재인 대통령이 영수회담을 제안했고, 홍준표 대표도 남북정상회담만이 아닌 정치 전반으로 의제를 넓히자고 역제안하며 성사되었음. 다만 영수회담은 별 소득 없이 끝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