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 책임이 필요해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을 시간을 살아왔다. 그 시간 동안 가장 막막했던 경험이 뭐냐고 한다면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시간은 밤 11시, 초등학교 3학년에게는 잘 시간이 훌쩍 지난 늦은 시간이다. 다음날 1교시는 수학이고 그 시간에는 ‘콤파스’라는 준비물이 필요하다. 그때 나에게 준비물이란 전날 밤에 가방에 고이 넣어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융통성 없는 어린이의 머리 속에는 아침 등교길에 문방구 들러서 사가면 되지, 하는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그걸 말해줄 엄마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날 엄마는 해외여행인지 출장인지를 떠나 집에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빠도 없었다. 집에는 방에서 쿨쿨 잠든 동생과 외할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콤파스’와 어린 나와 몽당연필과 면도칼. 우리 집에 있는 콤파스는 한쪽에 연필을 끼울 수 있는 평범한 콤파스가 아니라 전용 심을 끼워야 하는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 심을 빼낸 자리는 지름이 너무 작아서 연필을 끼울 수 없었고, 연필 뒤쪽을 깎아내서 그 자리에 꽂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어린 나는 밤을 지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손을 다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거의 톱밥만큼 조금씩 연필 꽁다리를, 방망이 깎는 노인마냥 깎아가는 어린이… 시간은 점점 흐르고 눈은 점점 감긴다. 졸리고 막막하고 울고 싶다. 
지금 생각하면 간단히 아침에 사가면 되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콤파스랑 연필 따로 들고 가서 선생님한테 해달라고 하면 되지, 아니 애초에 그거로 엄청난 제도를 하지도 않았을 텐데 ‘난 가져왔다 손바닥 때리지 마~’ 하고 친구 걸 빌려 쓰면 되지. 사실 지금의 나였다면 그냥 손바닥 한 대 맞고 끝냈을 것이다. 와 진짜요? 이걸로 제 모든 책임과 잘못이 면제된다고요? 대박!을 외치면서… 어쨌든 지금은 수도 없이 떠오르는 많은 해결책들이 열 살 어린이한테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나한테는 그게 일생일대의 미션이자 인생의 고난이었다. 준비를 못 해가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그걸 책임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어떤 일에 책임을 느낄 때마다 그 밤의 막막함이 함께 떠오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던데 큰 책임에는 큰 막막함이 따른다고 덧붙이고 싶다. 나는 그날 결국 어설프게나마 몽당연필 꽁지를 콤파스에 쑤셔넣는 데 (반쯤) 성공했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그걸 써먹었는지 그냥 친구 걸 빌려 썼는지는 모르겠다. 해냈다는 성취감보다 못 해내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잠들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어릴 때부터 독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시험이라는 게 없었던 초등학교 때는 한 달 내내 방과 후에 남아서 담임이랑 둘이 교실 환경미화를 다 했다(이때 젊은 여자 담임에게 들은 ‘넌 절대 선생님 되지 마라’는 말씀은 가슴에 새겼다). 읽지 않아도 되는 권장도서 100선을 다 읽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시험 기간이 되면 책꽂이와 CDP를 봉인했다. 고등학교 때는 체육대회 날에도 학교 야자실에 등장해 당번 교사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럴 때는 잘도 독했으나,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복선인지 친구 관계에서는 그 흔하다는 ‘절교’나 ‘쌩깜’을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결심했다. 이제는 쿨한 사람이 되자고. 넘쳐나는 에너지를 뿜어내지 않고, ‘독함’을 티내지 않고도 내 일을 책임지는 여유롭고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교복치마 밑에 체육복을 받쳐 입고 뛰어다니지도, 8kg짜리 책가방을 짊어지고 6층 야자실까지 기어올라가지도,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뻘개진 얼굴로 숨을 씨근덕대지도 말자고.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얼마간은 계획대로 되었다. 인생에게 처맞기 전까지는. 콤파스나 시험 성적 따위가 아니라 감정과 관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절교나 쌩깜을 경험하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감정과 관계에 미숙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나와 절교하고 싶어서 부글댔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학창 시절의 나는 그런 미묘한 마음들을 눈치챌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마주쳐 소리를 낼 손바닥조차 못 되는 청소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죄 지은 놈은 이렇게나 본인의 죄를 모른다.) 지금이라면 나에게 그렇게 마음과 정성을 쏟아주는 친구들의 소중함을 알 텐데 그때는 무슨 자신감인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박이다 진짜…   
맞고 또 맞고 때리고 또 때리고
아무튼 여러 차례 사랑과 이별과 관계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들에 처맞은 지금은 나의 방식이 무엇인지 안다. 어떤 마음이 끝났을 때, 나는 반성과 참회와 수행의 마음으로 감정과 관계를 종료한다. 그러니까 반드시 어떤 의례를 거친다는 뜻이다. 모든 슬픔과 마지막에는 의례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다고 믿는다. 물론 어떤 일들에는 성급한 의례 대신 끈질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그 모든 게 없었던 일이 되지도 않는다. (이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고 있을지, 그 벌을 언제 받게 될지가 내 삶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뭔가를 ‘그냥 두기’, 그리고 나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두고 보기는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저걸 잘하는 사람들을 회피형(때로는 회피충)이라고 부르던데 그들이 아주 신기한 존재로 느껴진다. 회피라는 건 뭘까? 영원한 지연일까? 아니면 망각의 첫 단계일까? 뭔가를 회피했다가는 그것이 오히려 영원히 회피할 수 없는 흉터로 변하고 말 거라는 믿음이 나에게는 있다. 내가 회피한 무언가가 영원히 그곳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않기가 가능하다고? 회피 전문가 계시다면 저에게 한 수 가르쳐주시길…  

또 한 가지 어른이 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인생 대부분의 일들이 갠플이 아닌 팀플이라는 점이다. 운이 좋게도 나의 어린 시절에는 팀플이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내 선에서 여러 명의 역할을 수행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가족 단위, 사회 단위로 해결하지 않으면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그런 사건이 없었다는 뜻이다. 친구 관계도 대체로 내 맘대로 되었다(다시 한 번 반성의 시간). 내가 좋아하는 친구는 나를 좋아했고, 내가 아무 생각 없어도 대부분 나에게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갑자기 모든 지평이 넓어지고 모든 가능성이 수만 가지로 뻗어나가자 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미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다양할까. 어쩌면 이토록 다종다양 아롱이다롱이 형형색색이라 서로를 미치게 할까. 나는 늘 최선을 다해 내가 저지른 마음과 일들에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럴수록 책임지지 못할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졌다. 특히 그게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종류의 일이라면. 게다가 나와 인생의 책임을 다른 무게로 느끼는 사람과의 팀플이라면. 얼마간은 슬쩍 눈을 감고 당장의 행복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죄도 아니고 양심에 거리낄 일도 아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다. 빡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나로 태어났으니 나 자신이 감당할 수밖에. 결혼과 출산을 할 수 없는 이유를, 아무도 안 시켰는데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사람도 또 없을 것이다. 심연을 너무 들여다보면 결국 심연도 나를… 

어쨌든 이런저런 시기를 다 지나 이제는 친구에게 뇌에 힘 좀 풀으라는 조언을 듣는 30대다. 덕분에 층고가 높고 넓고 밝은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한 시간 넘게 울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십 대 시절의 내가 봤다면 저게 나일 리 없다며 1초 만에 무시해버렸겠지… 하지만 그 재수 없는 애도 결국엔 이게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말 거라는 걸 안다. 걔의 마음 속에도 나랑 똑같은 책임감이 들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이게 본인의 마음에 책임지는 방법이라는 걸 깨달을 것이다. 
그날 콤파스를 안 가져갔다면 손바닥 한 대 맞고 끝났겠지만 나는 그걸 선택하지 않았고. 그런 선택들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 날들이 흉터로 남아 영원히 나를 지켜봤을 거라는 걸. 물론 인생은 길고 흉터 몇 개 있다고 그게 실패한 인생일 리 없다. 단지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그렇다면 거기에 책임을 지고 싶다. 졸음을 참아가며 몽당연필의 꽁지를 깎아낼 때의 마음과 똑같이.
    
p.s. 어른의 증거 1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어요! 
사실 오늘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넷플릭스) 추천해야 하는데 지금 급히 술 마시러 나가야 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어봅니다...
가을 날씨 만끽하시는 주말 되길 바라요🤍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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