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면_일기
3월 셋째주의 일기
 이번주를 관통하는 주제는 '도파민 디톡스'이다. 지난주 일기의 발송을 늦게 만든 그 도파민 디톡스, 맞다.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소소하게 도전해보게 되었다. 도파민의 분비를 줄여 기존의 더 큰 자극을 원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일상 생활에 더 집중하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고, 이번주의 목표는 카페인은 하루에 에스프레소 2샷만 마시기(스타벅스 톨 사이즈 정도에 투 샷 들어감), 휴대폰 사용시간 줄이고, 음악은 되도록 이동할 때만, 운동은 격일로, 그리고 2주간 금주하기였다. 
무자극의 삶
 와인으로 인한 두통이나 숙취는 느껴본 적이 없는 나인데 저 예쁘지만 스테레오티피컬한 프렌치 감성 할인하던 와인이 내게 엿을 주었다. 일어난 직후에는 괜찮았지만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고, 나는 그 상태로 팔라펠 반죽을 열심히 갈았다. 저녁에는 남은 고수를 쌀국수 컵라면에 듬뿍 넣어서(물론 레몬즙도) 먹었고, 친구와 넷플릭스 <메이플소프>를 보았다. 예쁜 얼굴에 속은 대가로 약간의 엿을 먹고 일요일은 어찌저찌 지나갔으나 문제는 월요일이었다. 지난주까지는 아침에 한 잔, 오후에 한 잔, 하루에 총 두 잔의 커피를 마셨다. 오후 커피를 위해 오전 커피는 스킵했는데 '아 이대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마트에 가서 루이보스 한 봉과 카누 디카페인을 사왔다. 아침에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만큼 어떤 음료나 향을 즐기는게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걸어서 마트에 왔다갔다했는데 정말이지 피곤했다. 10년 동안 커피를 달고 사느라 몰랐던 내가 가진 본래의 텐션을 느낄 수 있었고, 놀랐고, 약간의 현타도 왔다. 또한 카페인을 줄이니까 당에 대한 욕구가 커져서 웬일로 아메리카노에 쿠키까지 먹었다(물론 하나를 다 먹진 않았다. 반은 남겨서 집에 가져갔다). 이 와중에 봄이라고 하얀 바지에 큐티뽀짝쪼꼬미 가방까지 들고 나갔다. 
 일주일 동안 술도 마시지 않았고, 커피도 정말 하루에 한 잔만 마셨다. 심지어 수요일에는 아예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았다. 월, 화, 금요일엔 근력운동을 하고나서 유산소 운동까지 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건 휴대폰 사용 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초반에는 그래도 할만했다. 휴대폰 자체에 초연해지니까 쉬웠다. 세탁소 사장님께서 맡긴 옷을 찾아주시는 동안에도 휴대폰을 보지 않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휴대폰을 보기 보다는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거나 햇살을 만끽했다. 그러다가 미친 듯이 에스엔에스의 벽에 갇히는 때도 있었는데 이 떄 내가 얼마나 급하게 콘텐츠를 소비하는지 알게되어서 놀랐다. 인스타그램에서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났을 때,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충 읽고 북마크만 한 뒤에 스크롤을 내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식의 콘텐츠 소비는 머릿 속에 어떤 것도 남기지 못한다. 나는 양질의 재밌는 콘텐츠를 갈구하며 슬롯머신의 레버를 내렸지만(우리의 뇌는 SNS의 새로고침 기능을 슬롯머신 레버를 내릴 떄와 똑같이 받아들인다고 한다) 재밌는 걸 보아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자극만 추구하고 있었다. 

 화요일 저녁엔 SNS가 주는 피로감이 문득 크게 느껴졌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답답했다. 클래식을 들으면서 소설책에 푹 빠지고 싶어졌고, 읽다가 만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앞에 둔 채 애플 뮤직의 클래식 음악 섹션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쫌쫌따리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새로 나온, 길 샤함이 솔리스트로 연주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수록된 75분 분량의 앨범이 눈에 띄었다. 내게 길 샤함은 아르보 패르트의 현대적인 곡은 연주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고전 중의 고전은 어떤 식으로 풀어낼지 궁금했다. 
 별표가 쳐져있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2악장부터 듣기 시작했다. 시간은 지루했으나 솔로 연주가 등장하는 부분이 어떻게 넘어갈 것인지 호기심을 갖고 들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잠깐이었다. 길 샤함의 고음 연주가 너무나도 편안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연주자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겠지만 예민한 악기로 듣는 사람까지 마음 졸이게 만드는 고음을 그렇게 편안하게, 잘난척하지 않고, 즐기면서, 감성적으로, 악보에 스며들듯이 연주하다니! 아주 오랜만에 다른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만 집중해서 들었다. 눈이 아닌, 볼 수 없는 콘텐츠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느끼기 힘든만큼 엄청난 것 같다. 보이지 않아서 표현하기도 더 어렵다. (해당 곡의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R4ftNTUhg58 ) 
  병아리콩과 큐민을 산 김에 후무스도 만들었다. 과자가 채소에 찍어먹어도 맛있지만 난 주로 토마토와 곁들여서 토스트로 먹는다. 후무스의 이국적인 묵직함과 토마토의 싱그러움이 합쳐진 맛이란! 마켓컬리에서 3만원 이상 구매 시 12000원 할인 쿠폰이 나왔는데 마침 올리브유가 똑 똘어졌더라. 그래서 올리브유 두 병과 그라나파다노, 페타 치즈를 구매했다. 페타치즈는 처음이었는데 웬걸, 이 아걸 왜 이제 먹어봤을까. 따로 발표시키지 않고 소금물에 담가서 보관하는 치즈라 짭쪼름하고 살짝 시큼한, 불편하지 않고 이런저런 음식에 곁들이기 좋은 톡 쏘는 맛이다. 도파민 디톡스는 음식과도 연관이 있어서 클린하게 먹으려고 했지만 어제 저녁엔 맥도날드가 너무 먹고 싶었다. 먹었다. 오늘 아침엔 라면이 너무 먹고 싶었다. 그래서 먹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버거는 단품으로 먹었고, 라면은 반 개만, 양배추와 계란을 넣고 끓였다. 맥주가 너무 먹고 싶어서 논-알코올 맥주를 샀다. 디-카페인과 논-알코올이라니. 내 인생에는 절대 없을 것이며,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두 단어라고 생각했건만.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그나저나 저 맥주 별로다. 알코올이 없어서 끝맛이 달다. 맥콜을 먹어보진 않았지만 저것이 맥콜의 맛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와 공원 산책을 갔는데 완연한 봄이었다. 그래서 더 맥주가 생각났다. 계절이 바뀔 때는 항상 싱숭생숭하다. 시간이 흘러가는게 너무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싱숭생숭함에 몸부림치기보단 이를 즐기기로 결심했고, 그 중에 하나가, 특히나 봄에는 노상이었는데 그걸 못하게 된거다. 도파민 디톡스 때문이 아니라 시국 때문에. 물론 얼굴에 철판 깔 수도 있지만 불특정 다수의 공원 이용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싶진 않다. 정말이지 난 너무 욜로 한량이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참 걱정이 앞선다. 

 신발장에서 엄마가 신던 로퍼가 나왔다. 몇 번 안 신은 것 같이 깨끗하고 질 좋은 가죽이라 내꺼하기로 했다. 사이즈가 살짝 커서 깔창을 깔았는데 딱 맞는다. 넌 진짜 내꺼야. 
 이상하리만큼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있던 한 주였다. 소소하지만 이전엔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고, 처음 먹어보는 음식을 먹었고, 새로운 올리브오일을 샀는데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획을 잘 세우지 않는다. 귀찮음보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에는 왜인지 모를 두려움이 따른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인건지 그냥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트 그렇다. 도파민 디톡스로 정신적 여유가 생겨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엄마 아빠가 어찌저찌하다보니까 태어난건데 살면서 주어진 시간을 잘 쓰는 건 너무 어렵다.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들은 많은데 시간 보낸 것만 적어도 이렇게 한가득이니,,, 좀 더 열심히 글을 써봐야겠다. 일기 외의 글은 쓰게 되면 게릴라로 보내겠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주엔 꼭 인터뷰 편집을 마무리해야지. 

*PS. 여러분 피드백 많이 주세요! 아무 피드백이 없는 것이 희소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메일링서비스는 너무나도 일방적인 콘텐츠가 여러분의 생각이 너무 궁금합니다. 어떤 피드백도 좋습니다. 분량에 관한 것이나, 사진에 관한 것이나,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더 듣고 싶은 이야기 등등 모든 피드백을 환영합니다! 피드백은 해당 링크에 남겨주시면 됩니다! 
https://forms.gle/Zn2G4eHb6avTms1K9

PS2. 제가 너무나도 애정하는 라나 델 레이의 새 앨범이 바로 어제 나왔습니다. 아주 대박이예요. 호불호는 좀 갈릴 것 같지만 증말 본인 커리어의 또 다른 시대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확실히 콰란틴의 영향도 좀 느껴지고요. 지난번에 '이렇게 다른 모두가 취준을 해야되는게 말세다'라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 피드백에 어울리는 노래 링크를 걸어둘게요. 
https://forms.gle/Zn2G4eHb6avTms1K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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