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까지 캡처해서 해 먹었으면서, 또 그새 까먹고 있었지 뭐예요.
NOVEMBER 28, 2025
회사에서 벗어난 새로운 일상도 차츰 적응하고 있습니다. 퇴사하면 작업을 더 많이 하고 외출도 잦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워낙에 일을 벌이는 타입인데다 아직은 기반을 다질 부분이 있어서 막상 다른 일들을 하느라 바쁘곤 하지만요. 그래도 점심에 집에서 요리해 먹고, 지하철 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고 자각할 때마다 새삼스럽긴 합니다.

이번 달은 일이 몰려 밤낮이 바뀐 데다가 갑자기 바뀐 날씨에 감기까지 찾아와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요. 일정이 얼추 마무리되고 13시간 통잠을 자고 난 후에야 겨우 새벽 기상 루틴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고요한 새벽에 숨을 돌리고 있자니 약간 멍해져서 지난 일기를 들춰보기로 했습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가끔 제가 적어 내린 감정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까지 했었나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따라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다른 게 재밌기도 하고요.

최근에 좋은 기회가 닿아 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했었는데,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지만 큰 틀에서는 한 길을 걸어왔다’라고 제 소개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3년 전의 일기에는 3일 전의 마음가짐으로 썼을 법한 글들이 적혀있었습니다. 조바심 내지 말고 꾸준히, 최대한 나다워지기 위해 자신을 다독이는 글들. 그 사이 ‘그림 그리고 싶다’라는 문장이 또박또박 적혀있었습니다.

지겨울 정도로 같은 마음으로 적어둔, 셀 수도 없는 그 문장들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나를 붙들어 매고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워낙에 자신을 몰아붙이고 불안해하는 성격인데도 대차게 일단 해보는 뒷배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쭉쭉 읽어 내려가다가 예전에 한창 잘 해 먹던 애호박 스파게티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레시피까지 캡처해서 해 먹었으면서, 또 그새 까먹고 있었지 뭐예요.

이 애호박 스파게티는 선배 같은 후배의 레시피에서 배웠는데요, 이탈리아 소렌토의 네라노 지역에서 만들어진 주키니와 치즈 스파게티(Spaghetti alla Nerano)에서 착안해 한국식으로 변형한 레시피입니다. 네라노 스파게티를 처음 알게 된 데다 마침 딱 집에 애호박이 있어서 만들어 먹었는데 정말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재료가 애호박 딱 하나에요. (원래는 주키니이지만요.) 치즈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치즈 없이도 해 먹다 보니 오리지널에서는 동떨어지더라도 애호박 자체의 맛을 살린 애호박 파스타 나름의 매력이 있더라구요. 쉽고 맛있어서 한동안 여러 번 잘 만들어 먹었습니다.

어렸을 때 애호박은 손사래 치던 채소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재료가 되었습니다. 가끔 장바구니 물가가 올라 애호박 1개에 2~3천 원이 넘기라도 하면 얼마나 아쉽다구요. 풍미가 은은한 편이라 다른 것과 곁들이면 묻히는 느낌이 드는 채소인데요, 곁다리 감초처럼 느껴지기 십상이지만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특유의 맛은 단독으로 먹었을 때 비로소 진가가 보입니다. 폭닥하게 잘 익은 두께감 있는 애호박을 베어 물면 달걀말이를 먹는 것 같은 고소함이 있고, 바삭한 식감을 살려 튀겨낸 얇은 애호박은 담백하고 구김 없는 패브릭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K-네라노 스파게티가 그런 애호박의 맛을 새롭게 열어주는 가장 적절한 요리라고 생각합니다.

끈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꾸준한 타입이었고, 좋아하는 건 끈질기게 곱씹어 생각하고, 어떤 노래가 좋으면 질리도록 한 곡 반복만 하는 데다 애호박에 꽂히면 냅다 애호박 파스타만 해 먹기도 하는 사람인 걸 문득 깨달았더니 어쩐지 앞으로도 수많은 밤을 새우고 예상치 못한 일이 겹쳐서 밀어닥친다 해도 다시 새벽 루틴으로 돌아올 자신이 생겼습니다. 나아갈 길이 막막하다 해도 또 이럴 때 보면 그래도 어떻게 잘 하겠지 뭐! 하며 대책 없이 믿어버리고 싶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다음번 장을 볼 때는 애호박을 사와야겠어요.
K-네라노 애호박 스파게티
* [먹는 일에는 2000% 진심] 레시피를 참고했습니다.

재료 [1인분 기준]

(필수)
스파게티 1인분
애호박 1/2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60g
올리브오일

만드는 법

1. 스파게티는 패키지에 적힌 시간보다 2분 정도 덜 삶아줍니다. (알덴테)
2. 애호박은 얇게 썰어서 올리브유에 튀기듯 볶습니다. 바삭하게 튀기는 게 정석이지만, 기름을 먹이듯 볶아도 무방합니다.
3. 애호박을 따로 담은 다음, 팬에 담긴 기름에 스파게티와 면수를 넣습니다.
4. 면수가 기름과 섞여 면에 코팅되도록 잘 볶은 후,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를 갈아 넣고 애호박을 더해서 잘 섞어줍니다.

5. 면수가 없어질 정도로 농도가 잡히면 그릇에 담아 완성!

본토 레시피는 프로볼로네 치즈를 넣어야 하지만, 한국에서는 친근한 식재료가 아니다 보니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로도 만들 수 있는 한국식 네라노 스파게티입니다. 혹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가 없어도, 올리브유에 애호박을 오래오래 볶은 다음 소금간을 약간 짜다 싶게 맞춰서 면수로 농도를 조절해도 맛있는 파스타를 즐길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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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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