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론 앤 어라운드] 에세이 
<일을 한다는 것>을 보내드립니다. 
작가로, 인디펜던트 워커로 어떻게 일을 해왔는지 씁니다.
제가 읽고, 뽑은 콘텐츠도 보내드립니다. 
제 주관과 편견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원문을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 오늘은 '어라운더'(얼론 앤 어라운드 구독자님을 이렇게 부른답니다) 님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레터를 썼습니다.
  • ‘luj****@naver.com'님께서 질문을 보내주셨습니다. 
  • 3가지 질문을 보내주셨는데요, 오늘 레터가 아마도 첫 번째 질문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머지 답도 곧 해보겠습니다.
  • 오늘은 원고가 깁니다. 오늘과 내일 나눠서 발행하는 것보다 한 편으로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묶어서 보내드립니다. ‘Clip’과 ‘Playlist’는 뺐습니다.
  • 😎 '어라운더'의 질문을 기다립니다. 인스타그램 DM 또는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 Aa Essay 일을 한다는 것 014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직장인으로 살다가 ‘어쩌다 작가’가 됐습니다. 밝힐 수 없는 어떤 사정으로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게 됐고, 다음 날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기자 생활을 하며 글쓰기에 대한 훈련도 할 수 있었고, 그동안 만들어 둔 인맥도 있었죠. 게다가 당시에는 글을 쓸 수 있는 매체가 아주 많았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비롯해 각종 사외보 등 활자 매체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대신 신문과 책을 읽었습니다. 신문을 읽다가 뭔가 자료가 될 만한 기사가 나오면 기사를 오려서 수첩에 풀로 붙여 보곤 하던 때였죠. 
 
여행작가로 첫 원고를 쓰던 때가 기억납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도 따로 없고 해서 주방 식탁에 앉아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타닥타닥타닥. 새벽에 첫 원고를 마감한 후 맥심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셨던 것 같습니다. 일하는 공간이 바뀌었고 출근할 장소가 사라진 것일 뿐, 원고를 쓴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던 그런 새벽이었습니다. 
 
그날 썼던 원고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원도 횡성 여행에 관한 원고였는지, 일본의 료칸에 대한 원고였는지, 지금까지 경험한 세계 최악의 공항에 관한 원고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그날 쓴 원고는 ‘원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 원고는 ‘6,000자 분량의 일’, 단지 그것이었습니다. 클라이언트에게 워드 파일을 첨부한 이메일을 보내고 나니 베란다 너머로 동이 터 왔습니다. 손을 탁탁 털며 ‘나쁘지 않은 시작이군’ 하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받은 첫 원고료가 30만 원이었습니다. 기자로 받던 월급에 비하면 형편없었지만 뭐, 첫 시작이었으니까요.
#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여행작가
 
작가로 링에 오른 그 아침 이후, 어떻게 이 링에서 계속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시작됐습니다. 여행작가로 일하며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삶이 시작됐다는 의미겠죠. 즉 여행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행자’와 ‘여행작가’의 구분점은 명확합니다. 여행자가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여행작가는 ‘여행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당시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여행을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여행작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노트북과 카메라만 있으면 되니까요. 독립서점에 가면 여행 에세이가 넘쳐납니다. 많은 이들이 일주일 혹은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녀와 여행 에세이를 뚝딱 만들어냅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죠. 그때도 그랬습니다. 경쟁은 어느 시대에나 치열한 법입니다.  
 
저는 여행이라는 일을 잘하기 위해 최신형 디지털카메라와 렌즈를 샀고, 삼각대를 샀고, 맥북과 포토샵 프로그램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취재 여행을 위해 튼튼한 SUV도 마련했습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설 투자'였던 셈이죠. 필요할 때마다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며 이십여 년 동안 여행작가로 일해왔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이 일 역시 직장 생활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인맥도 쌓아야 합니다. 임기응변이 필요하고 운과 행운도 어느 정도는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동안 주위의 많은 선후배 작가들이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버티기가 너무 힘들어요.” “여행은 좋아하지만 이 일을 하며 살기엔 전 아직 능력이 안되나 봐요.” “3년이나 이 일을 했지만 수입은 여전히 그대로예요. 이젠 지쳤어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아. 이젠 다른 일을 찾아야겠어.” 땀에 젖은 수건을 걸치고 링을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더 버텨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자신의 일과 운명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쉽게도 약간의 격려와 한 줌의 위로가 전부입니다.
 
이 글을 쓰며,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을 일이라고 생각하고 일하는 습관’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폐가 있는 말 같지만, 저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여행작가’입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자주 여행이 싫고 때로 지겹기까지 합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늦은 밤의 휴게소에서, 스톱오버의 공항에서, 난방이 되지 않는 엉망진창인 숙소에서 ‘하루빨리 이 일을 집어치워야지’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회사원이 회사에 가기 싫어하듯이, 여행작가인 저 역시 여행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 직장은 돈을 버는 곳입니다
 
제가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여행이 제게 일과 직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또는 여행)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고 싶은 여행 만으로는 수익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죠. 저는 의뢰받은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에서 클라이언트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와야 합니다. 여행지의 날씨가 좋지 않아도, 제 몸이 아파도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하 27도의 새벽에 태백산에 올라야 하고, 25kg의 장비를 메고 15일 동안 인도 오지를 헤매야 하고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행 작가’에서 ‘여행’이라는 단어만 봅니다. '작가'라는 단어는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야 합니다.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고 진정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우면 일이 아닙니다. 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후, 취재를 떠난 여행지는 제게 직장이 됐습니다. 직장생활을 해보신 분을 잘 알 겁니다. 직장은 기본적으로 피곤한 곳이라는 것을요. 직장은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돈을 주는 겁니다. 직장이 즐겁고 신나는 곳이라면 여러분이 돈을 내고 다녀야겠죠. 힘들지만 여기에 있으면서 일을 해달라고 직장에서 돈을 주는 것입니다.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에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월급은 ‘이만큼 줄 테니 부디 참아주세요. 당신의 시간을 이만큼 내가 썼으니 이걸로 대신하세요’라는 뜻의 위로금이다.”
그런데 직장이라는 곳에서 자아를 찾으려다 보니 간혹 문제가 발생합니다. 직장은 돈을 버는 곳이지 자아실현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특히,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년생들이 일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하는데요, 일을 잘하려고 하는 것과 일에서 자아를 찾는 것은 분명히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단순히 여행을 하는 것과 ‘여행작가라는 일’을 하는 것이 명확하게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아마도 링을 떠나간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과 자아를 동일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자기만의 세계’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골목식당’을 본 어느 평론가도 이렇게 썼더라고요. “그 썩을 놈의 ‘자기만의 세계’ 때문에 망하고 또 망한다”고요. 여행작가에게 여행은 ‘일’이고, 원고는 ‘제품’입니다. 여행이라는 ‘소재’를, 글쓰기와 사진 찍기라는 ‘작업’으로 가공한 후 원고라는 ‘제품’으로 완성해, 약속한 시간에 클라이언트에게 ‘납품’하는 것이 여행작가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행작가 아카데미, 사진 교실, 글쓰기 학교 등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수강생들이 저에게 말합니다. “여행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행작가라는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 더 어렵고 힘들 거예요.” 그리고 덧붙입니다. “실패할 확률이 아주 높지만 도전한다면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수강생의 얼굴은 굳어집니다.
 
# 기대보다는 각오가 필요하죠
 
앞서 보내드린 뉴스레터에서 말한 것처럼 이 바닥은 좁고 경쟁은 치열합니다. 일이 100개가 있다면, 10명의 작가가 90개를 가져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10개를 차지하기 위해 90명이 경쟁하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수많은 영화배우들 중 주연과 조연으로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나머지 무명배우들은 카페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택배 일을 하며 영화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갑니다. 작가를 비롯한 인디펜던트 워커들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일에는 기대보다는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일에는 자아 따위는 없습니다. 정해진 분량을 정해진 시간에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로 만들어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겁니다. 중간에 링을 떠나간 많은 이들이 각오는 하지 않고 기대만 너무 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어떤 일이든 잘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실력이 갖추기까지 그 기간이 가장 힘든데 그걸 못 견디는 거죠. 현실의 어려움을 견디고 헤쳐나가게 하는 것은 기대가 아니라 각오입니다. 노트북을 열기 전, 저는 ‘의뢰받은 원고는 의뢰받은 원고일 뿐이야. 이건 일이야’라고 속으로 되뇝니다. 원고를 쓸 때마다 이 '각오의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로부터 의뢰받은 원고에 ‘뭔가’를 불어 넣으려는 시도는 웬만하면 하지 않습니다. 뭔가 하려다 보면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어긋나기가 십상이니까요. 다만 그 일을 최대한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말은 조금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어 부연하자면, 일의 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특별함을 만들 수 있는 ‘어떤 장치’는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건 ‘스킬’의 일종인데, ‘장치를 만드는 스킬’이 링에서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영화와 성공 스토리가 자신의 꿈과 이상을 좇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 말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영화이니까요. 성공 스토리에서도 그 말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성공한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꿈과 이상만을 좇아가다 실패한 이야기를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인생은 짧아요.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기에도 짧은 것이 인생이에요.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들이 당신의 삶을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도전해 보세요. 가장 중요한 건 열정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당신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그들같은 무책임한 조언자가 되기는 싫습니다. 시작하기엔 늦은 일이 있고, 도전하기에 무모한 일이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잖아요.  
 
자, 다시 일과 인생으로 돌아가 봅시다. 저는 반드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과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세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도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제 인생과 일을 자주 의심하고 때론 회의가 듭니다. 나는 과연 이 일을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일까,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게 맞나, 여행작가가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일까. 답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한때 시를 다시 쓰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행을 가고 싶지만 막상 가려고 하니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제가 작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을까요, 그때 직장에 사표를 쓰지 않았다면 지금쯤 임원이 되었을까요, 임원이 되었다면 행복감을 느끼고 있을까요, 혹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를 부러워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끝에 내린 결론은 ‘지금 쓰고 있는 이 원고를 끝까지 잘 쓰자’입니다. 그리고 나서는요? 지금은 시원한 생맥주에 군만두 한 입을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뿐입니다. 그 정도면 아주 흡족하고 행복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자, 다시 ‘luj****@naver.com'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답을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게 시간이든 돈이든 또는 인간이든지요. 인생은 계산이 정확해서, 하나를 가져가야만 비로소 하나를 내어 줍니다. 내 삶에 책임을 진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것인데, 그건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기꺼이 내줄 수 있는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내 삶의 프로로 살아가는 것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구분하고 그걸 기꺼이 할 수 있을 때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 Word 이기는 게 이기는 것

“야구는 오래 이기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마지막에 이기면 되는 겁니다.”


- 안경현 해설위원, '2015년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 해설 당시

💬 오늘 레터가 길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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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시 한빛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