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수 밖에 없는 무례함에 대하여
2023.12.12. 아홉번째 이야기
70대 아버지, 30대 두 딸이 함께 같은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
땡비에서 나눠볼 오늘의 이야기는 🐝무례함입니다. 예의(禮儀)는 사회생활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손하며 삼가는 말과 몸가짐을 의미합니다. 무례(無禮)는 예의가 없거나 예의에 맞지 않음, 버릇없음을 뜻하죠. 살면서 어떤 인간관계를 맺었든 한 번은 마주하게 되는 무례함입니다. 당신은 무례한 이를 만나면 어떻게 하나요? 오늘 땡비와 함께 여러분에게 '무례함'이란 어떤 의미인지 편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무례씨에게(@아난)


무례씨,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무례씨는 도를 넘는 질문과 상처 주는 말을 하면서도 맑은 눈동자로 ‘무슨 문제있냐’는듯 늘 당당하게 저를 쳐다봤으니까요. 무례씨가 나타날 때마다 받아치는 일은 항상 제게 버겁고 힘들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참았어요. 그러다 한 번에 후다닥 터져버리곤 했죠. 


무례씨를 만나고 오면 자책도 많이 했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의 답을 찾기 위해 그 순간을 계속 돌려봤어요.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안 후에는 ‘그럼 왜 맞서지 못했나?'하며 스스로를 괴롭혔어요. 집에 오면 당신을 너무 긁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저를 보호하는 말들이 그제야 생각났어요. ‘다음에는 꼭 이렇게 받아쳐야지’ 하면서도 사실 그 말을 할 기회는 잘 오지 않았어요. 당신을 마주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기막혀하길 반복했죠. 


당신은 참 여러 얼굴을 하고 나타났어요. 때로는 먼 사람으로, 어떤 때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얼굴로 찾아왔어요. 무례씨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타날 때는 당신이 아픈 거라 치부하고 넘겼어요. 처음 회사에 왔을 때 무례씨는 한둘이 아니었어요. 밑도 끝도 없이 ‘네가 어느 대학을 나왔지?’라고 물어댔어요. 너무 많은 무례씨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밥을 먹다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물어보니 혼란스러웠어요. 이게 실례가 아닌 건지 내가 예민한 건가 생각했죠. 


제게 중요하지 않은 무례씨와는 거리감을 만들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요. 당신이 우리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신호를 보내주는 것 같았어요. 큰 의미 없는 관계니 여유가 생겨 맞받아칠 수 있었어요. 그런 나를 보고 무례씨가 욕을 해도 괜찮아요. 저도 당신의 무례함을 이미 욕하고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무례씨의 말은 지나가는 먼지와 같아서 새겨듣지 않아요. 무례씨와 함께할 때 제가 원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에 묵묵히 집중하면 돼요. 당신과의 관계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게 더 중요하거든요. 


문제는 무례씨가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을 때였어요. 서로 애써주던 가까운 관계라 생각했는데, 친구나 연인의 얼굴을 한 무례씨를 만났을 때 내 안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어요. 나의 어떤 면이 무례씨를 불러낸 건지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과거의 추억, 무례씨의 좋았던 부분, 온갖 시간 여행까지 하면서 곁에 붙잡아두려고 했어요. 소중한 사이라 더 어려웠어요. 잃을까 봐 두렵고, 당신과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기 힘드니까요. 솔직하게 섭섭함을 말해보기도 하고, 말없이 서서히 무례씨와 끝내 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어떤 식이든 마음에 당신이 너무 오래 남았습니다. 내게 소중했던 사람을 끊어낸다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러나 무례씨가 나타나는 건 가까웠던 관계에 사망선고가 하나씩 던져지는 거예요. 점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에요. 특히 오랜 친구였던 무례씨와 끝내는 과정에서 당신은 오랫동안 꿈에 나왔어요. 눈뜨면 한동안 멍하니 과거로 돌아갔어요. 당신을 찾아가 다시 잘해보자고 해야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무례씨와 저는 언제든 끝날 관계였다 생각해요. 제 말에 당신이 변하길 바라는 것도 무리죠. 그렇다고 무례씨를 견딜 만큼 당신에게 맞추기에는 제가 상처투성이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당신을 먼지 같은 사람으로 두기로 한 제 선택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다 생각하고 돌아서요. 


앞으로도 무례씨를 어디서든 만나겠죠. 그럴 때마다 당신의 무례함에 제 마음이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써요. 무례함을 정의하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제게 달린 거니까요. 당신을 만난 건 교통사고 같은 거예요. 그 자리에 제가 있어서 사고가 난 게 아니라 그냥 일어난 거죠.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여러 얼굴의 무례씨를 만나면서 저는 한층 더 여유롭고 단단해졌어요. 당신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나타날 때마다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당신이 의미 있다 생각해요. 다시 만나면 심장이 또 빨리 뛰더라도 먼지가 된 당신을 바라보며 이야기해볼게요. 그럼 안녕! 

무례함의 반대말(@흔희)

해바라기를 사랑하는 화가가 있었다. 노란색을 좋아하는 그에게 해바라기는 캔버스를 채우게 하는 최고의 물상이었다. 그는 화가들끼리 마을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예술촌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시골로 내려가서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찰나에 동료 화가와 동거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와의 인연을 이어준 것도 해바라기였다. 해바라기를 그린 그의 작품을 보고 동료는 인정의 말을 건넸고 그때 그는 드디어 자신의 진가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자신의 집으로 오기로 한 날을 기다리면서 그는 친구의 방을 해바라기 그림으로 채워갔다. 그 시간은 아마 자기를 알아주는 이 하나 없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희망찬 시간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던 친구가 내려왔고 기대했던 동거 생활은 2개월 만에 끝이 났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와의 동거를 친구에게 제안한 것은 그의 동생이었다. 혼자 사는 형이 마음에 걸려 그의 동생은 형의 친구에게 생활비를 대 줄 테니 형과 함께 지내보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가난한 화가였던 친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친구가 화폭에 그를 담아주었다.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 캔버스 속에 있었다. 해바라기는 다 시들었고 그림을 그리는 인물의 눈은 풀려있었다. 코는 빨갛게 색칠하여 꼭 술 취한 사람 같았다. 그는 친구가 자신을 미치광이로 묘사한 것에 분개했다. 싸움이 일어났고 그는 친구의 머리 위로 술을 뿌렸다. 모욕감을 느낀 친구는 짐을 싸서 다시 파리로 돌아가버렸다. 그 이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신문에 실렸다. 홀로 남겨진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가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잘랐다는 기사였다. 이것은 고흐와 고갱의 일화이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랐던 고흐는 자신을 처음으로 알아봐 주는 고갱을 이상화시켰고 그에게 푹 빠져버렸다. 마음을 다 줬던 상대에게서 돌려받은 것은 무례함이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조롱하는 고갱의 무례함에 고흐는 관계와 소통에 대한 의지의 불씨를 꺼버렸다. 무례함은 예의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고 보면 예의라고 하는 개념이 묘하다. 그것은 선악의 차원에서 논의될 것이 아니다. 선한 사람이라도 예의가 없을 수 있고 악한 사람이라도 예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와의 관계를 지속시킬 의사가 있다면 관계에 진심인 쪽은 예의를 지키기 마련이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혼자서 고립된 채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기대면서 사람은 나름대로의 관계망을 형성해 나간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타인의 삶에 발을 담그는 것이 관계이기에 관계를 맺으면 분쟁도 함께 뒤따른다. 때문에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최후의 보루를 만들어 놓는다. 그것이 '예의'이다. 예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줘야 할 최소한의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의를 지킨다고 해서 관계가 공고해진다고 장담할 순 없다. 그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예의보다 더 강력한 요인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실리일 수도 있고 정서적인 지지나 신뢰, 애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의를 지키지 않고 선을 넘어버린다면 그 관계는 깨져버린다. 예의는 관계에서 촉매제로서 기능할 순 없지만 기본 시작점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림으로 상대를 조롱한 고갱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갱의 머리 위로 술을 뿌려댄 고흐도, 그 최소한 선을 넘어버렸고 결국 둘은 함께할 수 없었다.


  추측하건대, 고흐도 고갱도 모멸감에 압도되어 관계를 바라볼 힘을 잃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고갱은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돈을 받고 고흐를 찾았다. 출발부터가 이미 일그러져버렸다. 만약 고갱이 온전히 고흐에 대한 우정만으로 고흐와 함께 살았다면 고갱이 화폭에 담은 고흐의 모습은 달랐을 것이다. 고갱의 무례함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기저에는 생활의 막막함으로 인해 돈에 굴복하였다는 모멸감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고흐도 마찬가지이다. 잠깐 스치듯 건네준 고갱의 인정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 고흐는 자기가 기대하는 모습으로만, 보고 싶은 모습으로만 고갱을 보고 그를 기다린다. 자신을 조롱하는 고갱의 태도에서 9개월간 해바라기를 그리며 고갱의 방을 꾸며왔던 자신의 애정이 배신당했다고 생각을 한다. 고갱의 무례함을 고흐는 고갱의 머리에 술을 뿌리는 또 다른 무례함으로 갚아준다. 그리고 그에게 버림받았다는 모멸감에 복수하듯 자신의 귀를 잘라낸다. 두 사람 다 자기를 잃어 휘청거리다 상대를, 관계를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무수한 무례함을 겪는다. 때로는 누군가의 무례함에 상처받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무례함으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무례함은 상처가 되고 관계는 단절된다. 그렇다면 무례함의 반대말은 예의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례함의 반대말은 다정함이다. 다정(多情)은 감정이 많은 것이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은 상태를 말한다.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례함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감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 또는 상대가 하는 행동이나 말 너머 자리 잡고 있는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의 주체를 알아주면 된다. ‘아, 그래서 네가(또는 내가) 무례했구나.’ 그 실마리가 풀리면 이후에는 그저 무례함을 수습해 가면 된다. 사과를 하든 무시를 하든 그냥 넘겨버리든… 견딜 수 없는 모멸감도 근본을 파고 들여다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내가 느끼는 모멸감도, 모멸감을 준 대상도 한 수 아래로 보고 넘겨버리면 그만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은, 감정은 다 사소하기 마련이니까. 


  며칠 전, 초등학생인 딸아이의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3명의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우리 집 아이를 포함하여 두 명은 꿈이 제빵사로 같았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 꿈이 없다고 했다. 같이 꿈을 이뤄서 빵집을 차리자는 두 명의 친구에게 한 아이가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꿈은 자꾸 바뀐대. 어릴 때는 꿈이 같아도 결국은 다른 일을 한대. 그러니 너희 같이 빵집 못 차려.”


   그 말을 듣고 있던 우리 집 아이가 말한다.


  ”그렇지. 근데 지금은 내가 그렇다고. “


  저녁 시간이 되어 다들 집으로 돌아간 직후, 같이 제빵사를 꿈꾸는 아이 친구에게서 따로 전화가 왔다. 꿈이 달라질 순 있겠지만 지금 같은 꿈을 꾸는 걸 기억할 수 있게 종이에 우리의 꿈을 적어보자고 말한다. 무안을 주는 친구의 말에 서운함이 들었지만 무례함에 휘둘리지 않고 따로 전화를 걸어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사건을 수습해 가는 그 친구의 마음이 참 예쁘다. 아이가 전화를 끊자 어른이 되면 빵집을 같이 못 차린다고 말하던 친구는 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냐고 넌지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우리 둘만 꿈이 같으니 질투가 났나 봐.’라고  답한다. 그 말을 듣는데 ‘너도 마음을 살필 힘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빙긋 웃음이 났다. 아이도, 아이 곁에 있는 사람들도 다정한 이들이면 좋겠다. 글을 쓰다 보니 아이에게 못 다해준 말이 생각난다. 글을 마무리짓고 나면 아이에게 다가가 나지막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


연서야, 자기만 꿈이 달라 속상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빵집 차리면 자주 놀러 와. 네가 좋아하는 빵 많이 만들어 놓을게. 너 무슨 빵 좋아해?"

무례함에 대하여(@못골)

무례함으로 인한 문제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관계나 친소를 구분하지 않고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어느 경우나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무례함이나 예의 바름은 인간관계에 관한 말이다. 예의는 일정 표현형식과 그 형식에 담겨있는 진정한 마음과 관련된다. 예의는 비록 형식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본심이 이해되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형식은 갖추었지만 다른 본심을 포장하여 악의적인 무례가 느껴지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한다.     


무례는 상대방에게서 느낄 수도 있지만, 내가 상대방에게 의도와는 다르게 무례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 자신이 얼마나 무례한 언사나 행동을 하는지 또는 자신이 얼마나 예민한지는 스스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무례하다’고 알려주어도 그런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부간의 싸움도 실제 다툴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보다 서로 말을 하고 듣는 방법이 잘못된 소통 문제로 인한 경우가 훨씬 많다.     


무례함의 바탕을 알아보면 우리는 평소에 듣기와 말하기가 잘 훈련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오직 주입식으로 기계적인 지식만 머릿속에 쑤셔 넣고 성적 올리기에만 열을 올렸을 뿐 실제 생활과는 다른 공부를 하였다. 도덕 공부도 문자로서 정답 맞히기 식의 도덕 문제에만 숙련되었을 뿐 실제 생활면에서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성적 올리기의 방법으로만 만들어진 예의나 도덕, 의리와 실제 행동은 다르다. 학력과 인격은 정비례 관계가 아니다. 배우지 않아도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배운 사람들이 더 영악하고 법을 잘 어기며 상대방을 더 업신여기며 무례한 경우가 허다하다. 


직장에서 함께 쫓겨난 동료들과 부부 모임을 하면 “사람들이 담백하고 구질구질하지 않다. 선을 넘지 않는 예의가 발라서 좋다”며 아내는 호의적인 평을 한다. 그러면서도 일정 정도 이상의 친화관계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나이 한참 적은 후배에게도 지나치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가?      

남에게 말을 함부로 놓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말을 놓으려 수작을 부리는 시도가 옆에서 보면 느껴진다. 본인은 친근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말 놓음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심리적 우월감이나 알량한 자존심 표현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을 일상으로 하면서 진즉 자신은 우대받고 인정받길 원한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하는 행위를 상대방이 자신에게 그렇게 할 때는 견디지 못한다.     


“말 잘 놓는 아무개다”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로 상투적이다. 그렇게 말 놓기를 잘하는 친구끼리 서로 만나는 순간 싸움이 일어난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로의 내심이 충돌하니 그런 다툼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안철수 씨가 장교로 군에 입대했으면서도 사병들에게 함부로 말을 놓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에게 말을 우대했다는 것을 무릎팍 도사를 보고 알았다. 한때는 그의 인격이 대단할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늘 대접만 받고 우대받는 생활을 해 온 사람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무례함에 견디지 못한다.      


친한 사람들 사이에 때로 툭 치고 들어오는 무례함은 당혹스럽다. 속좁아 보일 것 같아 반응을 보이기도 어렵다. 그럴 때는 다음과 같이 대응하자!


“왜 그런 말을 하는데?” 하고 상대방에게 그 의도를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다. '어! 내 본심을 이 사람이 알아차렸나 보다' 하고 상대방이 당황스러워한다. 무례한 말로 시비를 걸어올 때 그냥 인정해 버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래! 맞다! 그런데 왜?”라고 반문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젊을 때는 그랬다. 사소한 무례나 잘못에도 견디지 못하고 늘 반박하고 따지다 보니 속 좁은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소극적 방법이 가장 적극적 대응일 수 있다. 알러지가 있으면 알러지 유발 물질이 있는 곳을 멀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례한 사람은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냥 일정 거리를 두고 넘어가는 것이다. 무례한 사람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친구의 교우관계를 보면서 내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창 시절을 함께 생활하며 지금까지 매주 만난다. 어쩌다가 그 모임에 합류되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깜짝 놀랐다. 서로 정치의식이나 가치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늘 만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신다. 생각은 다르면서 자주 만나나, 자주 만나니 싸움도 잦다. “임마!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잘 났느냐”라는 심한 말로 언성을 높이다가도 “그렇다고 우리가 안 만날 사람들도 아니고 고만하자!”라는 말에 감동받는다. 싸움이 격해도 결국은 만난다는 전제를 깔고 서로를 챙긴다. 그런 관계에서는 내심에 상처 주는 극단적인 말은 서로 피한다. 그래도 만날 것이라는 전제가 되면 파국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무례라는 그 범위도 일정정도의 한계 내에서 인정되는 것이지 그 무례를 넘어서면 인간관계가 파탄 나고 그 사이는 결국 냉랭한 남으로 변한다. 무례는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어 적개심을 갖게 한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상대방에게는 황당함을 주는 경우도 있다. 대화 중에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말을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는 무례한 말을 할 수도 있다.     

친하기 때문에 의미 없이 한 말인데도 듣는 사람이 오히려 당혹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조심하지만 세밀하지 못하다 보니 때로 그런 경우가 일어난다. 


생각해 보고 무례했다면 헤어질 때쯤, 아니면 시간이 지나고 다음번에 만날 때 그 말이 잘못되었음을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모를 것이라고 합리화하지 말자! 사과보다 더 좋은 방법은 상대방이 말할 때 관심 기울여 듣고, 내가 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늘 말을 다듬고, 소리를 낮추어 조심하는 것이다.

💌 지난 호 구독자 후기 (#8. 골목)
눅눅님 : '골목을 주제로 이렇게 다른 형식의 글이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골목을 바라보는 시선은 세 분 모두 따뜻하네요! 덕분에 삭막한 빌딩 안 사무실 한 편에서 딱딱한 컴퓨터와 함께 씨름하는 제 마음도 몽글몽글하고 따뜻해졌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 땡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소개
 - 못골👨🏻‍🎨 : 한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진을 찍어왔다. 한계를 넘어 뭐든 끝까지 가는 남다른 의지력을 지녔다.
 - 흔희👩🏻‍🎤 : 눈치를 보지않아 '인간 사이다'로 불리나 K장녀로 은은히 돌아있다. 직업 때문에 생계형 낱말수집을 한다.
 - 아난👩🏻‍🍳 : 목구멍 보이게 웃는 큰 리액션과 미친 에너지 때문에 '어린 짐승'으로 불렸다. 빵을 굽는 방구석 빵수니. 
오늘의 땡비 어땠나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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