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기독교 페미니즘 플랫폼 - 타래'입니다. 😊 뉴스레터로 인사드릴 수 있게 되어 반갑고 설렙니다. 타래는 11월 14일(토) 오후 2시 오픈파티를 앞두고 차곡차곡 활동을 준비 중이에요. 앞으로 뉴스레터를 통해 타래가 굴러가는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오늘은 8월에 진행한 타래 활동에 대한 사전 설문조사와 파일럿 책 모임 후기를 전해드리려고 해요.

[설문조사 결과 발표]


어느 날,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가 얼마나 성평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 타래의 질문에 응답한 203명의 이야기

‘기독교페미니즘플랫폼 타래(타래)’를 준비하며 우리의 운동이 누구에게 어떤 필요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8월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100명만 응답해주셔도 대박’이라는 마음으로 설문을 띄웠는데, 짧은 기간인데도 무려 203명이 응답해주셨습니다. 8월 10일부터 28일까지 모인 응답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물론 이 조사는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표본조사가 아닙니다. 응답자 다수가 여성이고 30~50대와 수도권 거주자가 많은 만큼, 기독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문제의식과 필요를 살펴보는 자료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전혀 성평등하지 않다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가 얼마나 성평등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첫 질문에 성평등하다고 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203명 중 194명이 성평등하지 않다고 답했고, 그중 109명은 ‘전혀 성평등하지 않다’를 골랐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답답했을까요? “기독교·교회에서 당신을 가장 답답하게 만드는 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는 ‘주요 의사결정권을 남성이 독점하는 구조’(29.1%), ‘성소수자에 대해 무지하고 배타적인 태도’(25.6%), ‘성차별·성희롱·성폭력 상황에 무감각하거나 관대한 분위기’(18.2%) 순으로 답이 많았습니다.


여성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설교나 “여성은 주방, 남성은 주차” 식의 성역할 구분도 여전히 문제입니다. 하지만 응답자들은 누가 결정권을 갖는지, 누가 안전하지 못한지, 누가 공동체에서 밀려나는지를 조금 더 무겁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성불평등을 개인의 태도나 낡은 성역할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의사결정 구조와 공동체 문화, 성소수자와 성폭력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방식 같은 구조적·문화적 문제로 경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결정하고 누구를 밀어내는가

흥미롭게도 교회와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 더 선명하게 보이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같은 질문에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33.8%, 비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의 40.0%가 ‘주요 의사결정권을 남성이 독점하는 구조’를 꼽았습니다. 반면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 가운데 같은 답을 고른 사람은 9.1%에 그쳤고, ‘성소수자에 대해 무지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고른 사람이 36.4%로 가장 많았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누가 결정하는가’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를 배제하는가’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물론 이 결과만으로 성소수자 차별이나 성폭력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교회의 불평등과 차별이 단순한 불편함에 그치지 않고, 내가 믿는 신앙과 내가 속한 공동체가 같은 가치를 향하고 있는지 되묻게 하는 문제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평등과 환대를 말하는 신앙과 실제 공동체의 모습 사이에서 큰 간극을 발견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이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교회에, 이해할 언어는 바깥에

그렇다면 이런 고민을 어디에서 풀고 있을까요? 이번 설문에서 가장 역설적으로 느껴진 숫자가 여기에 있습니다. “페미니즘·성평등과 관련한 정보를 주로 어디에서 얻으시나요?”라는 질문에 SNS를 선택한 사람은 응답자의 67.5%, 강연·세미나·교육 프로그램은 61.1%, 책·잡지·연구·학술지는 53.2%였습니다. 반면 ‘교회·신앙공동체’를 꼽은 사람은 7.4%에 불과했습니다. 성평등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겪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말할 언어는 주로 교회 밖에서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다음 중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이 ‘페미니즘 성서해석과 신학’(응답자의 50.7%)을 골랐고, ‘평등한 교회 공동체’(47.3%)가 뒤를 이었습니다. 교회 밖에서 찾은 언어로 자신이 겪은 모순을 다시 읽고, 그 언어를 들고 성서와 신학과 공동체에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결과로 보입니다.


이 숫자들은 설문에 응답한 203명의 이야기이지만,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타래를 준비하며 만난 많은 그리스도인도 교회의 불평등을 권력, 차별과 혐오, 성폭력의 문제로 겪고 있었고, 그 경험 때문에 자신의 신앙과 공동체를 다시 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고민을 해석하고 말할 언어는 교회 안에서 만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그때마다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당연히 ‘타래!’라고 외치고 싶지만... 먼저 여러 활동을 보기로 드리고 “이 중에서 참여하고 싶은 활동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신앙과 페미니즘을 안전하게 나누는 네트워킹’(38.4%)과 ‘책읽기·글쓰기·대화 등 소규모 모임’(37.9%)이 가장 많았는데, 교회와의 거리에 따라 답이 갈렸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안전한 네트워킹을 가장 원했고(정기 출석자 40.0%, 비정기 출석자 48.0%), 여성주의 예배 및 영성 프로그램을 고른 사람도 각각 32.3%, 36.0%였습니다. 반면 교회를 떠난 그리스도인은 소규모 모임(42.4%)과 기독교 페미니즘 강좌·연구 활동(각 33.3%)을 더 원했고, 예배·영성 프로그램을 고른 사람은 21.2%였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을 말해줄까요? 교회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자기 생각을 안심하고 꺼내놓았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해줄 동료, 그리고 서로 지지받을 수 있는 예배와 영성의 자리가 필요한 듯합니다. 반대로 교회를 떠난 사람에게는 다시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라는 요구를 받지 않으면서, 여전히 남아 있는 신앙과 페미니즘에 관한 질문을 함께 공부하고 탐색할 배움의 자리가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연령별로 바라는 운동이 다르다

연령에 따라서도 필요한 운동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20대 이하(22명)와 60대 이상(18명)은 응답자가 적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연령대별 흐름은 비교적 뚜렷했습니다.


먼저 나이에 따라 관심 주제가 옮겨갔습니다. ‘몸, 섹슈얼리티, 성소수자’를 고른 비율은 20대 40.0%, 30대 36.5%, 40대 30.9%, 50대 20.0%, 60대 12.5%로 나이가 많을수록 낮아졌습니다. 반대로 ‘노동, 기후위기, 나이듦’은 20대 10.0%에서 40대 34.5%, 60대 50.0%로 대체로 높아졌습니다. 60대는 ‘평등한 교회 공동체’를 고른 비율(62.5%)도 가장 높았습니다. 자기 몸과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기와 일하고 돌보며 나이 들어가는 시기에 신앙에 던지는 질문이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참여하고 싶은 활동에서도 세대마다 결이 달랐습니다. 20대는 안전한 네트워킹(40.0%)과 사회 참여 및 연대 활동(35.0%)을 많이 골랐습니다. 연대 활동을 고른 30대가 9.5%, 40대가 5.5%였던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차이입니다. 30~50대는 열 명 중 네 명 이상이 소규모 모임을 원했고, 40대와 50대는 기독교 페미니즘 연구 활동에도 관심이 컸습니다(각 32.7%, 37.8%). 20대(15.0%)나 60대(6.3%)의 두 배가 넘는 수치입니다. 60대는 안전한  네트워킹(50.0%)과 여성주의 예배 및 영성 프로그램(43.8%)을 가장 많이 선택했습니다.


이 차이를 겹쳐 보면 세대마다 기독교 페미니즘과 만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대에게는 함께 연결되고 움직이는 일이, 30~50대에게는 함께 읽고 공부하며 신앙의 언어를 다지는 일이, 60대에게는 평등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예배하며 나이 들어가는 몸과 삶을 신앙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이 더 절실해 보입니다.


타래는 한 가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리와 세대에 따라 필요가 저마다 달랐던 것처럼, 기독교 페미니즘 운동도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프로그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타래는 이런 문제와 필요 속에서 “페미니즘의 언어로 신앙을 다시 쓰고, 모든 몸이 환대받는 교회와 사회를 지향하는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떠난 자리에서, 광장에서, 그리고 삶의 여러 시기에서 생겨난 질문들이 타래에서 만나 서로를 붙잡아 주는 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첫 매듭을 함께 지어주세요.


타래와 함께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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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픈 파티 참여하기: 11월 14일 토요일 오후 2시 / 장소 추후 공개

잘 가, 뚱뚱한 여름방학🌊

안녕하세요. 저는 타래 사무국의 배지은(새말)입니다. 오늘은 8월에 진행한 타래의 첫 프로그램 ‘파일럿 책모임: 뚱뚱한 여름방학’ 후기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타래의 첫 모임을 구상할 때, 몸 이야기를 잔뜩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그리고 나서는 여름이니까 몸에 대한 책을 읽고 한강 수영장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답니다. 저에 대해 이미 약간은 알고 계시는 분들도, 저랑 이번 메일을 통해 처음 만난 분도 있겠지요? 저는 계절을 감각 하는 걸 좋아해요. 절기에 맞추어 절기 음식을 먹고, 제철 과일을 먹고, 그 계절에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걸 좋아해요. 3월에는 여성의 날 행사가고, 6월에는 서울퀴어문화축제 가고, 여름에는 수영장 가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이나 눈썰매장에 가요. 가끔 빼빼로데이 같은 기념일도 챙기는 편입니다. ‘여름’ 하면 수영장이나 바다에 가야 하는데 도무지 수영장에 갈 계획이 잡히지 않더라고요. 이렇게 가만히 여름을 놓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들어 타래 프로그램으로 엮어보았답니다.


수영장을 고른 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수영장은 아무래도 몸이 드러나는 공간이잖아요. 저는 편안하고 넉넉한 옷으로 몸을 감싸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몸이 많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싶기도 해요. 몸의 곡선이나 팔뚝, 배, 가슴골에 바깥 공기를 쐬어주고 싶을 때도 있어요. 수영장은 몸을 물속에서 힘껏 움직인 후 햇볕에 잘 말려놓기 좋은 곳이라고 여겨졌어요.


수영장에 어울리는 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수영장에 가기 전에는 몸 상태를 돌아보게 돼요. 어떤 수영복이 몸에 잘 맞고 편안한지, 털이 보이진 않는지, 살이 삐져 나오지는 않는지 몸을 한 번 쭉 스캔해요. 그러면서 몸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들로 시끄러워지기도 해요. 내 몸이 마음에 들면서도 자주 부끄러워지는 마음. 매끈하고 날씬한 몸을 가지고 싶으면서도 내 몸 그대로 자유롭고 싶은 마음. 이번 책 모임에서 함께 읽은 <뚱뚱한 예수>는 저처럼 몸과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몸, 음식, 욕망, 기독교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 좋은 책이었어요.


<뚱뚱한 예수>는 사실 그렇게 친절한 책은 아니에요. 저자가 제시하는 주요한 개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지는 않아요. 처음 접하는 내용을 보고 관련된 설명을 더 길게 해주면 좋겠다고 느끼기도 했고, 저자의 주장이 합리적인지 물음표를 띄우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의미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새로웠던 개념은 “에로틱하고 감각적인 성육신”(33p.)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책 모임에서 “예수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왔다는 것은 예수를 만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분의 온도를 느낄 수 있었고, 그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토록 감각적인 예수를 저는 이제까지 별로 상상해 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예수의 몸을 감각적으로 떠올릴 때 비밀스럽고 짜릿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책에서는 또한 마르셀라 알트하우스-리드의 ‘외설적인 그리스도’ 개념에 대해서도 소개합니다. “외설은 드러내야 할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233p.)인데요. 저자는 가부장적 질서와 기독교 문화가 ‘정상적인’ 몸의 기준을 제시하고, 여성의 호기심, 식욕, 성적 욕망과 생명력을 통제함으로써 여성을 자신의 몸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여성은 성육신을 온전히 경험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문제를 드러내고 파헤치는 ‘외설적인 뚱뚱한 예수’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모든 경계를 넘어 불룩하게 튀어나와 세상에서 자랑스럽게, 다르게 자신의 신체구현을 이루는 비참하고 뚱뚱한 예수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234p.) 또한 “뚱뚱한 예수는 ‘정상적이고 좁은 것’을 거부하고 우리 시야의 경계를 확장한다.”(235p.)


요즘 효리수의 Skibidi라는 곡을 가끔 들어요. 노래에 “Celebrate your life”라는 가사가 나오는데요. 책에서도 삶을 축하하라는 내용이 있어 그 문장에 잠시 머물렀어요. 뚱뚱한 예수는 음식에 대한 욕망을 통제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인정하고 “풍요로워진 삶을 축하하고 세상을 향한 열망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신다”(222p.) 풍요로워진 삶을 축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 욕구를 수치심 없이 들여다보는 것. 직면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러면서도 다른 존재를 착취하지 않는 것. 더 많은 이들을 풍요로운 식탁에 초대하는 것이 아닐까요?

  
첫 모임에서 오늘 몸 상태에 대한 그림을 그렸어요. 
타래의 첫 모임을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은 분들이 참여해 주셨어요💙

추신: 그래서 수영장에 갔느냐고요?
photo by 수영장에 같이 간 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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