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4일 수요일
날씨 기록 : 오후에 한때 비가 내린다고 해서 장화 신고 나옴

안녕하세요? 무늬레터입니다🫶


제멋대로 떠났다가 제멋대로 돌아와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는 게 순서겠죠. 하지만 때로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고 면피처럼 보여서 주저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더 조심스럽게 에둘러서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고민을 하며 편지의 시작을 오래 망설였어요.


하지만 역시 원하는 것이 있을 땐 조금 뻔뻔해지는 것이 좋겠지요? 저는 여러분의 용서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어요.

저를 믿으라는 설익은 허세보다는 제게 가져갈 수 있는 유익한 것들을 골라 가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년 전의 편지에 서로에게 실망하길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었죠. '그동안 감사했다'라는 냉정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할 때는 정말 후련했습니다. 지나간 일을 미화시키지 않는 성격이라 정말 이대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늬레터를 쓰는 시간이 그리워졌습니다. 힘들었던 순간들 서러웠던 기억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던 생채기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데도, 그 고통과 함께 왔던 보람과 사랑의 순간들이 선명하게 빛났습니다. 더 이상 '편지를 쓰는 사람'이라고 저를 설명할 수 없어서 울적해졌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가 커졌습니다. 실망시켰다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도 서로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삼 개월의 시간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는 크고 작은 만남과 이별을 했습니다. 단편 영화 한 편을 찍었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카메라를 샀고, 영화제에서 단기 스태프로 일을 했어요.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실컷 웃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잠깐 울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편지를 보내는 상상을 했습니다. '아, 이 에피소드를 편지로 써야 하는데!' 했다가, '맞다. 이젠 편지 보낼 수 없지.' 하며 금세 쓸쓸하게 돌아서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했습니다. 그 사이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마땅한 계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무주산골영화제에서 스태프로 일할 때, 무늬책방의 손님으로 연을 맺었던 루아 님을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또 보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어요. 일하는 중이라 너무 짧게 만나서 아쉬움이 컸어요. 정말 운명이란 게 있는 건지, 딱 그날 무늬책방에 입고했던 <무등산수박등>의 작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지인분께 무늬레터를 소개했었는데 그분이 만드는 잡지에 저의 글을 싣고 싶어 하신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고맙고 반가운 마음으로 새벽에 수락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 밤, 무늬레터를 통해 연결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최근에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다시 읽었습니다. 여기에 실린 시 중에 '사랑의 전문가'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시인에게 전문가는 계획과 결과가 일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예상 밖이고 결과를 알 수 없죠.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긋나고 모순되기 때문에 희망이 있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전문가가 될 수 없기에 기대되고 가치 있는 마법 같은 일입니다.


편지는 저의 세상에 대한 사랑 시입니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제가 편지를 쓸 때는 겸허해지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 예쁘고 고운 말을 골라요. 조금은 덜 천박한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불타오를 준비'를 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부침을 겪겠지만 이번엔 무섭거나 지친다고 멋대로 뛰어내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많이 해둘게요.


다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안전장치가 그래서 뭔데?🤫


1

시즌제를 도입했습니다.

맨 위에 사진에 2023 SUMMER 라고 쓰인 거 보이시죠? 이번 연재는 여름 시즌의 시작이에요.

6월부터 8월까지 연재를 하고 잠시 쉴 겁니다.


2

종종 특집 편은 유료 멤버십 제도를 도입할 겁니다.

창작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반응에 신경이 쓰입니다. 속이 좁은 사람이라 오픈율이 낮을 때는 속상해요. 그게 계속 보내는 데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 같아서, 제게 소중한 추억은 그만큼 귀하게 다뤄 줄 사람에게만 보내고 싶습니다.

당장에 제가 9월 중순에 40일 동안 남미 여행을 가거든요. 그래서 9월 말에는 특집으로 '남미 여행' 편을 연재할 겁니다. 이 때에 유료 멤버십을 신청 받아서 멤버십 구독자에게만 편지를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려는 건 아니라 특집 유료 멤버십의 가격은 [멤버십 구독료 3,000원 + 멤버십 구독을 신청하는 귀찮음을 이겨내는 사랑]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3

힘들면 쉬어갈게요. 하지만 삶에서 제가 벌이고 수행하는 일의 우선순위에는 언제나 이 편지를 1순위로 두려고 합니다. 편지를 쓰는 일이 저에게도 여유를 찾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서요.


4

롤링페이퍼 안 받을게요. 반응을 자꾸 기대하니까 더 신경 쓰이고 지치게 되었어요. 차라리 아무 반응을 받지 않을 때가 더 마음은 편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를 돌이켜봤어요. 롤링페이퍼 같은 거 없이 일방적인 발송이었는데, 혼자 몇 달을 보내다가 처음으로 메일로 답장이 왔을 때 얼마나 감격했었는지 몰라요.

언젠가부터 제가 초심을 잃고 여러분의 반응을 매번 바랐던 것 같아요. 진짜 답을 하고 싶을 때는 어떤 창구로든지 연락하실테니 따로 답글 달 수 있는 롤링페이퍼 창은 없애겠습니다. 소통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메일 답장 등 열려있어요. 


5

길이에 괘념치 않을 겁니다. 글에 자신이 없어서 자꾸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럴 시간에 빠워(POWER)👌있고 임팩트(IMPACT)👏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첫 번째 정기 콘텐츠

영감 기행


엊그제부터 <걷는 존재>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안 그래도 잘 걷는 편인데 이런 책을 읽고, 요즘은 넷플릭스에서 <사이렌 : 불의 섬>을 보고 있어요. 근육 빵빵 체력 짱짱 언니들이 갯벌을 뛰고 장작을 패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러니 쉽게 불붙는 성격인 저는 걷고 싶어졌습니다. (소방관 언니들 제 가슴에 지른 불도 좀 꺼주세요)


냅다 걸어가고 싶었어요. 지칠 때까지 마구 걷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약속이 많습니다. 일도 하고 있어요. 시간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름의 방법으로 '다음 약속은 어디든 무조건 걸어가야지!' 다짐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서울에서 약속이 있을 줄 알았죠.




그런데 주말에 만나기로 한 보살 언니는 강화도에 있는 한 작은 섬 '동검도'를 이야기했습니다. 아, 맞다. 우리 동검도에 있는 바닷가 예술 극장에 가기로 했었지. 동검도까지는 48km, 걸으면 17시간 22분, 횡단보도 113개와 지하도 1개를 지나야 합니다. 왜 다음 약속이 하필 동검도냐고요.



걷는 존재 포기.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2시간이 걸립니다. 흠, 걷는 걸 포기하고 타기로 했으면 기왕이면 더 쉽게 가고 싶은데요? 불같은 성격이라고 했잖아요. 무슨 일이든 '기왕이면'을 붙이면서 일을 키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방관 언니들 여기 와서 제 불 좀 꺼주실래요?) 게다가 제가 서울에서 지하철과 버스로 2시간 걸리고, 보살 언니도 2시간 걸리거든요. 둘이 합치면 4시간이잖아요. 안 돼, 안 돼. 우리의 소중한 시간 환승에 낭비할 수는 없지. 시끌시끌한 버스는 싫어. 나는 언니랑 둘이 오붓하게 있고 싶다고.


말도 안 되는 계산법과 사심으로 단기 렌트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렌트였는데, '쏘카'와 '그린카' 중에 고민을 했습니다. '쏘카'를 이용하기로 했어요. 된소리가 있으면 발음할 때 기분이 좋잖아요. 저만 그래요? '걷는 존재'에는 된소리가 하나도 안 들어가네요. 어쩐지 내키지가 않더라~



아침 일찍 서울에서 출발해서 보살 언니를 태워 동검도로 갔습니다. 면적이 여의도 보다 작은 동검도는 옛날에는 세관 검사를 많이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차를 빌리기를 잘 한 것 같습니다. 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예뻤거든요. 한 쪽 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산이나 들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울퉁불퉁해서 기꺼운 길을 지나 바닷가에 있는 극장에 도착했습니다.

넝쿨이 가득 뒤덮고 있는 건물은 꼭 살아있는 것 같았어요. 안에 들어가니 영화감독이자 극장 주인인 조나단 씨가 맞아주었습니다. 표 값에 음료가 포함되어 있으니 음료를 먼저 고르라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상영관 입구로 가서 좌석을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35개의 좌석이 있는데, 좌석표에는 보드마카로 예약자 이름을 써놨더라고요. 그게 소탈하고 재밌어서 웃으면서 기다렸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껐습니다. 보살 언니가 "이런 곳은 광고가 안 나오겠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것 같다고 동의하며 정시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데 1분 정도 남았을 때 광고 대신 조나단 씨가 들어왔습니다. 스크린 아래에 마련된 공간에서 라이브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셨어요.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낭만적으로 사는 사람을 마주했습니다. 감성은 자꾸 보고 배워야 해요. 그래야 늘죠. 저는 타고나기를 무뚝뚝하고 무심한 편이라 더 많이 보고 배워야 합니다.

표현하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사는 법도 공부해야 합니다. 책도 좋지만 기왕이면 직접 경험이 효과가 좋습니다. 소시지나 만두도 시식해 봐야 맛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요. 자유도 시식해 봐야 맛을 아는 것 같아요.


동검도에 있는 바닷가 극장에서 영화 시작할 때 피아노를 치는 감독은 커피를 타고 음식을 서빙하면서 영화도 상영합니다.


저는 그에게서 제 미래를 엿봤어요. 요즘은 정말 제 앞날을 모르겠거든요. 걱정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는 '이렇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다가는 정말 어떻게 살게 될지 모르겠군, 허허.'하고 배를 긁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 한바탕 웃어요.


조나단 씨를 보면서 환갑을 목전에 두고 예술 극장의 좌석에 앉아 있는 절 상상했습니다. 생활력 부족을 이유로 이혼 당하고 차를 렌트해서 혼자 동검도에 온 상상을 해봅니다. 아니면 강원도 어디 산속에 예술 극장을 짓고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옆에는 장작 패는 소방관 출신의 언니가 있을지도...? 그래요, 저는 상상력이 풍부한 N입니다.


되지도 않는 상상의 끝에는 옆에 앉은 보살 언니가 보입니다. 저보다 몸이 약해서 장작 패는 데에는 쓸모는 없을 것 같아요. 장작은커녕 저 언니 환갑쯤에는 제가 업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때도 우리가 함께 있다면 좋겠어요.


삶에 낭만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이 나가 보고 느끼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손을 잡고 함께 가주는 사람도 있고요. 보살 언니처럼요.


나는 우리가 함께 많은 걸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옆에서 끅끅 웃고 당신은 옆에서 힣힣 웃으면서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누구 듣는 사람 없나 둘러보며 미운 사람을 욕하고 내가 귀여워서 또 떨어졌다며 다음 성공을 기약하는 이 시간이 가끔은 영원하면 좋겠습니다. 가능성으로만 충만해 있는 우리의 지금이 나에겐 조금 달콤해요. 저의 이런 바람 때문에 우리의 성공이 늦어지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놓고 싶지 않은 것들이 늘어날수록 세상과 나의 연결고리가 튼튼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 번째 영감 기행은 이렇게 끝이 날 것 같지만,,,그렇게 영감 얘기는 1도 안 하고 싱겁게 안 끝나니까 걱정 마세요.


괜히 영감 기행이 아닙니다!



영화 보고 카페에서 브런치 먹고 집에 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차 안에서 창문에 떨어지는 비를 보면서 저는 언니에게 '장마'를 소재로 단편 시나리오를 써보는 건 어떻냐고 제안했어요.



곰팡이에 대한 두려움이 곰팡이처럼 번져서 비가 오거나 습도가 높은 날에는 어떤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올여름에 긴 장마가 계속될 거라는 소식에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계속해서 피어나는 곰팡이를 막을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벽을 닦고 곰팡이 제거제를 바르고 제습기도 틀어놓지만, 그 여자는 자신의 몸에 곰팡이가 피어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곰팡이가 번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약간 카프카 변신의 곰팡이 버전 같죠?)



불안과 걱정이 온 집안을 뒤덮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무력감이 곰팡이처럼 번식하고 우울의 포자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느낌이 들 때. 그럴 땐 닦아도 닦아도 사라지지 않아요. 사실 내 안에 좀 먹고 있는 균이 문제거든요.



여자는 어떻게 해야 자기 몸 안에 있는 곰팡이를 없앨 수 있을까요? 여자의 몸 곳곳에 햇살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따스하고 깨끗한 햇살을 샅샅이 덮어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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