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플랫폼, 진화를 멈추면 좀비가 된다
2022. 3. 30. | 마흔 두 번째 편지 | 지난 손오공 다시읽기
님, 무려 일곱 주 만에 찾아뵙습니다. 작년엔 귀찮도록 자주 인사드렸는데, 새해들어서는 너무 뜸했네요. 뉴스레터가 홍수인 시대라 손오공의 빈자리가 별로 눈에 띄지 않으셨을 것 같지만..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합니다. 보름 전 에펠탑이 6m 높아졌다는 기사가 떴는데요, 아래 사진처럼 헬리콥터가 길쭉한 안테나 하나를 에펠탑 꼭대기에 꽂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기존 324m 였던 에펠탑의 키가 330m가 되었지요.
[그림] 지난 3월 15일 프랑스 파리 에펠탑 꼭대기에 디지털라디오(DAB+ 방식) 안테나가 설치되고 있다(출처: redtech.pro)
에펠탑 키는 방송플랫폼 진화의 역사

지난 15일, 프랑스의 송출 인프라 회사 TDF는 디지털라디오(DAB+) 커버리지를 넓히기 위해 에펠탑 정상에 방송 안테나를 새로 올렸습니다. OTT와 메타버스가 화두인 2020년대, 새삼스레 무슨 라디오 방송 시설을 파리 심장부 랜드마크에 꽂나 싶지요?

에펠탑은 새로운 방송 플랫폼이 추가될 때마다 높아졌습니다. 1889년 완공 당시 높이는 312m였는데, 1959년 TV 안테나를 올리면서 318m가 되었고, 2005년 디지털TV 안테나를 추가하면서 324m, 그리고 이번에 디지털라디오(DAB+ 방식) 안테나를 더 얹어서 330m가 되었지요.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만들었던 에펠탑은 원래 행사 20년 후엔 허물기로 되어있었지만, 군사적 이유와 더불어 상업라디오방송에 활용되면서 철거를 면했고 이후 세계적 랜드마크로 남았습니다. 방송과 라디오 역사에서 에펠탑이 갖는 의미는 그래서 더 각별합니다.

우직하게 진행되는 유럽의 라디오플랫폼 업그레이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라디오 방송의 디지털화를 추진해왔습니다. 노르웨이나 스위스처럼 단시간에 화끈하게 FM 대체 수준으로 도입한 나라도 있지만 독일, 프랑스 등 다수 유럽 국가들은 이십여년에 걸쳐 돌다리 두드리듯 커버리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선도국 영국은 장기간의 보급율 정체를 묵묵히 인내한 끝에 막판 스퍼트를 올리고 있고, 2020년 말부터 전체 EU 회원국에서 신규 출시되는 차량은 DAB+를 의무탑재해야 합니다. 유럽 라디오는 디지털라디오 도입을 넘어 디지털TV에 라디오채널 확보, 방송망과 인터넷망의 장점을 섞는 하이브리드라디오, 국가 단위의 온라인청취플랫폼(integrated app), 스마트스피커와 커넥티드카 대응 등 다양한 방식으로 라디오 플랫폼 업그레이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잰걸음이든 소걸음이든 유럽 국가들이 라디오 플랫폼 진화라는 계단을 꾸준히 오르고 있는 이유는 라디오를 사회적 인프라로 보기 때문입니다. 대체불가능한 편익(병행성, 가성비 높은 동시송출)을 무료보편적으로 시민들에 제공하는 국가 기본 인프라이기 때문에 미디어 부처, 라디오진흥기구, 산업협회, 의회가 함께 라디오 접근권과 진흥을 고민합니다.

반세기 넘게 방송플랫폼 진화가 없는 한국라디오 

한편 라디오를 사회적 인프라로 간주하는 인식이 희박한 국가들의 라디오산업은 치열한 미디어시장에 그냥 던져져 왔습니다. 정부는 진흥보다 내용 규제에 관심이 많고, 산업 공동 현안을 적극적으로 해결할만한 구심점도 미약합니다. 결국 방송사들은 각자 도생하면서 소수는 근근히 먹고 살고, 다수는 좀비 기업이 되어갑니다.

한국 라디오는 1965년 FM 도입 이후 반세기 넘도록 방송플랫폼 진화가 없었습니다. 디지털라디오 도입 논의는 꽤 일찍(1990년대) 시작했지만, '디지털TV 이동 수신 보완을 위한 DMB 도입'이라는 국가적 대의(🙉)에 밀려 길을 잃었죠. 한국 라디오는 간간이 등장했던 히트 프로그램들, 개별 방송사의 소소한 플랫폼 혁신에 안도하면서 구조적 진화를 계속 미뤄왔습니다. 

임계점을 넘을 해법은?

물론 관련 주체들이 손놓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과기정통부는 FM 체제에서 디지털라디오에 준하는 효과를 낼 대안을 찾고 있고, 방통위는 라디오온라인통합플랫폼에 대한 직접 추진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방송사들과 방송협회도 간신히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임계점을 넘어 가시적 성과로 이어질지는 회의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있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업 플랫폼 진화는 변화무쌍한 시장 상황에 맞서 유연한 전술을 구사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책임있고 효율적인 구심점이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여러 곳에 흩어진 실무자들이 각자의 조직 이해와 윗사람 눈치 봐가며 끄적거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라디오라는 사회 인프라를 단단하게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이 왜 진흥기구라는 구심점으로부터 문제 풀이를 시작했는지 따져봐야합니다.

방송플랫폼 진화는 4지 선다 객관식 문제가 아니다

지금 DAB+ 도입하자는 것이냐며 오해하실까봐 노파심에서 덧붙입니다. '라디오 방송플랫폼 진화 = 디지털라디오 기술 표준 결정'이라는 경직된 프레임에 갇혔던 것이 한국 라디오가 반백년 제자리 걸음했던 핵심 원인입니다. 플랫폼 진화는 주어진 보기안에서 골라야하는 4지 선다 문제가 아닙니다. 고객(수용자)이 불편해하는 문제, 실제적 편익이라는 최우선가치에 집중하여 창의적 대안을 찾는 일입니다. 다가올 미디어 부처 재편 논의에서 라디오 진흥의 구심점이 등장하길 기대합니다.
손오공은 님의 피드백을 먹고 자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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