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내리는 눈 사이로 형형색색의 우산이 거리를 지나친다. 도로변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눈을 돌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그대로 맞고 있던 여자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우산 대신 손에 쥐어진 건 애석하게도 하얀색의 초대장. 거기에 적힌 시간은 자정이었다. 지금은 9시 59분. 날이 저물어가는 늦은 시간. 이번에도 안 오면 그냥 가버릴 거야. 실체고 뭐고, 그냥 다 까발려지라지.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는걸. 점점 지루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기에 신세한탄 하듯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새까만 부츠의 앞굽으로 바닥을 툭툭, 내리치다가 차가 지나가면 번호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죄다 초대장에 적혀있는 것과 다른 번호판을 단 차들 사이에서 미끄러지듯 택시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잠겨있던 문이 열린다.
뭐라고 해야 할까. 창문엔 눈이 쌓였으니 털기 위해서라지만, 분명 손님을 태우러 온 것이면서 꼭 잠그고 있던 문이,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뭐, 그것이 여자에게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택시를 타는 목적은 무사히 초대장에 적힌 장소로 도착하는 것 하나면 됐다. 여차하면 오래되어 액정이 다 깨진 폰도 폰이니, 뭐라도 해주긴 하겠지. 여자가 택시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오랫동안 밖에 내어두어 차가운 손을 천천히 가슴에 얹고 아까처럼 숨을 차분히 내쉬었다. 이래보여도, 허약체질이니까.
"차가 좀 막혀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오래 기다렸어요?"
“음, 뭐 괜찮은 걸요. 오랜만에 바깥구경도 하고.”
사실은 지루해 죽을 뻔 했으면서, 속이 훤히 드러나는 거짓말을 한다. 환하게 웃는 걸로 드러나는 틈을 메꾼다. 여자는 별 생각이 없다. 자신의 말이 그를 난도질하거나 찢어발기기라도 했다면 죄책감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얘기한 눈앞의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했던 '선의'의 거짓말이었음을 밝혀둔다. 원래 이런 거짓말쯤은 다들 하고 사는 게 아니던가? 안 해봤다면 솔직히 거짓말. 그러니까, 여자 역시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것뿐이다.
“보기 드문 미인이시네. 여긴 무슨 일로 간답니까?"
“미인이요? 과찬이세요. 이건-.”
여자는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노란 생머리를 앞머리부터 천천히 쓸어 올리더니 훌렁하고 벗겨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가발이거든요. 원래 머리도 예쁜데.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벗겨낸 가발 망 안에서는 검은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쏟아졌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다. 저를 데리러 온 택시 안에서 가발을 벗는 기행을 택시기사는 몹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서 바라보았다. 여자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초대받아서 가는 거예요. 하는 대답을 덧붙였다. 처진 눈꼬리와 눈썹이 같이 내려갔다.
“쓸 때나 벗을 때나,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그건 왜 쓰는 겁니까?”
“이건 색이 예쁘잖아요.”
충분히 의문을 남기고도 남을 대답이었다. 그 뒤로도 택시기사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나이는 몇 살인지 묻는 것은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그래도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잠시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항상 집에 틀어박혀만 있어서인가, 제 또래보다 늙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기는 했어도 이런 말은 처음이었다. 손님에 대한 립 서비스나 예우일지는 모르겠지만. 뭐, 택시를 막 탔을 때 첫인사와 비슷한 것이겠지.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거. 역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것이 아닌가?
창밖을 지나는 건물들은 점점 사라진다. 우거진 나무들과 점점 거칠어지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표지판을 살핀다. '강원도'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생각보다 그리 멀지않은 것 같기도. 푸른 나무, 거칠어지는 길. 흔들리는 차안. 그 모든 느낌을 기억하고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았다.
"몇 년 전에, 지금 가는 저택에서 화재사건이 있었답니다. 그런 곳에서 모임이라니, 주최자 취향이 특이한가 봐요."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숲속에 세워진 깔끔한 저택. 멀어지는 택시를 응시하던 여자는 저택의 안쪽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