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노을에 얼룩지는 목소리
이제 정말 겨울처럼 춥습니다. 낮에는 자취를 감췄더라도 아침저녁으로 찬 공기가 습격해 오지요. 두꺼운 옷을 꺼내야 할 때가 왔어요. 다들 잘 지내시는지요.

건조한 저녁에는 노을이 유달리 붉게 번집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예사롭게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 노을 속에서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다면 오늘일 것만 같아요. 그 목소리는 당신에게 어떤 말을 거나요? 지쳐 있나요, 반가워하나요. 익숙한가요, 들어 본 적 없나요. 추위에 숨기 전, 허공에 녹은 음성들이 선명해지는 계절. 당신은 어떤 대답을 돌려줄 건가요?


* 이번 레터를 마지막으로, 팝핑플루는 2023년에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모두 안녕히!

 그리움이라는 작업 /뭉곡



날이 차니 저녁에는 더 마음이 들끓습니다. 요즘에는 저녁이 더 고요해요.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기도 해서 거리가 환해도 기분이 묘해집니다. 다들 잘 지내시나요?


오늘은 연극 본 얘기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연극을 좋아해서 종종 보는데,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지 요즘에는 연극을 봐도 그전과는 좀 다르게 보게 되더라고요. 공연장이 좀 외진 곳에 있기도 해서 공연장 근처는 밤이 더 빨리 오는 기분이었습니다. 캄캄하고 차가운 가을 밤 속에서 연극 속으로 들어갔어요.


공연은 제목 그대로 선택, 여성의 선택에 관한 얘기였어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이미 끝나긴 했지만 정말 좋은 공연이었어요.) 분노할 말도, 안타까워할 말도 많았는데 정말 내 일상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여서 더 그랬습니다. 생각이 많아져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었어요, 극장 밖으로 나오니 밤이 차서 거기에 좀 식고 진정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길에까지 메아리치는 말들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들은 원치 않은 말들,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해서 속에 쌓여 앙금처럼 가라앉은 말들. 또 주인공이 하지 못한 말들, 마침내 폭발하기 전까지 눈 뜨고 있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말들요.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주인공이 하지 못했거나 목격해야만 했던 그 선택들과도 같았습니다. 주인공이 하려 했던 말을 끝내 하는 장면이 곧 그의 선택을 관철시키는 장면이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렇지요. 남들에게 잘 들리도록 소리내어 발성된 목소리는 힘을 갖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목소리는 오히려 고요한 활자보다도 못하다는 것을요. 남들에게 들릴 만큼 무게를 갖지 못하는 목소리들은 허공에 아주 잠깐 머물러 있다가 흩어질 뿐입니다.


우리는 늘 목소리를 듣거나 냅니다. 또는 숨기기도 하지요, 생각보다 자주요. 평소에는 그걸 잊고 있다가도 이렇게 숨긴 목소리들을 목격할 때면 실감하고 섬찟해집니다. 집으로 가던 길, 가을 밤의 어두운 공기를 더듬으면 꼭 그동안 보면서도 지나쳤던 목소리들이 뼈처럼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유령이란 꼭 죽은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사라진 목소리가 유령과도 같을 거예요. 허공 어딘가에 쌓여 있을 겁니다. 주인공의 마음 바닥에 쌓여 있었듯이, 울리지 않는 성대들의 안쪽에.

 

할로윈의 유령 얘기는 어딘가 쓸쓸하다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밤에 이뤄지기 때문일까요, 축제에 밀려 사실 이미 무서움은 잊힌 지 오래인 악령들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그 다다음 날이 죽은 자의 날이라 그런 걸까요. 누군가 죽은 자의 날에 찾아오던 영혼이 할로윈에 찾아오면 어떻겠냐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정말 그런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망각에서 살아 온 이의 목소리를 악령이라고 쫓아 버리는 일이 없으리라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요. 그리워하는 사람이라거나, 손닿는 데 있는 가까운 사람이라 여겨지는 이들이라도 가끔 피해 가지 못하는 일일 거예요. 낙엽이 지는 계절에 듣는 바람소리는 정말 고대의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유령들은 해가 뜨면 쫓겨날지도 몰라요. 차가운 손이 새벽빛처럼 사라지기 전에 잡을 수 있을까요. 잊힌 목소리를 간절하게 파헤쳐 내는 그리움, 그것이 닿는 곳은 사실 내가 한 번도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겁니다. 이런 그리움은 어떤 작업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잊지 않고, 바람소리에서 그 사람들의 음성을 구별해내는 일. 할로윈에 찾아오는 악령의 표정에서 내가 봐야 할 얼굴을 구별해 내는 일. 가을 저녁은 그런 작업을 하리라 다짐하기 좋은 시간입니다.


정말로 가을은 흐릿한 것들과 가까운 계절입니다. 새벽마다 해가 지는 것처럼 붉게 해가 뜨고, 저녁마다 동이 트듯 해거름이 깔립니다. 거기서 누구의 목소리를 들을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유령은 정말 있을까? /별림 


 유령은 정말 있을까?


 많은 사람이 유령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찾으려 해보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무당과 엑소시즘을 행하는 사제들, 그 외에 유령으로 먹고살던 직종은 날이 갈수록 돈줄을 잃었다. 그들 중 몇이 유령의 실존을 밝히기 위해 나섰다. ‘그 일’은 단순히 폐가에 간다든가 범죄자가 불을 지른 병동에 찾아가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 아니었다. 아주아주 신성하면서도 흉악했으며 모독적인 길을 따라 두 명의 무당과 세 명의 엑소시스트, 그리고 한 명의 심령 유튜버가 그 뒤를 따랐다. 유령은 어차피 없으므로 누구도 유튜버의 생중계를 보지 않았다. 고작 그들을 걱정하는 가족들만 모여 숙덕거렸다. 그들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곳.’ 세상 누구도 가본 적 없고 가서는 안 된다는 바로 그 장소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무당 하나가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악! 아악! 그 모습은 오로지 무당의 가족들만 바라보는 모니터에 생중계 되었으므로 곡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 퍼졌다. 이윽고 무당의 몸이 축 늘어졌을 때 사제 중 한 명이 그의 맥을 짚어보고는 연극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사제가 말했다. 남은 무당 하나가 동의했다. 그들은 시체를 버려두고 ‘거기’를 올랐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중간쯤 가자 그들 중 한 사제의 발이 꺾였다. 아주 평평한 오르막길이었다. 돌도 없고 방해물도 없었다. 사제의 몸은 퉁퉁퉁,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아마 ‘그들’이 되었을 거라고 그들 중 하나가 기도했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인간을 버리시나이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신조차도 유령이었으므로 유령이 유령의 편인 것은 당연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한 명의 사제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곳’으로 마구 떠내려갔다. 붙잡아 보려 했으나 함께 미쳐버릴 따름이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씁쓸하게 떠나보냈다. 저 멀리 떠나온 자리가 보였다.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쓰러져 죽은 우리의 땅. 유튜버는 뒤를 돌아 그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령은 정말 있을까?

 

 시청자는 6억 명. 그들의 집 스피커마다 유령이 음성을 들려주었다. 유령은 정말 있을까?

 목례 /심연


 당신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에 대해서라면 우리만큼 잘 알 수도 없을 거예요. 비어 있는 눈길들을 우리가 빠짐없이 먹어치우고 있거든요. 컴컴한 골목의 그림자 속 녹아든 한숨들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쉬운 노래입니다. 웅성대는 목소리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지만. 닿는 곳 어디에도 없다고 해도 우리는 분명히 존재해요.

 

 우리는 늘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얀 시트를 뒤집어썼더라도, 괜찮아요. 사람보다 무섭지 않아요. 누가 우리의 수의를 바느질해주었는지 우리는 모두 잊어버렸어요. 잘려나간 눈구멍 바깥으로 엿보는 세계. 네온이 반짝이는 시간 동안만 자유로운 우리들. 화려하게 분장한 인파가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길목을 지켜보면서. 우리를 흉내내는 당신들은 하나같이 즐거워 보이고. 우리는 그런 당신들을 다시 따라해볼 수 없을지 고민합니다. 우리도 한때 저런 모습이었던 적 있는데. 이제는 몸을 잃어버리고, 전보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우리가 허공을 배회할 때. 무리지어 펄럭이는 옷자락들은 새에게서 떨어져나온 날개깃 같고.

 

 그러니까, 괜찮아요. 당신도 해치지 않을게요. 우리는 멀리 갈 수 없고 우리는 얼른 돌아와야 해요. 우리는 당신을 만질 수 없고 당신은 우리를 느끼지 못해요. 우리는 서로에게 닿지 않아요.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당신의 깨끗한 눈에 비치는 풍경과 우리의 어두운 시야에 번지는 모습들이 같을 수는 없어요. 투명한 겹으로 분리된 경계를 사이에 두고. 가능한 것이 있다면 함부로 상상을 펼쳐 놓는 일뿐. 당신들은 왜 우리를 보지 못합니까? 새카만 정수리가 우리의 발밑을 통과해 저편으로 멀어져갈 때.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을 기어코 쫓아가지 않아요.

 

 다만 기대합니다. 끝없이 늘어나는 행렬의 맨 뒤쪽에 나란히 서게 될 당신들을. 극단으로 쏟아진 세계라면 모두가 지금보다 즐거워질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합치될 양면의 세계. 기다림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일. 우리는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사라지지 않아요. 시간은 무한히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초대 /자두


 소리 없이 내리는 눈 사이로 형형색색의 우산이 거리를 지나친다. 도로변을 한참 바라보다가,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눈을 돌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그대로 맞고 있던 여자의 입에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우산 대신 손에 쥐어진 건 애석하게도 하얀색의 초대장. 거기에 적힌 시간은 자정이었다. 지금은 9시 59분. 날이 저물어가는 늦은 시간. 이번에도 안 오면 그냥 가버릴 거야. 실체고 뭐고, 그냥 다 까발려지라지.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는걸. 점점 지루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기에 신세한탄 하듯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새까만 부츠의 앞굽으로 바닥을 툭툭, 내리치다가 차가 지나가면 번호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죄다 초대장에 적혀있는 것과 다른 번호판을 단 차들 사이에서 미끄러지듯 택시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잠겨있던 문이 열린다.


 뭐라고 해야 할까. 창문엔 눈이 쌓였으니 털기 위해서라지만, 분명 손님을 태우러 온 것이면서 꼭 잠그고 있던 문이,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뭐, 그것이 여자에게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택시를 타는 목적은 무사히 초대장에 적힌 장소로 도착하는 것 하나면 됐다. 여차하면 오래되어 액정이 다 깨진 폰도 폰이니, 뭐라도 해주긴 하겠지. 여자가 택시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오랫동안 밖에 내어두어 차가운 손을 천천히 가슴에 얹고 아까처럼 숨을 차분히 내쉬었다. 이래보여도, 허약체질이니까.


 "차가 좀 막혀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오래 기다렸어요?"

 “음, 뭐 괜찮은 걸요. 오랜만에 바깥구경도 하고.”


 사실은 지루해 죽을 뻔 했으면서, 속이 훤히 드러나는 거짓말을 한다. 환하게 웃는 걸로 드러나는 틈을 메꾼다. 여자는 별 생각이 없다. 자신의 말이 그를 난도질하거나 찢어발기기라도 했다면 죄책감을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얘기한 눈앞의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했던 '선의'의 거짓말이었음을 밝혀둔다. 원래 이런 거짓말쯤은 다들 하고 사는 게 아니던가? 안 해봤다면 솔직히 거짓말. 그러니까, 여자 역시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것뿐이다.


 “보기 드문 미인이시네. 여긴 무슨 일로 간답니까?"

 “미인이요? 과찬이세요. 이건-.”


 여자는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노란 생머리를 앞머리부터 천천히 쓸어 올리더니 훌렁하고 벗겨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가발이거든요. 원래 머리도 예쁜데.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벗겨낸 가발 망 안에서는 검은 머리칼이 찰랑거리며 쏟아졌다.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다. 저를 데리러 온 택시 안에서 가발을 벗는 기행을 택시기사는 몹시 당황한 얼굴을 하고서 바라보았다. 여자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초대받아서 가는 거예요. 하는 대답을 덧붙였다. 처진 눈꼬리와 눈썹이 같이 내려갔다.


 “쓸 때나 벗을 때나,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그건 왜 쓰는 겁니까?”

 “이건 색이 예쁘잖아요.”


 충분히 의문을 남기고도 남을 대답이었다. 그 뒤로도 택시기사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나이는 몇 살인지 묻는 것은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그래도 어려 보인다는 말에 기분이 잠시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항상 집에 틀어박혀만 있어서인가, 제 또래보다 늙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기는 했어도 이런 말은 처음이었다. 손님에 대한 립 서비스나 예우일지는 모르겠지만. 뭐, 택시를 막 탔을 때 첫인사와 비슷한 것이겠지. '선의'의 거짓말. 같은 거. 역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것이 아닌가?


 창밖을 지나는 건물들은 점점 사라진다. 우거진 나무들과 점점 거칠어지는 길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표지판을 살핀다. '강원도'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생각보다 그리 멀지않은 것 같기도. 푸른 나무, 거칠어지는 길. 흔들리는 차안. 그 모든 느낌을 기억하고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았다.


 "몇 년 전에, 지금 가는 저택에서 화재사건이 있었답니다. 그런 곳에서 모임이라니, 주최자 취향이 특이한가 봐요."


 잠시 감았던 눈을 뜨자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숲속에 세워진 깔끔한 저택. 멀어지는 택시를 응시하던 여자는 저택의 안쪽으로 서서히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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