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 - 2026.03 콘텐츠 로그
지난 3-4개월간 레터를 보내지 않게 된 데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착실히 많은 일들을 해내다가도 너무 자주 누워 있어서 역류성 식도염이 재발하기도 했다. 부지런하지 않지만, 부지런하지 않지도 않은 날들이 번갈아 누적되다 보니까 계절이 한 번 바뀌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30대 후반을 향해가는 1인 가구 여성이 콘텐츠와 맺는 관계는, 예전보다 훨씬 더 깊은 집중력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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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피디아만큼은 여전히 열심히 썼다. 그래서 우리 왓챠는 CJENM랑 키노라이츠 중 누가 인수해주시나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자녀나, 반려 동물이나, 팀원에 대한) 돌봄 의무를 가진 부모 세대, 집사, 관리자급의 친구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이게 시간 문제는 아니고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가령 <콘텐츠 로그>를 처음 보냈던 2019년 3월의 나와 2026년 3월의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책이나 공연 영화나 드라마를 향한 순애보가 자연 소멸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의 한 가운데에서. 하지만 콘텐츠도 생물이기 때문에 그와 나의 관계가 재편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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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아미카실렌티아루네 ㅣ2024년 11월 11일 출간
보통 ‘여기 나온대로만 해보면 정말 도움이 되겠지?’는 ‘근데 일단 그렇게 해버리고나면 부작용이 있지 않겠어?’라는 머릿 속 시뮬레이션으로 이어지는데, 가늠만 하지 않고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지난 겨울 내게 운 좋게도 주어졌다. “글쓰기에 관한 책을 쓰며 내가 가장 믿고 참고한 자료는 나 자신이 오랜 기간 글을 쓰면서 겪은 고충이다.” 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는 2024년 11월에 국내 출간 됐는데, 당시 나의 인스타그램 친구가 이 책의 행동 강령을 쾌속으로 습득한 후 ‘배우지 않는’ 장을 열어버렸다.
배우지 않는다는 건 이 글이 나쁜 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또는 이런 글이 잘 팔린다고 말하는 선생님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글쓰기 모임의 타이틀이 ‘교사 없는 글쓰기 모임(이하 교없모)’다. 나는 이미 여섯 기수나 꾸준히 운영되어 왔던 교없모 참여자 후기를 읽다가, 드디어 지난 12월에 7기 교없모에 참여하여 8주간 무작정 글을 쓰고, 함께 한 이들에게 내 글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줌 모임에서 피드백을 들었다.
거기서 영영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주제의 글을 써 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평어를 써보았다. 퇴고를 하지 않고 무작정 글을 쓰는 일, 스크롤이 줄어들지 않는 남의 하루를 읽는 일, 평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동시에 남의 글에 대한 감상을 충분히 전하는 일, 내 글에 대한 긍정적인-소리나는 피드백이 나라는 인간을 향한 긍정적인-소리나는 평가가 아님을 구분하는 일은 저마다 조금씩 버거웠지만 금방 적응했다. <글쓰기를 배우지 않기>에서 피터 엘보가 이야기 하는 글을 쓰는 방법은 거의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NCT 127 '무한적아')에 가깝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했다. 글쓰기를 배우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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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nchdrunkㅣ뉴욕에서 열렸던 '슬립 노 모어'의 한 장면이다. 이 공연이 어떤 공연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스틸컷이라고 생각한다. 마스크를 쓴 사람은 관객이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배우다.
‘세문전 월드컵 영상’의 조횟수가 57만뷰나 되는 시대에 나는 이상하리만치 세계문학, 즉 고전이라 불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게 된 건, 오로지 맥베스를 모티브로 한 몰입형 연극 <슬립 노 모어>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던컨 왕, 맥더프, 말콤, 뱅쿠오, 그냥 어떤 많은 남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캐릭터 차이를 전혀 구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 <슬립 노 모어>는 그것대로 흥미로웠지만, “난 젖 빨린 적 있어서 내 젖 먹는 아기 사랑 애틋함을 알아요. 난 고것이 내 얼굴 보면서 웃더라도 이 없는 잇몸에서 젖꼭지를 확 뽑고 골을 깼을 거예요, 내가 만일 당신처럼 이 일 두고 맹세했더라면.”(<맥베스>, 민음사, 2004) 같은 구절을 원작에서 읽고나면, 왜 공연장에서 내 눈 앞의 레이디 맥베스가 그토록 맥베스와 쌍으로 몸부림을 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같이 입장해도 3시간동안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동행인들과 공연이 끝나고 가까운 호프집에 들어가 늘 1500cc쯤을 마셔야만 집에 갈 수 있는 것도 <슬립 노 모어> 관람 루틴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자정까지 운영하는 충무로역 8번 출구의 자담치킨은 맛있다….) 공연이 끝나고 이야기가 길어지는 이유는 6층 규모의 공연장에서 어느 층에 갈지, 23인의 캐릭터 중에서 누구를 응시할지 매 순간 선택해야 하는 공연의 특성상, 관객으로서의 우리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공연을 보았다는 걸 매 번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장기 공연되었던 <슬립 노 모어>를 1,000번 이상을 본 팬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다고 한다. 왜 누군가는 천 번을 보고, 나도 네 번씩이나 봤을까. 한 외신 기자가 말한 것처럼, “스마트폰 문화가 막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기, 즉 아이폰 4 출시와 인스타그램 출범 후 1년도 채 되지 않은 2011년 3월에 초연된 <슬립 노 모어>는 참여형 연극이라는 점에서 콘텐츠 알고리즘의 획일화로 인해 점점 좁아지는 삶에 대한 매혹적이면서도 반항적인 반론처럼 느껴졌다”는 점은 설득력이 있다. 아이폰 17이 보여줄 수 없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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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24ㅣ국내미개봉작, 2026년 3월 VOD 공개
이번 제 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 편집상, 캐스팅상을 받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흑화하면 <에딩턴>이 된다(이 작품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공개된 직후 4점 만점에 1.4점이라는 꽤 낮은 평점을 받았다.) <에딩턴>에서 2020년 팬데믹 시대, 미국 남서부의 작은 마을 에딩턴을 배경으로 챙이 넓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보안관 ‘조’(호아킨 피닉스)는 마스크 착용을 극구 거부한다. 공중 보건 의식을 갖춘 시장 ‘테드’(페드로 파스칼)에 대항해 차기 시장 후보로 출마하려 한다. 도대체 누가 말할 때마다 침을 튀기는 그를 지지할까?
그런데 통탄할 노릇은 그런 조를 리스펙트 하는 시민이 있다는 점이다. 극우 유튜버에 빠져 있는 아내 ‘루이스’(엠마 스톤) 말고, ‘Black Lives Matter’ 구호를 외치는 마을의 청년 세대들 말고.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조의 지지자가 있다. 조의 비뚤어진 광기는 조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관심 자원을 세상을 나쁘게 굴리는 방향으로 쏟는 사람들과 함께 몸집을 불린다. 이를테면, 이달 초 온라인에 ‘미국-이란 전쟁 국내 수혜주 정리’ 포스팅을 올리던 사람들과 함께.
나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보며 미국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이 깊이 병들었다고 생각했고, <에딩턴>을 보면서는 그것이 회복 불능의 상태임을 깨끗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런 자각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는 더이상 분열과 균열을 눈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우고 싶지 않다. 이상한 영화를 많이 보다보면 이런 대담함도 생기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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