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s’ Note

님 안녕하세요. 이번 편지는 어느덧 6살 아이의 아빠가 된 규성님이 보냅니다. 얼마전 아이에게 또 다시 묵직한 질문을 받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는데 과연 어떤 이야기일까요?

1.

“근데 아빠는 몇 살이야?”

2025년의 첫 등원 길, 해가 바뀌고 만 나이가 아닌 연 나이로 한 살 늘어났다는 걸 설명하던 중에 아이가 질문을 던졌다. 아이는 작은 탁구공을 튀기듯이 가볍게 던진 질문 같았지만 받는 사람에겐 볼링공 정도의 묵직함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살아 온 햇수를 말해야 할까, 신체 나이를 말해야 할까. (몸보다 한참 더 늙었을지도 모르는)정신연령을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아이와 나의 세대차이를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면 최근 습관적으로 되새기고 있는 ‘내일모레 마흔’이라는 상징적 나이를 이야기해야 할까. 이 세상엔 도대체 왜 이리 다양한 나이가 존재하는 걸까. 

등원을 마치자마자 휴대폰 검색창에 나이 계산기를 치고 출생일을 입력했다. 친절하게 만 나이와 연 나이가 각각 몇 세인지가 나왔다.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 나이에서 아이의 나이를 빼는 계산까지 해보니 이름 모를 세월과 세대차이의 무게감이 더해졌다. 30년이 넘는 이 차이가 앞으로 벌어지면 벌어졌지 좁혀지는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잡념에 잠겨 있던 사이 키즈노트 알림메시지가 울렸다. 어린이집 수료사진 촬영 일정에 대한 안내였다. 18개월 즈음 만 1세 노랑새싹반에서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한 아이는 어느덧 분홍잎새반, 연두풀잎반을 거쳐 어린이집 최고령 반인 파랑나무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 주변의 양육자들에게 부러움 섞인 한마디로 ‘다 키우셨네요’ 라고 말하던 나이의 시작점이 6세 정도 였는데, 아이가 막상 그 나이대가 되니 내가 참으로 무지했고 경솔했다는 생각이 든다. (반성한다. 육아의 끝을 함부로 입에 올렸던 그때의 나를)

놓쳤던 키즈노트 공지사항들을 연이어 읽다 보니 12월 놀이 사진이란 제목으로 올라온 앨범이 눈에 띄었다. 수많은 사진 사이로 보이는 아이 얼굴엔 앳된 모습 대신 성숙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등원 길에 형님 반에 올라가는 게 대단한 일이라고 축하를 해줬지만 지금보다 더 성숙해질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내심 진짜로 축하할 일인지, 아빠인 나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의구심이 들었다. 

아이가 만약 나이가 드는 걸 왜 기뻐해야 하는지, 왜 점점 커가는 걸 기뻐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물으면 뭐라고 답해줘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2.

유효기간이 다 되어가는 마일리지로 책을 사기 위해 오랜만에 오프라인 서점에 들른 날이었다. 온라인으로 미리 주문한 책을 바로 수령만 하면 됐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저 지나치지 않듯 좋아 보이는 책들이 많아 살짝만 둘러보겠단 마음으로 아동 도서 코너부터 들렀다. 

처음에는 동화책들이 모여 있는 진열대부터 둘러보다가 교육서적들이 놓여있는 코너에 오니 양육자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제목의 책들이 가득했다. ‘만 5세 한글쓰기’, ‘한글 입학준비’, ‘이젠 연산왕-예비초등’, ‘뚝딱 3개월에 한글떼기’ 등등. 갑자기 인터넷에서 종종 보는 학습지 브랜드의 ‘한글 못 뗀 5세 찾습니다’ 광고가 같이 떠올랐다.

어떤 국가들은 오히려 취학 전 문자교육을 철저하게 금지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어릴 때부터 왜 이리 다들 모국어 천재, 숫자 천재를 만들려고 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마음은 이미 조바심 나는, 경쟁에 뒤처진 듯한 부모의 마음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자극적인 아동 섹션을 벗어나 교양 및 각종 신간이 있는 코너로 가니 요즘 트렌드인 저속노화 관련 서적들이 먼저 보였다. 안티에이징이란 말을 누군가가 다시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저속’ 이라는 말의 느낌이 앞선 진열대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기분 좋게 다가왔다. 

동시에 육아에도 ‘저속 육아’란 개념이 있다면 어떨지 상상해봤다. 무언가 빨리해내는 것만 기뻐하고 칭찬하는 게 아닌 천천히 해내는 것도 기뻐하는 문화. 육아를 좀 더 길게 보고 한 살 한 살에 집착하지 않는 문화. (다만 통잠 못 자는 신생아 시기에 이 단어를 들었어도 과연 같은 생각이 들었을까.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3.

결혼과 출산 이후, 사회가 만든 '나이'란 관념으로부터 좀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다 생각했는데 아이가 클수록 다시 나이를 신경 쓰고, 그 나이에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찾는 내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개월마다 숙제가 있었던 신생아 때보다는 훨씬 주기가 길어졌지만 여전히 ‘이 시기엔 이거를 해야된다’는 강박감이 자리 잡아 필요 이상의 불안과 부담을 느낄 때가 많다. 

사실 ‘~를 꼭 해야만 하는 나이’는 현실 세계엔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할 수 있는 나이’, ‘~하면 좋은 나이’라 바꿔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나이 드는 것을 더 기뻐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한글을 떼야 할 나이', '영어를 해야 할 나이' 등 사회가 그 나이에 무언가를 강조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만 동시에 그걸 제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생 전체로 봤을 때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사람이 한정된 기회를 목표로 하는 입시나 취업이라는 관점에선 모든 걸 제때 누락 없이 하는 게 체계적이고 좋아보일 수 있으나, 아이의 성장과 육아는 체계적으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나이가 드는 일이 기쁜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선 나부터 나이를 중력으로 느끼지 말고 일종의 자산처럼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시간을 잘 보내면 알아서 쌓이는 자산, 플러스만 있고 마이너스는 없는 자산, 꾸준하게 쌓다보면 새로운 경험을 주는 자산. 

내가 만약 나이를 성실히 먹지 않았다면 지금의 아내도 아이도 없을거라 생각하니 내 나이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 나이가 쌓이지 않았다면 지금 맞이하는 새해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 공기처럼 누리고 있는 다양한 행복들도 먼 나라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다가올 새해와 새로운 나이를 아빠, 엄마부터 기쁘게 받아들인다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거짓말은 생각보다 금방 들통나기 마련이니까. 

아이의 어린이집 마지막 진급을 앞둔 지금, 3년 전 '나이'에 대한 나의 다짐을 다시 한번 꺼내보며 레터를 마무리한다.   

“몇 학년이 되었으니까, 몇 살이 되었으니까란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말자. 그런 건 남들이 정해놓은 나이니까” (2022.12.30)

Fathers’ Update

지난 레터(119화 모두 다 때가 있다)에 보내주신 답장을 소개할게요. 고맙습니다.

💬  도쿄의 역 하나만으로도 흥분하던 아이가 수학 온라인 수업을 듣고 제때 안하면 힘들어 라고 하는 순간이 너무 뭔가 뭉클하네요 ㅎㅎ 아이와 좋은 추억 만들고 오신거 같아 넘 부러워요~~ (유키농)

💬 저도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아이와 둘이서 여행을 가려고 합니다. 아직 4살이고, 여자아이라 조금만 더 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상 육아 선배들의 글을 보며 아이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감정과 모습들이 보여 참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Jay K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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