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의 제가, 1951년 3월의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다시 잇는 편지는 매월 한국전쟁 국가폭력 피해자의 잊힌 이야기를 편지의 형식을 빌려 전해드리는
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의 메일링 서비스입니다.

다시 잇는 편지

한국전쟁 당시 국가폭력으로 돌아가신 누군가의 이름을 지금에야 불러봅니다. 아마 그 이름은 오랫동안 불리지 못했겠지요. 가해 권력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 죽음을 지우려 했으니까요. 그렇게 잊힌 수많은 이름. 그 이름을 품고 숨죽였을 누군가의 마음. 거기에 가닿기까지, 70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먼가요. 그 이름들 위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더께를 떨어내고, 잊혔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할 날이 오길 바랍니다. 편지를 써 보려 합니다. 사각사각 써 내려가는 걸음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뎌보려 합니다. 편지를 쓰는 마음과 편지를 읽는 마음이, 긴 시간을 넘어 그 이름들과 이어지기를 바라면서요.

안녕하세요. 2021년 3월의 제가, 1951년 3월의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래전에 쓰인 신문 기사에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어요. 1951년 3월 24일의 기사였습니다. 남쪽의 교육대에서 귀향하는 제2국민병이 더 이상 죽지 않도록 시급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국회에서 결의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시간에도 수백 명 수천 명이 죽어 넘어가는 것이 사실이에요." 

그때 당신은 어디쯤을 지나고 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3월 중순부터 귀향을 시켜줬다던데, 고향에는 거의 다 도착하셨을까요? 몸이 많이 상하셨을 텐데 아직 갈 길이 먼지는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아마도 그때로부터 석 달 전쯤이었겠죠. 후방으로 내려가서 교육대에 입소하라는 말을 듣고 고향을 떠나셨을 때가요. 당신을 포함해 수만 명의 사람이 그야말로 천릿길을 터벅터벅 걸어갔겠죠. 12월의 한겨울에,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요.
 
아마 그대로 그 길을 거슬러오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똑같이 홑겹의 옷을 입고, 근근이 곯은 배를 달래면서요. 함께 떠나왔던 고향 사람들이 같이 오고 계시는지, 감히 물을 수가 없네요. 가는 길에선 얼어 죽은 사람이, 교육대에 도착해선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저 참담한 마음입니다.

어쩌면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죽은 이의 가족에게 전해야 할 무거운 말 때문에 가슴 한구석이 풀썩 내려앉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아침, 간밤에 죽은 동료의 모습을 목격한 마음을, 그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지도 못하고 이름모를 야산에 묻은 채 돌아서는 마음을, 잠깐 눈을 감고 감히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그렇게 많이 돌아가셨는데, 아직까지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제대로 된 추모비 하나 없다니요.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아마 당신과 비슷한 마음으로 귀향길을 걸었을, 유정수 님의 일기를 읽었습니다. 1951년 3월 10일에 쓰신 일기입니다. "…오늘 거른 산길가에는 버들 강아지 눈이 트고 아지랑이가 아롱거려 춘일이 화난和暖하니 노변路辺의 방초芳草가 아름답게 싹튼다 이제 고향산천故鄕山川이 보일 듯이 가까우니 모두들 얼굴에 희색㐂色을 띄우고 집에가서 가족家族 만나보고 飮食해먹을 이야기로 발아픈 것을 잊는다"

당신도 정말 이렇게 되셨기를 바랍니다. 부디 무사히 고향에 도착하셔서, 가족들과 함께 성큼 다가온 봄을 맞으셨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총총.  

*유정수의 일기는 『한국전쟁과 국민방위군 사건-어느 초등학교 교사 유정수의 일기』(박환,민속원, 2020) 173-174p에서 인용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된 제2국민병은 병역의무를 다하지 않은 만 17~40세 남성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예비병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병력 충원을 위해 1950년 11월부터 238만여 명의 제2국민병 중 68만여 명이 국민방위군으로 등록되었고, 경상남·북도와 제주도에 설치된 국민방위군 교육대로 이동했습니다. 

국민방위군 병사들 대부분은 도보로 이동했지만, 긴 여정 동안 의식주를 거의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대부분 서울·경기 지역에서 출발해 경상도까지의 먼 여정 동안 추위와 굶주림에 죽거나 낙오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국민방위군 교육대에 도착했지만 상황은 더욱 열악했습니다. 식량 보급이 거의 되지 않았기에 버려진 음식이나 나무껍질, 밭작물 등을 그대로 주워 먹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극도로 쇠약해진 탓에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도 빈번하게 돌았던 탓에,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참상의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국민방위군 지도부와 간부의 부정과 횡령이었고, 근본적으로는 행정부의 관리 실패였습니다. 국회 조사에 의하면 현금과 보급품을 포함해 약 50억 원이 정치자금이나 축재를 위해 횡령됐습니다. 이를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약 7조 원에 이릅니다. 사상 최악의 군수 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정부는 예산 사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비롯해 간부의 대부분이 군이 아닌 대한청년단 출신이었습니다. 대한청년단은 우익청년단체로 사실상 이승만 지원단체였는데,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도 대한청년단 단장 출신이었습니다. 권력을 등에 업은 국민방위군의 예산 사용은 제대로 된 군의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인 이승만도 1월 중에 이미 국민방위군의 열악한 상황을 인지했지만,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국회 역시 너무 늦게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 끝에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을 비롯한 간부 5명이 처형당하긴 했지만, 피해자에 대한 후속 조치는 미흡했습니다.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군번도 부여받지 못했고, 연고도 없는 곳에서 사망했기에 유족들이 군복무 사실을 증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사망 사실조차 유족에게 통지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국민방위군 병사 거의 대부분이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횡령을 저질렀던 간부들은 지금까지도 참전유공자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사망자의 수는 정확히 집계되진 않았지만 최소 수만 명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기에 암매장된 사망자의 시신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추모비는 영천 지역에 단 하나가 세워졌을 뿐입니다. 아직까지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국가의 공식 사과는 없습니다.

참고자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3국 「국민방위군 사건」 조사보고서
-박환, 『한국전쟁과 국민방위군 사건-어느 초등학교 교사 유정수의 일기』, 민속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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