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나 술 못 마실 줄 알았으면 샴페인 한 병 더 마시는 거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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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일기장. 크리스마스 지나자마자 (월요일에) 쌍수하고 냉찜질팩과 한 몸 되어 하루 한 시간 산책을 열심히 행하고 있는 발행인이다. 비절개 눈매교정했는데 시발. 쌍수는 시술이라던 새끼들 나와라. 일부러 그렇게 말했지?
그냥 찝으면 안 아플지 모르겠으나 눈매교정은 근육을 건드는 것이다 보니 아프다. 엄청 욱신거려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병원에서 준 약을 먹기 위해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다. 3일차에 붓기 제일 심하다고 했는데 아침에 같이 처방받은 붓기 빠지는 약을 먹어서 그런지 붓기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저녁 되니까 눈 주변에 노랗게 멍이 올라와서 또 찜질해줬다. 어쩐지 눈 주변을 건들면 좀 아픈데 피부색은 멀쩡하다 했어.
제목을 저렇게 적어놔서 그런데 퇴사하고 쌍수한건 아니고, 우리 회사는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신정까지 휴가 기간이라 엄밀히 말하자면 휴가 기간에 찝은 거다. 그런데 퇴사할 것도 맞다. 또 이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 일기 내용 또는 나의 상황을 잘 모르는 구독자들 중 꼰대가 있다면 '끈기 없이 퇴사하는 MZ의 전형'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욕할 구석을 찾으며 글을 읽어나갈 것이다. 이거 읽고 욕해서 스트레스 풀리면 얼마든지 욕해도 좋다. 그런데 은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나는 불과 며칠 전까지 취준생이었다. 지난주 월요일까지 면접보러 다녔다. 취준생인데 출근을 어떻게 하냐고? 인턴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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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하반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작년 11월부터 독일계 화학회사 사내외 커뮤니케이션 인턴으로 8개월 동안 근무하다가 7월 말에 퇴사, 8월부터 디자이너 브랜드 마케팅/PR인턴으로 이직, 그리고 아마 1월 두 번째주부터는 광고 회사에 다니고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 브랜드'라고 하면 패션 브랜드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역시 일기장들, 영리하다. 맞다.
꽤 여러명이 구독자 피드백 폼에 패션 회사로 이직한 것이냐고 물어봤는데, 그렇다. 참고로 신세계 인터내셔널, 한섬 같은 패션 대기업과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업종만 같지 정말 다른 세계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도 브랜드마다 느낌이 다른데 흔히 말하는 도메스틱이 있고, 디자이너 이름 걸고 하는 브랜드가 있다.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대충 저기 브랜드 대표가 사업하는 느낌인지 아님 본인이 직접 디자인하는 느낌인지를 보면 됨. 아모멘토와 ROHK, 민주킴 이런 데의 차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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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 인스타 봤으면 어디서 일하는지 대충 눈치챘을 것이다. 거길 6개월 인턴으로 들어가서 5개월 채우고 이직하는데 이 5개월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직장 생활에서도, 나의 개인 생활에서도. 좋은 일들도 많았고, 안좋은 일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화학회사 인턴 8개월 했을 때보다 패션회사 인턴 5개월하면서 배운 것도, 느낀 것도 많다. 재택근무 위주의 근무환경과 매일 출퇴근하는 회사, 10년도 훨씬 전에 따놓은 계약으로 아직도 먹고 사는 B2B 기업과 시즌마다 신제품 내놓고, 촬영하고, 적당히 튕기고, 보여주는게 중요한 업계라는 어마무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긴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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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퇴사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글을 미리 쓰고 싶진 않지만 나의 올 한 해는 이 브랜드와 취준이라는 두 가지로 대부분이 설명되기 때문에, 이 짧은 5개월이 나의 2022년의 너무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올해를 보내기는 힘들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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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말해야 될까, 를 따지기에 취준생의 일상이란 덧없고 단조롭다. 직장에 다니면서 취준을 한다고 달라지는게 있을까? 수면과 체력의 소중함을 느끼며 '이러려고 돈 벌지'를 외치며 돈 벌어서 술값으로 쭉쭉 쓰는 것 말고는? 그러고보니 나의 5개월은 취준생의 일상 치고는 단조롭진 않았던 것 같다. 일단 회사 업무가 단조롭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가 집에서 접근성이 좋은 곳에 바를 내면서(...) 칵테일과 위스키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아침에 눈 떠서 출근했다가 퇴근했다가 집에 와서 자기소개서 쓰고, 서류 탈락하고, 밤 새서 자기소개서 제출하고, 서류 탈락하고, 또 쓰고, 또 떨어지고. 다른 길로 새고 싶지만 마음을 다잡고, 한숨 쉬면 될 일도 안된다길래 해가 진 회사 앞 골목에서 담배연기를 뱉는 건지 답답함을 뱉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니코틴은 충전된 상태로 집에 가서 또 자기소개서를 썼다. 이런 일상에 뿌려진 칵테일과 위스키와 와인은 성수나 다름없었다. 화려한거 좋아하고, 화려한 걸 해야 잘 되는 사주라고 했는데 회사에서 다루는 이미지와 술에서 화려함을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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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이라는 키워드가 나온 김에, 피뽑탈(피 뽑고 탈락 : 채용 건강검진까지 받았는데 최종면접에서 탈락) 당해서 몸소 MZ세대 트렌드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그 날 피를 2-3통은 뽑았는데 이럴거면 왜 아침에 부른걸까, 라는 원망도 들지만 임원면접까지 간 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그런데 사실 무슨 칭찬을 해줘야 될지 모르겠는게 대체 내가 어떻게 실무진 면접을 붙었는지 모르겠다. 자기소개서는 좀 잘 쓴 것 같아서 조만간 학교에 넘길 예정이다. 대기업 건물 안 구경 재밌었다. 볼 건 없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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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준하면서 자존감이 아주 박살나서 우울증에도 걸렸던 것 같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떨어진 적이 없었고, 주변 사람들 꽤 괴롭혔다. 그냥 상태가 안좋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퇴근길에 회사 앞에 신호등 없는 2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무의식적으로 안 좋은 생각이 들었고,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랐다. 그런 류의 생각을 해본건 수능 직후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 땐 한강에 가야될 이유보다 강력한 가지 말아야될 더욱 강력한 이유들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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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뭐 어쨌든 취업은 되었으니까 5개월의 시간을 보낸 이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국내 디자이너의 국내 브랜드지만 해외 인지도가 조금 더 높아서 마케팅/PR 업무에 참여하기 위해선 영어를 어느정도 해야되는 그런 브랜드였다. 그렇기 때문에 타 브랜드에서 할 수 없는 경험들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DHL로 샘플 보내고, Hyeji Kim이 수신자로 되어있지만 나의 것은 아닌 샘플들을 받았고, call-in date 에 촉박하게 연락을 받은 탓에 협찬을 진행하지 못한 경우들도 많았다. 자리에 아이맥이 있길래 이걸 왜 주나 했더니 인디자인 하라고 주는 거였다. 때 되면 협찬 진행했던 매거진 PDF, JPG 받아서 아카이빙 해놓고, 어쩌다보니 에디터한테 번호 털려서 휴가 기간인데 협찬해달라고 연락도 받았다. 마네퀸과 바디의 차이도 알게 되었고 광목 바디는 뭣같지만 옷이 잘 안 맞으면 광목에 핀으로 고정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5시간 만에 끝난 촬영 때문에 김포로 남치된게 아닌가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재미도 없는걸 구구절절 쓰는 걸 보니 역시 연말엔 추억팔이가 진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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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러니 저러니해도 이 브랜드 디자이너를 좋아해서 입사지원했던게 컸는데 막상 가보니 이렇게 가까이에서 일할 줄은 몰랐다. '기회'라는 단어를 고민 없이 갖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시간이었다. 혼도 많이 났지만 나의 장점을 믿게 되었다. 고집만 있고 확신은 부족한 내게 꼭 필요한 믿음이었고, 이 믿음의 동아줄을 겸손히 놓치지 않는다면 최소한 제자리에 머물진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26년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고, 가장 중요한 5개월이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더욱 좋아할 수 있게 되었고, 남들이 보았을 땐 그닥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 좋았다.
면접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친구들이 물어봤다. "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빡센 데만 가냐?(패션 브랜드 다니면서 홈쇼핑이랑 광고회사 면접 결과 기다리고 있었음)" 그런가, 싶었는데 회사에 다닌 약 1년 정도의 기간을 돌아보니, 오히려 일이 많은 곳이 마음이 편했다. 여유로운 환경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여유롭게 만들지만 오히려 그 여유로움이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으로 돌아왔다. 이런 성향이 얼마나 갈진 모르겠으나 불안감이 사라졌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친구의 질문에 "팔자야"라고 답했다.
미친 것 같았던 5개월의 마무리에 감사하게도 일주일의 휴가가 있고, 이 5개월을 고민하던 쌍꺼풀 수술로 마무리한다는게 좋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인생은 어떻게든 될 것이니 열심히 일하고, 일한거 잘 정리해두고, 잘 먹고, 잘 마시고, 운동도 잘 하면서 이웃에게 친절하면 행운의 여신은 내 편이라고 믿을련다. 믿어야 결정적인 순간에 내 편을 들어줄 것 같거든. 그럼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어떤 새해 보내고 싶으신지 피드백 란에 공유해주셔도 좋겠어요. 한 해 동안 감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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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카페인은 발행인이 타자를 치는 원료입니다.
커피값이 아무리 올라도 유가를 따라잡진 못합니다.
카카오뱅크 3333-16-6984295 김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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