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밍햄에서 해밀턴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나는 운전을 하는 주디의 옆자리에 앉았다. 새라와 매킨리는 뒷좌석에 앉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적당한 소란함이 좋았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내게 주디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하우 워즈 유어 트립(미국까지 오는 길은 어땠어?) 나는 대답했다. 잇 워즈 낫 베드!(나쁘지 않았어요).

그것은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기차나 버스,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는 영과 달리 나는 용의 ‘머리만 대면 잠드는 스킬’을 물려받아 대체로 아무 데서나 잘 잤다. 열 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은 내게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행기란 것은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데가 있어서 이따금 찾아오는 지루함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우리는 집으로 가는 길에 버밍햄에 있는 큰 쇼핑몰에 들렀다. 과연 쇼핑몰의 크기는 엄청났다. 인파 역시 상상을 초월했는데 그건 버밍햄이 앨라배마의 최대 도시이자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대형 쇼핑몰이라면, 주말마다 으레 사람들이 미어터지기 마련이다. 주디는 주차할 곳을 찾기 위해 주차장을 여러 번 빙빙 돌아야 했다.

쇼핑몰에 들어서자 다양한 종류의 가게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말로만 듣던 빅토리아 시크릿부터 향수 가게, 옷 가게, 정장 가게, 시계 가게, 소품샵, 목욕용품 전문 판매점, 스포츠용품 센터... 그 앞으로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과 다양한 성별의 사람들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미국에서 처음 들른 대형 쇼핑몰은 뭐랄까 어딘가 정겹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그런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나는 오랜 여정의 피곤함도 잊은 채 그만 사람들을 따라 활기찬 기분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명품 매장들이 즐비한 1층의 복도를 쭉 따라 형형색색의 음식점들이 둥글게 모여있는 식당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건 휘황찬란한 음식점들 한가운데 놓인 회전목마였다. 쇼핑몰에 웬 뜬금없이 회전목마?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나는 그 다채로운 주홍빛에 홀려 어느새 회전목마 앞에 다다랐다. 식당가와 회전목마의 조합이라니. 난생처음 보는 독특한 광경의 그것은 신기하게도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는커녕 모든 것이 꼭 제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회전목마를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쇼핑몰에는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다음 날 일터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휴일을 만끽하기 위해 주말 나들이를 나온 모양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이들이 보였다. 유모차에 탄 아이, 아장아장 걷는 아이, 부모 손을 꼭 잡고 재잘대는 아이... 그들이 식당가에 도착하자마자 저 멀리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회전목마를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다채로운 빛깔을 내뿜고 있는 그것은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아갈 때마다 놀이공원에서 흘러나올 법한 경쾌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마 위에 탄 아이들은 울타리 밖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부모를 발견하면 더 큰 웃음꽃을 피웠다. 쇼핑몰 특유의 폐쇄적이고 답답한 분위기를 환히 밝히고 있는 건 어쩌면 회전목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타고 있는 아이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부모들의 표정에는 사랑과 여유가 흘러넘쳤다. 문득 도서 『어린이라는 세계』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자기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그 순간이 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한다.” 

버밍햄 어린이들의 빛나는 현재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회전목마 주위를 기웃거리며 넋을 놓고 있는 나를 주디는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그동안 새라와 매킨리는 회전목마를 한 번 탔다. 사실 나도 조금 타고 싶었는데 괜히 부끄러워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내 나이대의 또래가 단 한 명도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짝 웃는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금세 자유롭고 평화롭고 충만해졌다. 혼자서는 회전목마를 처음 타본 건지 간간이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이 타고 있는 목마를 수호천사처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다채롭게 빛나는 표정의 아이들과 회전목마가 한데 어우러져 그곳 공기의 흐름을 뒤바꾸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걸음을 붙잡기도 했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곳은 언제나 빛이 있다. 희망이 있다. 또 그런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다. 만약 그 식당가 한가운데 회전목마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곳을 그저 그런 심심찮은 쇼핑몰로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앨라배마에 도착한 첫날부터, 다소 엉뚱한 곳에 놓인 회전목마를 보고 반해버린 나는 그곳에서 작은 희망을 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곳이라면, ‘노키즈존’ 따위는 생각지도 말라는 듯 식당가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아 아이들의 행복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곳이라면, 적어도 최악은 아닐 거라고. 물론 이것은 단순한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미국 생활이 적어도 최악은 아니기를 바라며 스스로 자기 위안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10개월간 미국에서 지내며 이곳 사람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나는 분명한 존중과 배려를 엿볼 수 있었다. 한국에 ‘노인 공경’이라는 말이 있다면 이곳에는 ‘레이디 퍼스트’보다도 ‘키즈 퍼스트’란 말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러 번 생각했다. 길을 지나는 대부분 사람이 아이와 눈을 마주치면 활짝 웃거나 정겹게 말을 걸면서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 책 『어린이라는 세계』 중

어쨌든 미국의 쇼핑몰을 처음 방문한 그날은 현지 문화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쇼핑몰을 나와 버밍햄의 높다란 건물들을 지난 뒤 나는 그만 마음이 놓여버리고 말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하늘과 숲과 도로가 긴장으로 꽉 막혀 있던 가슴속을 뻥 뚫어주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가득했다. 그때 나는 조금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아름다운 도시를 조만간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

연신 창밖을 내다보며 주디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마침내 해밀턴에 도착했다. 앞으로 10개월간 나를 재우고 먹이고 품어줄 제2의 보금자리에. 주디의 집은 아담했다. TV가 있는 거실 하나, 큰 테이블이 놓인 주방 하나, 그리고 긴 통로형 복도에 3개의 방이 쪼르륵 붙어있었다. 나와 다른 교환학생 룸메이트가 지낼 방은 복도에서 가장 첫 번째 있는 방이었다. 2층 침대와 책상, 옷장, 거울이 큼직큼직하게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는 나의 방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둘이 쓰기엔 아무래도 좁아 보였으나 내게 필요한 건 다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불만 같은 건 없었다.

호스트 아빠인 데이비드와도 처음 인사했다. 육중한 몸의 데이비드는 키까지 커서 언뜻 거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디는 내가 미국을 떠나기 직전 보낸 메일의 답장에서 데이비드에게 장애가 있다고 했다. 실제로 만난 그는 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선천적인 장애라기보다 나이가 들어 생긴 심장병의 영향으로 보조기구가 필요한 정도의 장애였다. 숨소리가 조금 쉭쉭 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끙 소리를 냈지만,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도 반가운 마음으로 그와 악수했다.

주디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새라와 매킨리와 나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같이 셀카(셀프카메라)를 찍었다. 한국에서 한창 스노우(Snow)라는 앱이 유행하던 때였기 때문에 새라와 매킨리에게 온갖 필터를 장착할 수 있는 기능을 보여주니 아주 신기해했다.

첫 저녁으로는 옹기종기 거실에 모여 스파게티를 먹었다. 나는 대체로 가리는 음식이 없기 때문에 주디가 해준 파스타를 싹싹 긁어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또 새라와 매킨리와 셀카를 찍다가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간은 시차 적응을 하느라 생활패턴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주디는 오후까지 곤히 자는 나를 깨우지 않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나를 깨워주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몸이 점점 미국 시계에 맞춰 적응해갔다. 그와 동시에 나의 첫 룸메이트를 맞게 되었다. 노르웨이에서 온 그녀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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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는 <Belle in US> 쉬어가는 주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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