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함에서 도망가는 대가
철학자 하이데거는 깊은 지루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일상의 바쁨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그 지루함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우리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지루함의 깊은 곳에서 나 자신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묻어두었던 생각들, 해결하지 못한 삶의 고민과 문제들,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들이 지루함을 만나면 하나둘 올라오거든요. 이런 생각들은 우리를 불편하고 두렵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지루한 시간을 피하려 하죠.
하지만 이렇게 지루한 시간을 피해 수많은 외부자극으로 도망가다 보면 외부 자극에 대한 의존성과 중독성은 점점 커지고, 자극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려요.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의존할 무언가를 계속 찾게 되는 거죠. 무엇보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외부 자극 속에서 살다보면 우리는 정작 내 목소리를 듣는 방법을 잊어버려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지금 내 삶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외부의 조언과 레퍼런스를 찾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물어보지 않아요. 끊임없이 지루함에서 도망갈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법을 잃어버리고, 표면적인 삶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지루함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통찰
스노클링을 해 본 적이 있나요? 바람이 불고 거센 파도가 칠 때에는 바닷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보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바람이 멈추고 수면이 고요해지면 바닷 속에 무엇이 있는지 선명하게 볼 수 있어요.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수많은 외부 자극이 들어올 때 우리는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지루함 속에서는 그 모든 자극이 잠시 멈추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어요. 평소에는 바쁜 일상에 묻혀 있던 내 마음의 소리, 진짜 원하는 것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 거죠.
사실 지루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동시에 '존재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기도 해요. 우리는 항상 뭔가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 익숙해요. 일하는 나, 공부하는 나, 관계를 맺는 나... 끊임없이 동사로 정의되는 삶이죠. 그런데 지루함 속에서는 그 모든 '하기'가 멈춰요. 그리고 우리는 그때 비로소 '그냥 존재하는 나'와 마주하게 돼요. 하이데거는 지루함이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본질에 주파수를 맞추어 그 메시지를 듣도록 도와준다고 이야기해요. 해야 하는 것이 모두 사라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본질과 만날 수 있는 거죠.
뇌과학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루한 시간에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된다고 이야기해요. 이때 우리 뇌는 자기 성찰을 하고, 과거의 경험을 통해 의미를 찾고,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연결하며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들을 창조해 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비효율적이고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이 시간이 사실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거죠.
지루함과 함께 살아가는 법
지루한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루한 시간을 갖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는 이미 스마트폰이 주는 짧고 강한 자극에 길들여져 있거든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지루함을 느끼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조금씩 바로잡는 노력이 필요해요. 오늘 밑미레터에서는 지루함을 회피하지 않고, 지루함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할게요.
우선, 지루함을 느끼는 그 상태를 알아차려 보세요. 우리는 지루함을 느끼자마자 지루함에서 탈출하게 도와주는 자극을 찾아요. 거의 본능적이고 즉각적으로 일어나서 지루함을 느낀다는 것조차 알아차리기 힘들죠. 이제는 지루함을 느끼는 그 순간의 그 감정을 관찰하는 연습을 해보세요. ‘아, 지금 지루함이 찾아왔구나.’ 이렇게 말이에요. 지루함을 알아차리고 느끼는 연습을 할수록 지루함은 피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잠시 머물러 볼만한 감정이 될 거예요.
두 번째로, 의도적으로 지루한 시간을 만들어보세요. 하루에 딱 5분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정해보는 거죠. 스마트폰도 내려놓고 책도 읽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예요. 이 시간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질문, 느낌들을 관찰해보세요.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지만, 점차 그 시간이 주는 평온함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 번에 하나만 하는 연습을 해보세요. 밥 먹을 때는 밥을 먹고, 음악을 들을 땐 음악을 듣고, 걸을 땐 걷는 거예요. 이렇게 한 번에 하나씩 할 때에는 그 순간에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차려 보세요. 음식의 맛, 음악의 소리, 걸을 때 느껴지는 오감을 알아차리면서 지금 이 순간을 느껴보는 거죠. 처음에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 여기에 존재할 때 느껴지는 미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요..
지루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에요. 내 안의 불편한 감정들, 해결되지 않은 고민들과 마주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지루함이 주는 불편함을 견뎠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자기 이해와 창의성, 그리고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깊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