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콜센터에 지원했어요. 다만 뭐랄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 좋은 학교들을 나오고서 콜센터에 간다는 게 한쪽 머리로는 알지만 다른 쪽 머리로는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뇌구조는 물론 DNA까지 바꿔야겠다는 결심, 가진 것 없이 다시 태어난다는 결의로 찜질방에 들어갔어요.

콜센터에서는 26개월을 근무하고, 찜질방에서는 20개월을 살았어요. 그렇게 오래 살 작정은 아니었는데 정이 들어 버렸어요. 그곳에서 근무하는 세신 여사님, 청소 여사님, 리셉션 여사님을 비롯해 단골손님들과도 말이죠. 오랜 병중 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나온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마주한 저의 몰골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몸에 나 있는 모든 구멍에 호스가 꽂혀 있었거든요. 식도에 삽입된 호스에 의지해 식사를 하고, 생리적인 활동조차 제 의지대로 할 수 없었죠.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동물로 회귀한 것 같았어요. 무엇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았고, 한국 사회가 장애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잖아요. 겨우 나이 30을 넘겼을 뿐인데 평생 침대에 누워 살아야 하는 건가, 새로운 사랑도 이제 못 하는 건가, 앞으로 뭘 먹고살아야 하나. 재활에의 의지를 불태우면서도 내면 깊숙이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죠.

이렇게 찜질방과 콜센터에서 생의 감각을 회복하고 나니 다른 게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어요. 콜센터라고 하면 감정노동을 떠올리지만 저는 제2금융권 신용대출을 판매했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돈 앞에서는 모두가 약해질 수밖에 없죠. 수화기 너머 그들의 침묵이 잦아질수록 지은 죄도 없이 저도 함께 면목이 없어져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 공사장에서 크레인이 무너지고, 공장에서 불이 나고, 어느 추운 겨울에는 촛불을 키고 잠들었다 화마에 휩싸여 사망에 이르렀다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와요. 대출의 문턱은 이다지도 높은데, 죽음의 문턱은 왜 저리도 가까운지... 어제 저와 통화를 했거나 내일 할 수도 있는 고객들의 이야기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 밤잠을 설친 날도 많았어요. 저의 월급은 제 고객들의 피땀살로 만들어진 것임을... 과연 이대로 사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어요.

총선이 반년 남짓 남았을 때였고 서점 매대에 놓인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정치권에서 일을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운명처럼 다가왔어요.  정당에 입당하고, 총선 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다 내처 국회 보좌진으로까지 들어가게 됐죠. 

국회에선 국방위원회 의원실에서 근무했어요. 군에도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모든 게 낯설었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건 누구보다 뒤지지 않아요. 하루 두 시간씩 자며 각종 논문과 정책 보고서를 통째로 외우다시피 읽었어요. 군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어 ‘여성예비군’을 신청해 군사훈련도 받고 왔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잘 하기 위해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 과정에 입학했죠. 그런데 이곳 일은 공부에서’만’ 끝나지 않아요.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풀어내어 정책 보고서를 만들고,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물을 고안해 내요. 무엇보다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나는데, 그동안의 제 삶이 이 일을 하기 위해 준비된 기획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제게 잘 맞았어요. 제가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9시 뉴스 메인에서 다뤄질 정도로 영향력도 커졌죠. 서른 중반에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한 우물’을 찾았다 싶었죠.

다만 오히려 정치권에서 더 깊어진 '차별'을 경험하면서 또 다른 관점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21대 총선을 끝으로 여의도 생활은 작별을 선언하고 완전히 떠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