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책을 또 한 권 소개해드리는 날이라 신이 나요. 오봄문고 8번째 책이 나옵니다.
어쩌다 유교를 만난 페미니스트가 동양 고전에 푹 빠져버린 사연이 담겨 있어요. 오늘은 여러분께 이 유교걸의 매력에 푹 빠져보실 수 있는 두 편의 글을 미리 보여드려요. 분량상 한 장의 모든 텍스트를 담지 못했지만, 읽고 나면 다른 이야기도 궁금해지실 거란 확신이 있답니다. 💫
'노브라로 앞가슴이 훤히 트인 티셔츠를 입고 《논어》를 들고 다니는 한 여자'의 이야기, 재밌게 읽어주시고 출간까지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곧 출간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참, 어느 날 갑자기 슬그머니 사라진 〈오월의봄 마케터의 주목도서〉, 오마주 코너도 오늘 다시 살짝 살려보았습니다. 케이트 만의 《남성 특권》에서 읽어보실 수 있는 내용을 소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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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고은
대학을 그만두고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11년째 공부 중이다. 얼떨결에 코 꿰여 시작한 동양 고전 공부가 이렇게 좋아질 줄은 몰랐다. 공동체에서 동양 고전을 공부하며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배운다는 게 뭔지 알게 됐고, 거기에 지금 여기의 삶과 사회 바꾸어낼 무언가가 있다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을 통해 그러했듯, 오늘날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인터뷰도 하고 있다. 인터뷰집 《함께 살 수 있을까》를 썼고, 《다른 이십대의 탄생》, 《낭송 사자소학》을 함께 썼다.

(페미니스트) 유교걸의 탄생


PC방에 앉아 사이트 시스템 시계를 켜놓고 58초와 59초 사이에 학사 시스템을 클릭했다. 인생 첫 티케팅으로 얻은 건 교양과목 〈여성과 사회〉 수강권이었다. 새내기 배움터에서 만난 조장 언니가 〈여성과 사회〉를 들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슬쩍 돌아보니 옆 조의 조장 선배도 같은 과목을 추천하고 있었다. 도대체 여성과 사회가 어떻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전공 수업보다도 중요하고 인기가 많은 수업인 것 같았다. 티케팅 성공 후, 레어템을 겟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새로고침을 눌러 〈여성과 사회〉의 수강 인원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가 수강 신청을 마치고 사이트를 나갈 때까지도 수강 인원이 다 차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리 조의 선배와 옆 조의 선배는 절친한 친구사이였고, 단둘만 이 수업을 새내기들에게 추천했다.


얼떨결에 코가 꿰였지만, 운이 좋게도 〈여성과 사회〉는 내게 두고두고 남는 최고의 대학 수업이 됐다. 김순남 교수님의 이 기초 페미니즘 수업은 호불호가 갈리는 듯했다. 나와 친한 친구들은 교수님의 매력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교수님은 공부하고 질문하는 태도를 잃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강의하셨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교수님 최고의 매력은 다른 데 있었다. 교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몹시 피곤한 안색으로 강의실에 등장하셨다. 물론 우리 강의실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 맨 꼭대기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교수님만큼 지친 얼굴로 강의실에 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활동하고, 열심히 수업하며 얻으신 피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던 당시의 나는 그것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교수님이 매일 같이 지쳐 있는 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저만한 피로를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페미니즘’이니 ‘퀴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는 수업을 들으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여성 당사자인 나도 알아차릴 수 없게 어떤 힘들이 사회 곳곳에서 미묘하고 촘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나는 교수님을 따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고 다짐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다짐하며 급발진했다. 수업이 끝나면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는 왜 ‘엄마’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지 않냐고 따져 묻고(엄마는 이미 인문학 공부를 하며 새로운 동료들을 만들고 있었다), 함께 한문을 공부하는 열두 살 많은 이를 ‘오빠’라 부르기 싫어서 이름으로 부르고(그는 나의 한참 선배이자 선생이기도 했다), 잘 만나고 있었던 애인에게 우리는 왜 독점적인 연애를 해야 하냐고 따져 물었다(그는 나의 주기적인 문제 제기로 상당히 괴로워했다).

스무 살이었다.


1년이 넘게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고 나서야 두 주먹에 꽉 쥔 힘이 풀렸다. 페미니즘이 나의 정체성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건 그때부터였다. 남들에게 페미니즘의 당위를 강요하는 대신, 내가 사회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나 역시 가부장적인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나의 ‘헤실헤실 웃음’ 습관은 사람들, 특히 어른이나 남성과 잘 지낼 수 있는 역할을 했다.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고, 논쟁거리를 피함으로써 일을 키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삶에 녹아든 뒤, 나는 그것이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목소리를 빼앗는 장치라는 걸 알게 됐다. 가부장적인 문화는 쉽게 컨트롤할 수 있는 여성을 원했고, 나는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부응하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헤실헤실 웃음’을 내 습관 목록에서 쫓아냈다. 이렇게 하나둘 지우다보면 내게 과거의 산물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미래 세대에게 고리타분한 문화를 물려주지 않는 신여성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유교 같은 것에 진절머리 내는 페미니스트였다.


유교 같은 것에 진절머리 내던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인 유교걸이 되기까지 20대 중 절반의 시간이 필요했다.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유교 공부도 코 꿰여 시작하게 됐다. 대학에는 〈여성과 사회〉를 포함한 소수의 강의를 제외하곤 나의 학구열을 만족시켜주는 수업이 거의 없었다. 길게 보면 무엇이든 공부가 되지 않겠냐마는, 나의 스물두 살은 성급하고도 자신만만하게 대학의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는 나이였다. 대학을 자퇴하고 이전부터 스리슬쩍 발을 담그고 있던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하겠다는 의지만 가득하고 무엇을 공부하면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들은 동양 고전을 공부하라고 등 떠밀었다. 도대체 동양에 무슨 고전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낡고 해진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들 대부분이 공부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대단한 것인 듯했다. 알고 보니 문탁네트워크에는 시기에 따라 강세를 얻는 학문 분야가 있었는데, 그 시절은 동양 고전이 득세하던 때였다.


페미니즘이 즉각적으로 내 삶에 파장을 일으켰다면, 동양 고전이 영향력을 발휘하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페미니즘 수업은 개론서를 읽는 기초 수업이었고, 동양 고전 수업은 한문 원문을 읽는 심화 수업이었다. 또래 중에서도 한자에 더 무지한 내가 수업 시간에 무슨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부모님이 한글 이름을 주었기 때문에, 태생부터 인연이 아니라고 한자를 무시하던 내가 무슨 글자를 읽을 수 있었을까? 가만히 앉아서 한문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바보 그 자체였다. 나의 한문 선생님은 조금 아는 사람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낫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정말 그랬다. 연달아 수석, 차석을 하며 아는 척하기 바빴던 대학 시절과 다르게 나는 한문에 관련해서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아는 체를 조금도 할 수가 없어서 한문 수업을 떠날 수 없었다. 배울 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채 멀뚱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한문 선생님은 저놈이 바보이긴 해도 성실하다고 생각하셨는지 급작스럽게 일을 하나 맡기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자소학》을 낭송문으로 풀어 읽는 팀에 들어가 있었다. 내게 동의하거나 거절할 기회는 없었다. 물론 멀뚱히 있다가 그런 기회를 놓쳤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나는 동양 고전을 오래 공부하신 선생님과 함께 《사자소학》을 정리하고 낭송에 적절한 한글 번역문을 만들어 책을 출간해야 했다. 그제야 오래도록 잠자고 있었던 페미니스트 자아가 눈을 번쩍 뜨고 뛰쳐나왔다. ‘뭐라고? 《사자소학》?’ 《사자소학》은 여덟 자가 한 문구로 된 한문책으로,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만든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특별한 설명이 없는 이 책을 외우고 또 외웠다고 했다. 그런데 거기엔 당시 페미니스트 자아가 보기엔 좀 꺼림직한 문장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夫婦有別 長幼有序 (부부유별 장유유서)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


집안에서 남녀의 역할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여성혐오의 증거가 있을까? 사회에서 나이에 따른 차이는 왜 필요한 걸까? 수업에서 한자를 따라 읽기 급급하던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책임감을 느끼고 꼼꼼히 들여다보며 작업을 시작하자 걸리는 부분이 점점 늘어났다. 이 문장들이 불편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사자소학》의 한글 낭송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한문에 입문하고 싶어 하는 40~50대 여성들을 모시고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분들 모두가 분통을 터뜨렸다. 《사자소학》의 문장들이 자기가 차별받았던 손녀, 딸, 며느리의 경험을 그대로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그들이 만난 어떤 어르신들은 실제로 이 문장을 차별의 근거로 삼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자소학》 작업을 이끌어가는 선생님은 어떤 감정 동요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의 감정적인 반응에도 별말이 없으셨다. 50대인 선생님도 다른 분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텐데 왜 아무렇지 않으신지 이해가 안 됐다. 선생님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페미니즘과 거리가 아주 먼 분도 아니었다. 처음엔 선생님이 동양 고전을 오래 공부하셨으니 이런 문제엔 체념하셨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렇다손 치기엔 선생님이 너무 평온했다. 문득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저 개념들과 문장들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쓰이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공부한 지 2년이 지났어도 내가 이 세계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페미니스트 자아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일단 판단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책에서 계속됩니다.)

쓸고 닦고 환대하기

(중략)

대학을 자퇴한 뒤, 제대로 공부하겠다고 발심한 상태로 가장 먼저 시작한 건 ‘100일 수행’이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어려워하는 친구를 위해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선생님께서 대학을 자퇴하고 할 일 없어 보이는 내게도 함께하라고 제안하셨다. 100일 동안 매일 아침 일찍 나와서 공동체 공간을 청소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 됐다. 책을 읽고 글을 쓴 뒤에 혼나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글을 쓰거나 말할 필요가 없을 테니 자기 검열할 필요도 없을 테다. 게다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생활하는 건 자신 있었다. 내가 매일 하는 건 운동밖에 없으므로, 운동 시간을 약간만 조절하면 됐다. 약 네 달간은 단출한 평일을 보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7시 20분에 집을 나서 9시에 공동체 공간에 도착했다. 30분 동안 청소를 하고 저녁 5시까지 시간을 보냈다. 집에 도착하면 6시 반. 저녁을 먹고 잠시 소화를 시킨 뒤 9시에 운동을 시작해서 10시에 씻고 잠들었다. 다음 날을 잘 보내기 위해서 밤에는 약속을 잡지도, 술을 먹지도 않았다.


가끔 쉬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SNS를 켜면 타임라인 위 친구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그들 옆자리에 있었는데 말이다. 이곳은 절이 아니었지만, 이곳의 나날은 절간과 얼추 비슷했다. 천방지축 스물두 살이 소화하기에 만만치 않은 생활이었다. 점심엔 주로 공동체로 들어온 선물로 식사를 준비했는데, 자극적인 음식이나 고기가 나오는 날은 매우 드물었다. 거기에 규칙적인 청소 시간까지 더해지면 완벽하게 밋밋한 하루가 완성됐다. 아무리 특별한 취미가 없더라도 밖으로 나돌고 싶은 마음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날이면 마음은 일찌감치 밖으로 나돌았다. 그래도 이왕 하는 거, 공부라도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공동체에는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공간의 붙박이인 내게 말을 걸었다. 즐거운 일이 있어서 나누고 싶은 사람, 당황스러운 사건이 발생해 수습하고 싶은 사람, 맛있는 과일을 가져와 함께 먹고 싶은 사람…….

내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도 많았다. 사람들은 두꺼운 A4 유색 용지는 어디 있는지, 칼은 어디에 있는지, 혹시 돌아다니던 볼펜을 본 적은 없는지 물어왔다. 밥을 먹고 잠시 산책에 다녀오자는 말에 마실을 나서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고, 회의라도 하나 하고 오면 반나절이 사라지고 없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은 순서에서 계속 밀려났다. ‘이게 공부 공동체에서 하는 수련이 맞나……?’


시간이 좀 지나고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 청소하고, 공간을 지키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내가 상상했던 팬시한 ‘공부’는 아니었지만, 분명 공부이긴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대 서양에서는 그저 말을 꾸미고 논쟁하는 것 자체를 철학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피에르 아도(Pierre Hadot)는 고대 서양의 철학이 생활양식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고대철학은 생활양식이자 확고하게 담론인 것이다.

그것은 담론이자, 결코 닿지 못하면서도 지혜로 향하는 생활양식이다.


여기서 “담론”은 오늘날 사용되는 특수한 입장의 학술적 관점이 아니라 ‘논증적 사유’ 그 자체다. 사유하는 생활이 바로 담론이기 때문에 이 또한 생활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대에 철학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문제였다. 철학 공부란 특별한 책을 읽고 대단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제대로 보내는 것이다. 고대 동양에서도 철학이 생활양식이긴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내딛는 첫걸음이라고 일컬어진 《소학》에는 쓸고 닦고 예절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이 담겨 있다.


小學之方 灑掃應對 入孝出恭 動罔或悖 (소학지방 쇄소응대 입효출공 동망혹패)
소학의 가르침은 물 뿌리고 청소하며, 남의 말에 응대함이 예절과 맞으며,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해 행실이 조금도 예의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는 데에 있다.

이 문장을 쓴 주희(朱熹)라는 대학자는 이 문장을 충실히 이행한 뒤에, 그때도 여력이 있다면 책을 읽으라고 말했다. 여기서 공부란 책을 읽는 것도, 논쟁하는 것도, 멋들어진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을 잘 정비하는 것, 잘 꾸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공부이며 기본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공부다. 개중에서도 가장 앞서 해야 할 것은 “쇄소응대(灑掃應對)”다. 내 멋대로 이 말을 다시 풀어보자면 청소기 돌리고 물걸레질하며(“물 뿌리고 청소하며”), 내 일상의 공간에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맞이하는 것(“남의 말에 응대함이 예절과 맞으며”)이다.


오늘날 청소는 가장 말단의 일, 그렇기 때문에 가치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설거지나 빨래를 일절 시키지 않는 양육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청소일이 주업무인 청소 노동자나 환경미화원을 무시하는 몰상식한 사람들 이야기도 많이 보인다. 신데렐라와 콩쥐가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도 청소다.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불행하고 무시당하던 시기에 허름한 옷을 입고 매일매일 집안을 돌봤다. 사실 나 또한 청소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청소기는 종종 돌렸지만, 부끄럽게도 세탁기 돌리는 방법은 성인이 되고서 알 정도로 청소를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소학》에서는 왜 매일매일 공간을 쓸고 닦으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걸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꾸준히 청소나 응대를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걸레로 먼지를 훔치고, 의자를 들어 청소기를 밀어 넣고, 다시 밀대로 정리한 뒤 그 걸레를 빠는 데만 몇 번의 허리굽히기가 동반되는지. 잠깐 방문하는 사람을 위해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그들을 위한 차나 커피, 따뜻한 물, 컵받침을 언제든 내어줄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몇 번의 손놀림이 필요한지. 내가 공동체에서 책을 펴보지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는 날이 수두룩했던 건 이 일들이 절대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들은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야 하는 일이다. 먼지도 나의 행동에서 떨어져나오는 것, 어질러진 공간도 나의 일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소는 나의 가장 작은 행동부터 주시하고 돌아보는 행위다. 청소하다보면 내가 뭘 먹었는지, 무슨 물건을 사용했는지, 얼마나 정신 상태가 산만한지 알 수 있다. 공동체 공간을 청소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청소하다보면 어떤 사람들이 공간에 드나드는지, 어떤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지, 심지어 때론 누군가 공동체에 마음이 소홀해졌는지까지도 알 수 있다. 나의 일상적인 행위들이 나를 구성하듯,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이 공동체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도 청소할 때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청소는 일상을 소홀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공부이자 내가 어떤 물건, 어떤 사건, 어떤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지, 그러니까 어떤 존재들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우쳐주는 공부다.


응대도 그렇다. “남의 말에 응대함이 예절과 맞으며”는 ‘환대’라는 요즘 말로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나와 다른 존재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꼿꼿하게 드러내고 목소리를 키우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는 데엔 심적으로도 물적으로도 준비가 필요하다. 환대할 수 있는 소양을 매일매일 닦는 것 역시 타자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이고, 낯선 이들에게 손톱을 세우지 않기 위한 연습이기 때문에 공부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청소와 환대, 그러니까 일상을 살피고 꾸리는 것과 남에게 곁을 내어주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일’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로 세상이 꽉 차 있었으며, 그때 생기는 먼지나 어질러짐,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그에 딸려 오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나는 청소의 가치를 얕보고 환대의 의미를 무시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공동체에서 쓸고 닦고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공부를 할 줄 알게 됐다. 두껍고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거나 누가 들어도 알 만한 철학자를 앞세우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고 핀잔을 듣고 글이 이상하다고 혼이 나도 괜찮았다. 내 옆을 돌아보고 누군가를 환대하는 일상을 보내고, 그것의 의미를 알아봐주는 공동체에서, 그것의 가치를 익힐 수 있는 책을 읽고 글을 쓴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 됐다.
힘껏 비웃고 싶지만 비웃기만 하기엔
모래

지난 8월 17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등산로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으로 피해자 여성이 이틀 뒤 사망했습니다. 기소된 가해자 남성 최윤종이 9월 25일 열린 첫 재판에서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살인 고의는 없었다"고 부인하며 분노를 치솟게 했는데요.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온라인에서 경악스러운 '살인예고' 글이 하루가 멀다 하게 수백 건씩 올라오면서 국민들의 불안이 증폭되는 와중이었어요. 칼부림 혹은 살인을 앞세워 공포를 조장하는 글을 작성해 경찰에 구속된 사람들의 신원을 보면 30대 여성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20~40대 남성이었지만, 당시 국가수사본부는 절대대수가 남성이라는 젠더별 통계에는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8월 11일에는 한 걸그룹의 멤버가 '자신의 팬심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당 소속사 임직원을 대상으로 살인을 예고한 20대 남성이 구속됐고, "수요일날 신림역에서 한녀 20명 죽일꺼다"라는 글을 올리고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한녀○○들 죄다 묶어놓고 죽이고픔”, “2분이면 한녀충 10마리 사냥가능하긔” 등의 여성혐오 게시글을 5개월간 2000건 가까이 작성한 20대 남성 이모씨 역시 같은 날 구속기소 되었습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기를 거부하며 개인의 '정신 이상'을 동기로 보던 검찰은 이번 이모씨 사건의 경우 여성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에 기반한 ‘여성혐오 범죄’라고 판단했어요. 

2021년 출간된 케이트 만의 《남성 특권》은 오직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머쥔 특권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추적하는 책입니다. 2장 〈'비자발적' 독신이라는 환상〉에서는 '인셀'과 그들의 경악스러운 피해자 의식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우선 인셀이란 비자발적 독신 상태involuntary celibate를 뜻합니다. 
책에 따르면 인셀이라는 단어는 바이섹슈얼이자 진보적 캐나다인인 알레나Alana라는 여성이 1990년대에 '알레나의 비자발적 독신 프로젝트'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할 때 만든 단어예요. 자신처럼 성적 불만족이나 데이트를 하지 못해 생기는 외로움에 관한 고민을 나누고,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을 나누도록 기능시키기 위해 만든 홈페이지였죠. 하지만 요즘의 '인셀'이라는 말은 이성애자 남성이 자신을 정체화할 때 독점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인셀의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익명 기반의 인터넷 게시판을 자주 드나들어요. 이를테면 '포챈4chan' 같은 사이트를 말이죠. 

'포챈'은 《인싸를 죽여라》에도 등장해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공유하는 사이트였던 '투챈2chan'을 기반으로 미국의 한 십 대 청년이 개설한 사이트로, 지독하게 여성혐오적일 뿐만 아니라 '찐따스러운' 자신을 자조하는 자기비하의 성격이 강하고, 젊은 세대로부터 출현한 온라인 우익의 감수성을 대표합니다. 댓글이 많이 달릴수록 상단에 게시물이 노출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서 기괴한 포르노그래피, 잔인한 이미지, 인셀들의 사회로부터 배태된 인종적 위계질서와 여성혐오가 담긴 게시물의 정도가 끝을 모르고 강화되는 곳이에요.
이 책 6장 〈'페미니즘이 세상을 망친다':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와 대안우파의 연결고리〉에서는 남초 커뮤니티가 보다 진지한 대안우파라는 정치 세력과 연결되며 교류가 활발해진 결정적인 이유를 반페미니즘으로 꼽는데, 끔찍하게도 실생활까지 그 영향이 침범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엘리엇 로저Elliot Rodger' 사건이에요.
엘리엇 로저 사례는 《남성 특권》 2장을 여는 사례이기도 한데요. 2014년 5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산타 바바라 캠퍼스로 찾아가 기숙사 안에 있던 여학생 전부를 죽일 계획이라며 업로드한 자신의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여자들은 나를 단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지. 나는 너희들이 왜 나한테서 아무런 매력도 발견하지 못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지만 바로 그 이유로 너희들을 처벌할 거야. 내게서 어떤 매력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불의고, 범죄야. 나는 완벽한 남자인데 너희들은 나같이 최고로 젠틀한 남자를 제쳐두고, 역겨운 남자들에게 몸을 던지지." 결국 그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입구에서 출입을 거절당하자 길모퉁이를 걸어가던 다른 여학생 세 명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그로 인해 두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부상을 입었고요.

사춘기 시절과 그 이후 자신을 화나게 만들었던 특정 유형의 여성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춘기 내내 "거절당한 청소년"이라는 보복 판타지 서사를 쓴 40세 남성 스콧 폴 비얼리Scott Paul Bierle는 엘리엇 로저에게 영감을 받았다며 한 핫요가 스튜디오에서 총기를 난사했어요. 그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증언한 또 다른 남성 알렉 미나시안Alek Minassian은 토론토에서 인도로 차를 몰아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는데, 이런 살상을 벌이기 전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인셀의 반항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채드Chad와 스테이시Stacy를 죽일 것이다! 모든 이들이여, 위대하신 엘리엇 로저 앞에 엎드려 절하라!"
'보통' 여성인 "베키"(왼쪽), '매력적인' 여성 "스테이시"(오른쪽) 
'매력적인' 남성 "채드"  
채드는 인셀인 자신들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남성들, 동경하지만 절대 그들처럼 될 수 없기에 증오의 타깃이 된 가공인물입니다. 즉 매력적인 남성을 지칭하는 은어이죠. 스테이시는 "핫한" 젊은 여성으로, 아주 매력적이지만 (인셀들이 증오하는) 때로 무례하고, 오만하고, '2,000달러짜리 구찌 가방을 들고 다니는', 우리나라식으로 치자면 '된장녀' 같은 은어입니다. 

흔히 엘리엇 로저가 했던 말처럼 "너희들은 나랑 자주지 않아.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아. 왜 나 같은 멋진 남자를 몰라줘."라는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이 말에 케이트 만은 이런 불평의 내용이나 화법을 우스운 장광설로 일축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고 심지어 우습지만, 불행히도 '그런 이유로 인셀의 언사를 가볍게 넘길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힘껏 비웃고 싶은 언사이지만 거기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인셀은 극도로 위험한 존재'이며, '분노를 행위로 옮길 때는 이들이 절망에 빠져 바닥을 친 상태'인데, 이를 섬세히 들여다보면 '타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애정과 존경을 담아 우러러보길 기대하는 남성들이 가진 유해한 특권의식의 결정체'이기 때문이에요.(37) 그들이 단지 섹스를 하지 못해서 이런 행위를 한다거나 혹은 섹스가 이들이 처한 문제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판단은 인셀에 대해 범하기 쉬운 오판이라고요. 그들이 단순 '도덕성이 결여된' 존재이거나,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여성을 어느 정도 인간으로 인정하지만 인셀이 갖고 있는 특권적 이데올로기의 어떤 면모들을 공유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런 남성이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나는 우리 엄마, 나의 여동생, 아내를 인간으로 보는데? 그들의 인간성을 인지하고 있다고." 

케이트 만은 자신의 또 다른 저서 《다운 걸》(글항아리)에 여성혐오의 본질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고 여성에게 비대칭적인 도덕적 지원자 역할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13)고 썼습니다. 여성의 종속, 돌봄, 인정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이 이를 거부하는 여성을 단속, 처단하는 권력 체계가 여성혐오라는 것이에요. 인셀들이 여성을 종종 '여성Female+로봇Humanoid/android'의 합성어인 '피모이드Femoid' 따위의 말로 부르는 이유는 여성을 정말 비인간 동물 혹은 로봇과 유사한 무엇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비하하고 싶은 욕망과 분노가 투영된 표현'이라고요.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남성들이 '그 어떤 여성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며, 자신에게 그 어떤 여성의 사랑, 돌봄, 찬사를 받을 권리 또한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일 겁니다. 사랑, 섹스, 도덕적 지지를 제공하는 존재 그 이상임을 인정하는 것이요. 

작은 키에 열등감을 가지고 젊은 남성들을 공격한 신림역 살인범 조선, 디시인사이드에 일베 성향의 게시물을 올렸던 서현역 살인범 최원종, "성관계를 한 번도 못 해봤다"고 진술한 신림동 공원 강간 살인사건의 범인 최윤종.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예고 및 실행 범죄는 정말 검찰이 지금까지 판단해왔던 것과 같이 '이상한' 개인이 저지른 일탈 범죄일까요?
페미니즘 철학 입문》의 저자 김은주 선생님께서는 남성 특권》에 보내주신 추천의 글 〈특권을 누리는 남성들의 생떼를 받아주지 않기 위해〉에서 '이 책은 소위 근대 국가가 남성을 어떻게 '표준 인간'으로 만들었는지, 그로 인해 여성이 어떻게 배제되고 불평등을 겪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제시한다'고 쓰셨어요. 자신의 기분, 심기를 거슬렀을 때 여지없이 공격성을 표출하는 남성들에 대해서 '당연시되어 온 남성의 권리가 실은 특권이며, 그것이 여성의 희생과 억압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알려주고 있다고요. 앞서 언급한 인싸를 죽여라》 그리고 보통 일베들의 시대》, 케이트 만의 다른 저서 다운 걸》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여성혐오의 기제와 그것을 존속시키는 것, 특권의식은 어떻게 혐오와 폭력을 낳는지, 그것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어떻게 나타나는지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해보실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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