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98회 (2023.04.05)
  ▲ 안희연 시인이 직접 찍은 사진

봄입니다. 요즘 참 걷기 좋지요. 덕분에 지난 주말에는 꽤 오래 산책을 했어요. 저희 집 근처에는 개천이 있는데, 천변을 따라 아기자기한 상점가가 형성되어 있거든요. 얼마 전부터는 테이블들이 바깥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답답한 실내보다는 탁 트인 실외를 선호하는 분위기네요. 어느 가게든 바깥 자리부터 서둘러 채워지는 걸 보면 말이에요. 천변 카페에 앉아 자전거 타는 아이들, 강아지를 끌고 가는지 끌려가는지 모르겠는 사람들, 꽃 사진을 찍거나 후하후하 조깅하는 사람들의 달뜬 호흡을 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순해지더군요. 맞아요, 봄은 그저 봄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발끝을 살짝 들어올리곤 합니다.

문득 유계영 시인의 「봄꿈」이 생각났어요.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의 문을 열면, 이 시가 가장 먼저 놓여 있답니다. 저는 봄만 되면 이 시가 생각나요.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누군가 물으면, “여기 이 시 좀 봐봐. 여기 답이 다 있다니까?” 호들갑을 떨며 이 시를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안희연 시인이 사랑하는 첫번째 시💘


봄꿈 (유계영,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온종일 털었는데 네 개의 지갑은 모두 비어 있다

 

나는 꿈속에서 허탕만 치는 소매치기였으나

아무도 없는 무대에 올라 개망초처럼 흥겨웠다

 

빈 주머니들은 더 가벼워졌겠지

왼손과 오른손을 꽉 묶고 차분히 잠들겠지

 

겨울에 떠난 것들이 겨울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뭐라고 불러줄까 생각하면서

 

낡은 것은 새것으로 새것은 낡아가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아는 것을 모르게 되고

 

봄에도 그러겠지

 

장발장은 빵만 훔쳤는데 왜 십구 년을 갇혀요?

은촛대를 훔쳤을 땐 왜 용서받아요?

 

선생님은 왜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떠들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손잡이가 떨어진 채로 들썩거리는 주전자들아

 

멀리 바람으로 날아갈 수 있는 죽음이 있다고 믿는

삶의 아둔한 속도로는

집오리 같은 시간 속을 영영 뒤뚱거리게 될 것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웃는 낯으로 침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들

 

눈에서 태어난 것들이 눈으로 죽으러 돌아와

사흘 내 잠만 자다 나가는 것을 두고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모르는 것은 끝까지 몰라두거라

어른 같은 아이는 귀엽지가 않으니

「봄꿈」의 화자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고 현명한 사람 같아요. 자기만의 ‘멋’과 ‘(격)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꿈속의 그는 “허탕만 치는 소매치기”예요. 수완이 없으면 좌절할 법도 한데 허무한 손을 가지고도 “개망초처럼” 흥겹습니다. 게다가 한술 더 뜨지요. “집오리”처럼 “삶의 아둔한 속도로” 뒤뚱거리지 말고 “모르는 것”은 그냥 속시원히 모르라고. “어른 같은 아이는 귀엽지가 않”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저러는 걸까요?

그런데 좀 부럽기는 합니다. 그의 낙천성은 에라 모르겠다라는 도피나 저 너머로의 초월이 아니라 슬픔을 딛고 선 자의 천진성에서 나오는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의 내면의 핵심에는 ‘개망초’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개망초, 보신 적 있나요? 쨍한 노랑이 중심에 떡 버티고 선 꽃이에요. 흔하지만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강한 꽃이죠. 게다가 하필 이름도 개망초라니! 개망초의 악센트는 ‘개’에 있는 거 아시죠. 꽃 이름이 망초였다면 이렇게까지 흥겹진 않았을 텐데. 개망초는 개망초. 개망초는 개망초. 한번 따라 읽어보세요. 여러분 안의 개망초가 움트는 게 느껴지실 거예요.

시는 결국 태도이고, 저는 이 시가 지닌 개망초 같은(욕 아님) 태도가 참 좋습니다. 개망초의 천진성은 존재를 수렁에서 건져내고, 일으키는 힘이라고 믿어요. 거기 당신,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셨다면 창밖이 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꽃도 나무도 구름도 모두 춤추고 있다고요! 그나저나 춤 하니 문득 떠오른 건데, 제가 얼마 전에 동네를 산책하다 이런 플래카드를 보았거든요? ‘댄스 배우실 분 / 춤 잘 가르치는 학원 / 사교댄스(지루박, 부르스) 스포츠 댄스(라틴, 모던) 리듬짝(뽕발) / 3층으로 / H.P 010-4285-××××’ 삶이 여기서 더 가혹해지면 언제든 전화할 요량으로 저장해두었어요. 리듬짝(뽕발)이 특히 궁금하던걸요. 혹시 필요하신 분 계시면 번호 공유해드릴게요. 저는 그저 여러분이 어디서든 개망초다운 흥겨움으로 삶을 일으키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출간
구독자님! 이번주 우시사 시믈리에 안희연 시인의 신간 산문집 출간 소식을 전해드려요💙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은 달큰하게 깊어지는 밤, 크게 웃고 한바탕 울고 맘껏 사랑하고, 그 다음, 그 마음으로 잘 이별하는 이야기예요. 

열어보면 당신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러니 궁금한 분들은 어느 문으로든 열어주세요! 
💘안희연 시인이 사랑하는 두번째 시💘

딸기잼이 있는 저녁 (김경인,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이국어로 인사하고 싶다

조금 지나면 밤은 있는 힘껏 창문을 밀고 들어와

이내 진득진득하게 녹아내릴 것이다

처음 배우는 외국어로 안녕 하고 싶다

딸기가 자라면 나무딸기가 자라면

땅을 거머쥐는 연록빛 줄기처럼 나는

나를 거머쥐면서 어디로든 갈 것이다

해변의 모래톱이 휩쓸고 간 흰 조가비 같은 질문들 혹은

파도가 치고 금세 지워지는 파도

아니면 한결 가벼워진 그림자 옆에서

다만 어리둥절해지는 아이처럼

너인지 나인지 모르게 졸아든 기억 속에서 문득

씹히는 딸기 씨앗은 누구의 것?

사라진 이국어로 잠을 번역하고 싶다

내가 보낸 우편물들이

차례차례 돌아오고 있다

젖어서 돌아오고 있다

오늘의 병뚜껑은 잘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녁은 식탁 모서리처럼

둥글 것이므로 둥글어야 할 것이므로

딸기잼만 있다면

이 투명하게 닫혀 있는 침묵이 펑, 하고 열리기만 한다면

자, 너의 입안에 가득 고인 말들은

상한 자두인가, 아니면 달콤한 딸기인가

입을 벌리면 집요한 밤이 쏟아지고

딸기잼은 딸기잼

달콤한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두번째 시로는 「딸기잼이 있는 저녁」을 골라보았습니다. 김경인 시인의 아름다운 시집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에 수록된 시입니다. 일부러 틀리게 진심을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진중한 사람임이 틀림없어요. 그는 쉽게 낙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국의 언어를 익히고 늘 어딘가를 향해 가기를 갈망하지만 말과는 달리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떠나지 않음을 선택한 거예요. 이 문장들에는 큰 차이가 있지요.

시를 읽으며 딸기잼의 달콤함은 딸기의 뭉개짐을 통해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끝끝내 기다리는 마음이 쉽지는 않겠지요. 집요한 밤은 계속될 테고요.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딸기잼 뚜껑을 열 때 나는 펑! 소리만큼은 그 어떤 어둠에도 지지 않는 경쾌함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존재가 해방되는 소리, 그 촉감. 한번 경험한 이상 잊기 힘들걸요. 그래서 다행입니다. 화자가 유리병을 펑! 따는 순간이 화자의 ‘개망초’가 피어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봄, 저는 여러분 안의 개망초가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한 편의 시를 읽는 일이 개망초의 흥겨운 피어남에 다름 아니기를 바라고요. 봄이잖아요. 봄이니까요. 너무 애쓰지 말아요. 울다 웃으면 뭐다? 그게 곧 삶이고 펑 펑 터지는 환희이고 개망초 밭이지 뭐겠어요. 개망초 밭에서 뒹굴다 보면 여름도 오고 겨울도 오겠지요. 그렇게 우리 무럭무럭 늙어가요. 살아 있어요.

 

추신) 참, 막 출간된 제 신간 산문집에도 딸기잼 같은 기억 담뿍 담았습니다. 아픈 기억 뭉근하게 졸이느라 애 많이 썼어요. 책이라는 유리병에 담긴 딸기잼 펑! 따서 맛있게 맛보시기를 바라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미리 감사를 전해요.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시믈리에는 『헬프 미 시스터』 『몸과 여자들』 등을 펴낸 이서수 소설가입니다. "동시대의 한가운데를 주시하는 명민한 집중력으로 작가는 미묘한 전환의 순간을 포착해냈다"는 평과 함께 「젊은 근희의 행진」으로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였죠. 이서수 소설가가 고른 두 편의 시는 어떤 걸까요?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 프리다 칼로의 몇 군데 작은 칼집이라는 그림을 찾아보았어요. 두 시인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작은 칼집이 아니더군요. 무시무시한 상처더군요. 타인에게 그런 상처를 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 <우시사>에서 추천해준 시를 캡쳐해놓고 읽다가 장바구니에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갑도둑 <우시사>! 대가로 오래오래 <우시사> 해주기!

💚의견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시 <우시사>를 못 받은 날이 있다면 스팸 메일함을 한번 확인해주세요!
오늘의 레터는 어땠나요?
🌱구독자님의 피드백은 <우시사>를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
문학동네
jkj110570@munhak.com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10   TEL. 031-955-1928
수신거부 Unsubscribe
stibee

이 메일은 스티비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