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미의 비빌언덕 열다섯 번째터 

윙크를 하려는게 아니라,

 안녕하세요, 단미입니다. 혹시 윙크할 줄 아시나요? 인삿말을 쓰는 현재 저는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왼쪽 눈을 꼭 감았다 뜨기를 수십 번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윙크 연습을 하는 건 아니고요. 속눈썹이 눈을 찌르는 건지, 눈 안에 들어간 건지 영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아서 거울을 들었다가 눈을 비볐다가, 이젠 불편한 한쪽 눈을 꼭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고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눈이 시큰시큰한 것이 아리도록 아파서 보육원 선생님께 눈이 너무 아프다고 몇 번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또 엄살 부린다며 시큰둥해하다가 결국 안과로 데리고 갔는데요. 의사 선생님이 눈을 들여다보시고는 위아래 속눈썹이 안쪽으로 말리는 모양으로 자라서 동공을 계속 찔러 아픈 거라며 속눈썹을 뽑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동공에 스크래치가 많이 나서 계속 두면 눈이 안 좋아질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멀쩡해 보이는 속눈썹을 쌩으로 뽑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만 제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빠-밤 빠아-밤 빠밤 빠밤 빠밤빠밤빠밤빠밤' 영화 <죠스> BGM이 자동으로 깔리는 마법. 두 눈을 향해 다가오는 핀셋을 바라보며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속눈썹 하나에 큰 눈물 한 방울, 속눈썹이 하나씩 뽑힐 때마다 몸서리가 절로 쳤어요. 진료실에 함께 들어간 보육원 선생님은 눈물을 툭툭 떨구는 제 모습이 민망했는지 또다시 제게 "엄살 부리지 마라" 하고 핀잔을 주셨지요. 그때 조용히 속눈썹을 뽑고 있던 의사 선생님이 나지막이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원래 많이 아픕니다."

의사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진료실에 울리는 순간, 아픈데 아프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나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어요. '거봐 거봐, 내 말 맞죠, 내 말 맞잖아.' 뱉어낸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충분히 전달됐다고 생각했어요. 내 아픔이 엄살이 아니라 당연한 통증이었다는 것을 인정받았던 그날의 감각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내 삶 속에 스민 통증의 실체를 누군가 선명하게 짚어주는 일. 어쩌면 혼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동정이 아니라, 내가 견디고 있는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정직한 인정일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토요일, 영등포 하자센터에서 열린 'We are Future Makers' 자립준비청년 여성들을 위한 멘토링 자리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마주하게 된 여성 청년들의 눈빛 속에서, 아픔을 엄살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어릴 적 내 모습과, 무작정 상경해 무엇으로 먹고살지 고민하며 하자센터에 첫발을 디뎠던 과거가 겹쳐 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의 내가 이러한 모양새로 살아가게 된 데는, 나의 첫 직장이라 할 수 있는 하자센터와 비진학 청(소)년 창업 프로젝트 '소풍가는 고양이'의 몫이 아주 클 것입니다. 억울함으로 가득 차 뾰족뾰족 모가 나 있던 스물네 살 단미의 지지고 볶았던 첫 번째 직장이자 일학습터 '소풍가는 고양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단미의 비빌언덕 열다섯 번째 레터 [비(非)진학, 은지에서 단미로]를 시작합니다.

  퓨처메이커스 멘토링으로 다녀온 하자센터 (2026년)
#15  비(非)진학, 은지에서 단미로

‘어떻게 먹고살지.’ ‘아프면 어쩌나.’ ‘혹시나 죽으면 며칠 만에 발견될까.’

스무 살, 보육원 문을 나설 때 가슴을 짓누르던 질문들은 거창한 미래나 꿈이 아니라 오직 살아남는 일에 묶여 있었다. 대학에 갈 수 없으니 무작정 올라온 서울. 연고 하나 없는 타지에서의 삶은 자립이 아니라 고립에 가까웠다. 손에 쥐어졌던 얼마 안 되는 자립정착금이 눈 녹듯 사라지는 동안, 내가 마주한 서울은 '인서울'을 했다는 얄팍한 안도감을 비웃듯 서늘하기만 했다. 밥을 먹는 건지 눈물을 삼키는 건지 분간이 어려운 짠기 서린 혼밥시간이 이어졌다.


당장 다음 달 관리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네 마트에서 캐셔 알바를 시작했다. 마트 로고가 찍힌 초록색 조끼를 입고 서 있으면 사람들은 다양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곤 했다.

“아줌마, 봉투 좀 그냥 줘요”, “저기요, 잔돈 좀 바꿔주세요”,

“이모, 이거 왜 이리 비싸?”, “아가씨, 이거 좀 버려줘.”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입고 있는 옷과 서 있는 위치만으로 나를 아무렇게나 지칭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계산대 앞에 선 스무 살의 나는 아줌마가 되고, 이모가 되고, 아가씨가 되어 “저기요”라는 부름에 일일이 응답하며 월급날만을 기다렸다.


두 번째로 찾은 알바는 콜센터였다. 단순히 전화를 받고 안내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노동은 어떤 폭력이 날아올지 예측할 수 없는 현장이었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는 항의부터 혼자 사는데 외롭다는 불필요한 고백, 무작정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떼를 쓰는 요구까지. 하루 몇백 통씩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헤드셋을 벗을 때면 귀보다 먼저 마음이 얼얼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샌드위치 판처럼 감정을 기계적으로 소모해 낼 때마다, 가난이라는 조건이 내 존재를 얼마나 쉽고 초라하게 마모시키는지, 스스로가 껍데기처럼 느껴지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내게도 꿈은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떳떳하게 잘 벌어서,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어도 보육원에 남은 동생들이 먹고 싶어 하는 간식을 양손 한가득 사 들고 찾아가는 언니가 되고 싶었다. 아끼는 동생에게 깨끗하고 예쁜 메이커 신발을 선물하는 그런 든든한 언니가 되고 싶었다. 손에 쥔 것 없이 정서적·물질적 빈곤 속에서 하루아침에 어른이라 불리며 세상으로 던져졌지만, 가난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삶 아래 깔리듯 존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아주 아주 높았다. 진로로 가닥을 잡아보려 했던 메이크업 기술마저 결국엔 학연과 지연이라는 높은 벽과 목돈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깊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이쯤 되니 어디 저 멀리 워킹홀리데이라도 떠나서, 없이 자랐다는 티 같은 건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버릴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이틀을 살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던 이십대 청년_2008  

현실에 아무런 대책도, 내 불안을 온전히 들어줄 어른도 없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던 상경 5년 차. 서울에 올라온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무얼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학원도 다니고 일도 해보았지만 손에 쥔 것도, 가방끈도 짧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려움을 곱씹던 즈음, 자립관에 들어온 홍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스펙 없이 먹고살자'라는 슬로건. 가방끈도 자격증도 없는 내가 정말 먹고사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까, 거대한 물음표를 가득 품은 채 면접장으로 향했다. 2011년 2월의 추운 겨울, 첫발을 디뎠던 곳은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하자센터(공식 명칭: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였다. 입시 경쟁과 기존의 학교 체제에서 비껴 선 탈학교 청소년이나, 자립의 기반이 약한 청소년·청년들에게 직업 체험과 교육, 연대의 장을 제공하는 공간. 무엇이든 해보자, 하자!라고 해서 ‘하자센터’였는데 센터 앞에 내려주던 기사님께선 “하자? 이름이 뭐이래, 어디 흠이 있는 건가?” 라고 하셨다. 흔히들 이름 따라 간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해석은 각자가 경험한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붉은 벽돌이 차곡차곡 쌓여 네모하고 단단하게 서 있던 하자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주한 느낌은 생경함 그 자체였다.


다짜고짜 나보다 몇십 살은 많을 것 같은 어른에게 별명을 부르라고 하질 않나, 보육원에서 십수 년을 같이 산 사이에도 꼬박꼬박 언니 동생을 구분해 온 내게 평등한 관계를 말하며 '별칭'을 쓴다는 문화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타인의 별칭을 부르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지만, 타인이 나를 이름이 아닌 별칭으로 부르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오글거리고 낯간지러운 별칭 문화에 어색하게 발을 들이면서도 동시에, 내 안에선 빠릿한 직감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이곳은 안전할지도 몰라’

고민 끝에 고른 나의 별칭은 바로 '단미'였다. 단미는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쓰지만, 당시엔 스스로 이름을 부여하면서도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다보니 소풍가는 고양이 창업을 하며 밥을 짓는 일을 하니 '쌀은 달다', '밥은 달다'라는 의미를 담아 붙였다며 부연을 하곤 했다. '은혜를 안다'는 뜻의 본명 은지(恩知)는 잠시 접어두고서, 스스로 정한 ‘단미’로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하자센터에서의 새로운 시작이 실감 났다.


하자센터 벽면 곳곳에는 ‘하자의 7가지 약속’이 붙어 있었다.

  1.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해야 하는 일도 할 거다
  2. 나이차별, 성차별, 학력차별, 지역차별, 인종차별 안 한다
  3. 어떤 종류의 폭력도 행사하지 않을 거다
  4. 내 뒤치다꺼리는 내가 할 거다 /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5. 정보 때문에 치사해지지 않을 거다 / 정보와 자원은 공유한다
  6. 입장 바꿔 생각할 거다 / 배려와 친절
  7. 약속은 지킬 거다 / 못 지킬 약속은 안 할 거다


독점된 정보나 권력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선명했지만, 그중에서도 내 가슴을 깊게 흔든 건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약속이었다. 한평생 가난과 출신, 학력과 신분의 차별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며 살아왔던 나에게 그 문장은 거대한 안도감을 선사했다. 이곳에서는 내가 어떤 말투를 쓰든, 내 외모가 어떠하든, 대학을 가지 않았든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스스로 미래에 참여하는 청소년 문화를 만들겠다는 하자의 비전처럼, 까마득한 미래라 할지라도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겠노라 작정한 내 마음의 단단한 뿌리는 어쩌면 그 선언들이 준 안도감 속에서 비로소 빚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자와 소고를 통해 타인 앞에서 내 삶을 꺼내기 시작했다-2012년  

소풍가는 고양이는 하자센터에서 시작한 프로젝트 이름이었다. 프로젝트 이름에 붙은 단어.

‘비진학 청(소)년.’ 세상은 대학에 가지 않은 나를 늘 ‘미(未)진학자’라 불렀다. 진학하지 ‘못한’ 사람, 남들 다 가는 궤도에서 도태되거나 미달된 사람이라는 낙인. 하지만 그곳에서는 ‘미진학’이 아니라 ‘비(非)진학’이라 했다. 대학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고, 진학하지 않는 삶 또한 당당한 하나의 선택이자 주체적인 경로일 수 있음을 말해주는 언어. 결핍이나 실패가 아닌 존엄의 언어로 나를 불러준 그 소박한 단어 하나가,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에 맺혀 있던 서러움을 아스라이 녹여주는 기분이었다. 내가 결합한 '연금술사 프로젝트 2기'는 대학에 가지 않은 '비진학', 학교를 그만둔 '탈학교', 그리고 나처럼 보육원에서 자립해 나온 '탈시설' 후기 청소년들과 하자센터의 길잡이 교사(판돌)들이 모여 삶의 '시작점'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연금술사 프로젝트 1기는 사회적기업 인턴십으로 연계를 하기도 했지만, 거창하고 멋진 사회적기업 인턴십은 당장 생계비가 급하고 소속감이 없던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꿈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돈과 자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결론 끝에, 연금술사 2기는 직접 먹고살 일터를 일구는 창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게 바로 17세부터 24세까지의 청(소)년과 길잡이 교사가 함께 시작한 친환경 도시락 가게 '소풍가는 고양이'다. 처음엔 웬 도시락 가게인가 싶었다. 내가 맡게 된 역할은 주방 전담이었다. 당시 나는 부엌일이 정말 하기 싫었다. 보육원에서 숱하게 당번을 맡아 노동을 제공하며 '부엌데기'로 살아온 기억은 두 번 다시 부엌일만큼은 하지 않겠단 마음을 먹게 했다. 하지만 길잡이 교사를 포함한 그 누구도 30명~40명씩 되는 대량의 음식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부엌데기가 되기 싫어 도망쳐 온 자리에서, 결국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나라는 사실. 숙명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여야 했다.


창업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해야 할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많았다. 가령 매일 장을 보고 자전거 배달을 가야 하는데, 나는 자전거를 아예 탈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 보육원 오빠가 자전거를 가르쳐주다 내가 너무 겁을 내자 "너에겐 안 가르쳐준다"며 포기해 버린 뒤로, 나는 평생 나 자신을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라는 틀에 가두고 살아왔다. 하지만 소고에서는 별수가 없었다. 매일 장을 봐야 했고, 배달을 가야 했다. 걸어서 가기엔 멀고 운전은 하지 못하니 어떻게든 자전거를 타야 했다. 타의가 아닌 자의였다. 도시락 준비를 마치고 짬이 날 때마다 틈틈이 골목 어귀에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고작 땅에서 30센티 발을 뗐을까, 페달 위 올린 두 발, 자꾸만 양옆으로 흔들리는 온몸,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손, 마치 어느 한 곳도 내 몸이 아닌 양 따로 노는 듯했다. 어찌나 겁이 나던지 고작 한 바퀴를 구르고 멈추고, 또 구르고 멈췄다. 넘어지기도 셀 수가 없었다.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도 끝까지 일어나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 어릴 적 보육원 원훈이 문득 떠올랐다. 보통 가정집에 가훈이 있듯, 우리가 자란 보육원에도 원훈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달리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였다. 멈추지만 않으면 쓰러지지 않는다는 뜻이었겠지만, 문득 나와는 상관없는 허황된 문장, 꼬투리를 잡고 싶은 문장으로만 들렸다. 그렇게 순전히 생존을 위해 독학으로 자전거를 배웠다. 지금 서울시 공유 자전거 따릉이 정기권을 뽕뽑으며 달리는 삶의 즐거움은 바로 그 시절 소풍가는 고양이에서 시작되었다. 탈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가둔 틀을 몸으로 부딪쳐 깨부수었을 때 얻은 그 효능감은 내 삶을 지탱하는 거대한 힘이 되었다.

소풍가는 고양이의 자전거이자 나의 첫 자전거, 수많은 물건과 사람을 태웠다_2011년  

일터에서의 부엌 노동은 참으로 징글징글했다. 50인용 대형 압력밥솥이 칙칙칙 숨 가쁘게 소리를 내며 돌다가 꺼지기 무섭게, 김을 빼고 다음 솥을 올려 또 밥을 짓는다. 수십, 수백 개의 계란을 깨고 풀고, 붓고, 만다. 층층이 탑으로 쌓은 수십 개의 계란말이. 망원동 월드컵 시장에서 사온 비름나물 다섯 봉지를 씻고 데쳐 찬물에 헹궈 물기를 꼭 짜낸다. 커다란 스텐볼에 비름나물을 담고 된장, 참기름, 다진 마늘로 간을 해 조물조물 무친다. 소풍가는 고양이 도시락은 기본 3단으로 구성을 했다. 1단은 흑미나 검은콩을 넣은 솥밥, 2단은 김치와 연두부, 나물, 계란말이 등으로 구성한 밑반찬 4종, 3단은 메인 메뉴로 들어간다. 소풍가는 고양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메인 메뉴는 고양이가 '산' '들' '바다'로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떠난다는 뜻이다. 산은 버섯스테이크, 들은 제육볶음, 바다는 오징어볶음이다. 정말이지 셀 수 없이 볶고 지지고 조려냈다. 음식을 다 만들고 나서도 일은 끊이지 않았다. 주방에 갇혀 끊임없는 설거지와 정리, 다음 재료 밑작업을 하다 보면, 바깥으로 배달 나가는 동료의 뒷모습이 괜스레 얄미워 보이기도 했다. 차 타고 가면서 쉬겠다 싶고, 나보다 쉬워 보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얄팍한 마음과 미움이 불쑥 솟았다. 부엌을 지키고 있는 내 모습조차도 왜 그리 싫증이 나고 밉던지... 우리의 목표대로 굶고 살 걱정은 한순간도 한 적이 없지만, 나가고 남은 반찬을 끼니로 자주 먹다 보니, 나는 지금도 소고의 메인 메뉴 산(버섯스테이크/새송이볶음), 들(제육볶음), 바다(오징어볶음)는 먹지 않는다.


노동의 한계와 책임을 온몸으로 터득했던 잊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바로 '7.27 주먹밥 사태'였다. 우면산 산사태가 났던 2011년 7월 27일, 서울시에서 청소년 행사로 주먹밥세트 600인분이라는 대형 주문이 들어왔다. 당일에 소화하기엔 턱없이 무리인 수량이라 며칠 전부터 꼼꼼하게 준비하고 챙겼다. 정말이지 주먹밥 공장처럼 찍어내듯 만들어 간신히 배달 시간을 맞춰 완성했다. 한데 그날 서울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도로가 완전히 마비가 되어 버렸다. 배달 시간은 속절없이 지연되고, 사방이 막힌 배송 탑차 내부의 열기와 습기, 식힌다고 식혀서 넣었지만 차가운 피망과 뜨거운 밥이 섞인 햄주먹밥이 이동 중에 상해버렸다. 제시간에 도착하지도 못했을뿐더러 쉬어버린 밥. 전량 반품 통보가 떨어지고 아침에 보낸 주먹밥이 고스란히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노란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끝없이 차고, 또 찼다. 1200개의 주먹밥을 다 봉투에 담아 버리고 가게 뒤편 놀이터로 달려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수없이 사과를 전하고 책임을 다하려 했지만, 그날의 절망감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7.27 사태는 우리를 깨뜨리는 대신 결속시켰다. 다 함께 모여 향후 대처 방법을 논의하고, 재료의 전처리 방식과 하절기 위생 관리,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주문량의 한계를 냉정하게 확인했다. 억울함에 눈물을 쏟았던 그날, 우리는 비로소 노동의 엄중함과 '감당'이라는 진짜 배움을 터득했다.


가게라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따박따박 월급 받는 곳이 제일 좋다"던 자영업자들의 한탄이 뼛속 깊이 이해되었다. 말로만 책임지는 구조가 아니라 하루하루 들어오는 주문 전화 한 통으로 가게의 생존을 꾸려가야 했기에, 장사가 안 되는 날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실질적인 고민과 불안을 달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고민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시절 우리 일상에는 이상한 풍경이 하나 있었다. 당장 도시락 하나라도 더 싸서 매출을 올려야 숨통이 트이는데, 일하다 말고 손에 쥔 칼과 팬을 내려놓은 채 꾸역꾸역 인문학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던 것이다. 멀리 전남 해남까지 가서 고정희 시인의 생가 마루에 앉아 시를 낭독하거나, 하자센터에 모여 3만엔 비즈니스, 또 하나의 문화에서 진행하는 강의를 듣곤 했다. 하루 6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삶과 공부를 챙긴다는 원칙, 여성인권과 자연, 생태 등의 끊이지 않는 인문학... 당장 끼니 벌기도 바쁜데 왜 이런 걸 시키나 싶어 야속하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노동과 공부를 병행하던 일학습터 소고의 시간은 내가 단순히 소소하게 소모되는 부품이 아니라 내 노동의 가치와 세상을 읽어내는 주체로 서게 만들어준 찐 자산이 되었다.

어릴 적 보육원에서 잠시 보내주었던 피아노학원의 결실, 500인분 주문이었나보다_2011년  
구럼비 펑 반대! 수 많은 사회 의제들을 소고를 통해 접하기 시작했다_2012년
밥 지을 때 마다 나오는 쌀뜨물 버리지 않고 친환경세제 만들기_2013년  
도시락 싸는 기쁨, 밥 짓는 기쁨_2012년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다’, ‘자신의 상태를 밝힌다’, ‘지켜준다’는 일터이자 학습터에서 쌓은 우정의 약속을 나누며, 우리는 수혜자가 아닌 스스로 일터의 판을 짜는 주체로 서고자 했다. 하자센터의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소풍가는 고양이'는 이후 하자센터로부터 독립해 예비 사회적 기업과 혁신형 사회적 기업을 거치며 진짜 회사의 모양새를 갖추어 갔다. 하지만 현실의 기업이라는 벽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일터가 생존하기 위해 매출 증가와 효율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릴수록, 청소년과 어른이 대등하게 성장하고자 했던 애초의 꿈은 자본주의의 잔인함과 끊임없이 부딪혔다. 서로의 형편과 생존을 살피던 부드러운 회의 자리는 회사에 어떻게 기여할지를 다그치는 빡빡한 자리가 되어갔고, 효율적인 서비스를 요구하는 시장의 통제 속에서 동료들의 표정은 점차 피로에 젖어갔다.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동료 어른과 함께 일터를 만들어가려는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업이라는 자본의 속성 속에서 그 태도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요원하고 힘겨운 일인지, 우리는 몸으로 부딪히며 한계를 마주해야 했다.


고된 노동과 현실의 벽 앞에 처음 10여 명 남짓이었던 동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나갔다. 결국 길잡이 교사 둘과 나, 그리고 동료 한 명, 우리 넷만이 덩그렇게 남게 되었다. 우리는 농담처럼, 그러나 뼈있게 무시무시한 약속을 했다. "이제 먼저 나가는 사람은 손가락을 두고 가자."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약속을 가장 먼저 깨버린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였다. 선교를 가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나는 도망치듯 소고의 문을 열고 나왔다. 하자센터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수없이 노동의 가치를 살폈지만, 내 안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다 결국 나는 평생 부엌데기로 남는 게 아닐까.' 기업이 되어가는 일터의 과부하와 부엌데기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지독한 무서움이 나를 짓눌렀고, 나는 동료들을 뒤로한 채 달아나듯 사직서를 제출하고 소고를 떠났다.

안녕 나의 첫 직장, 배움터, 일터, 삶터. 굿-바이 소고_2011~2019년

비록 두려움에 쫓겨 도망치듯 나왔지만, 소풍가는 고양이에서 밥을 짓고 인문학을 배우며, 삶을 나눴던 그 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조가 잘못된 것이라고, 내 삶은 보통의 모양과 다를 뿐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던 그곳의 경험은 내 마음밭을 고르게 다져놓았다. 시간이 흘러 비로소 도망친 자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안에서 질문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비빌언덕이 될 수 있을까.'
'부엌데기가 될까 봐 무서워 도망치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어른들처럼, 누군가의 삶에 마음 한쪽을 기꺼이 내어주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받은 온기를 다른 경로로 확장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세상의 다양한 삶의 경로를 보여주는 창이 되겠노라 다짐하며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괜찮을까? 하고 싶은 일 계속해도_2023 하자센터 인터뷰 집
비빌언덕의 한 마디
단미의 비빌언덕이 되어준 이들의 이야기를 전해요

 ꩜ 상민 

길 건너 은지가 보인다. 등딱지 같은 가방을 멘 채 손을 흔들면서 위치를 알린다. 계엄이 선포된 밤, 은지의 가방은 여느 때보다 묵직했다. 먼저 국회 앞에 가 있을 친구들을 위해 한가득 짐을 챙겨 왔다고. 내가 아는 은지는 항상 주변을 구하는 일이 우선이다. 특히 먹여 살리는 데 진심이고, 나 역시 은지의 마음을 받으며 매번 주린 속을 달래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면, 같은 날 내가 집을 나서며 챙긴 것이라고는 고작 에너지드링크와 삼각김밥이 전부였다. 죽기밖에 더 하겠냐며 가볍게 대교를 건넜는데, 어쩐지 은지의 그릇에 비해 한참 작았던 것 같다. 은지는 광장의 유명인사다. 종종 은지와 집회에 다니면 세상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실감한다. 방금까지 점처럼 보이던 이들이 은지를 따라 선으로 이어졌다. 몇 걸음 걷다 멈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남들이 홀로 연단 위에 올라 발언할 때, 은지는 아예 대규모 합창단을 이끌고 무대를 채웠다. 이따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기도 했다. “어떻게 했어?” 그럴 때마다 은지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게 놀랍다. 언제든 “사람 잘못 봤습니다” 하고 발 뺄 궁리로 바쁜 나와 달리, 은지는 꼭 한 발 더 깊이 들어가는 편이었다.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 

은지가 처음 비빌언덕 프로젝트를 구상하던 게 엊그제처럼 느껴지는데, 벌써 메일이 수북이 쌓였다. 그 소식을 접하고 나는 실패를 떠올릴 수 없었다. 물론 큰 결심이 필요했겠지만, 이미 은지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이 선했으므로. 아무래도 초과 달성을 기원할 뿐이고, 은지의 다음 행보를 앞질러 기대하게 된다. 한편, 은지와 친구가 된 지도 꽤 오래됐다. 긴 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통해 나는 은지를, 그리고 세상을 이해해 왔다. 그리고 무섭게도 그 이해가 자꾸 나를 흔들었다. 무언가 하거나 하지 않도록. 은지가 훨씬 멀리 닿기를 바란다.

 ꩜ 모모 

동갑친구 단미가 ‘구독형 레터’를 만들겠다고 말했던 8개월 전, 그 용기와 추진력에 속으로 크게 박수 치고 얼른 구독자가 되었다. 단미의 구독형 레터 ‘비빌언덕’은 단순한 구독형 레터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 뉴스레터는 단순한 구독 서비스를 넘어 우리의 삶이 연결되고 연대로 이어질 때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단단해질 수 있는지, 우리의 세상은 어떻게 확장되는지 실험하는 1년간의 현장 기록입니다.' 
‘비빌언덕’이라는 이름에서 엿보이듯, 그리고 위의 소개 문구처럼 단미는 우리 함께 서자, 함께 살자며 ‘연립’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는 레터를 보내온다. 레터의 주제는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아우른다. 집, 가족, 보육원, 엄마, 글쓰기, 그리고 최근엔 외모까지….

내가 첫 에세이를 출간했을 때, 드라마작가였던 지인이 그랬다. 자신은 솔직할 자신이 없어서 드라마 뒤로 숨는데, 너는 참 용감하다고.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독자로서 단미의 글을 읽으며 어렴풋이 알겠다. 내 친구야, 넌 도대체 얼마나 강한 용기를 지닌 사람인 거니. 그녀의 레터를 열기 전, 늘 숨을 한번 고른다. 오늘은 또 어떤 문장과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그녀의 글은 놀랍도록 진솔해서, 그 진심에 화답하기 위해선 메일에 쌓여가는 많은 레터들처럼 그저 클릭해서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준비가 되기까지 레터를 며칠간 열지 않은 적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미의 레터는 늘 생각 한 켠에 있었다. 레터의 존재감이라니. 내 친구의 목소리가, 마음이 너무나 진하게 담긴 것이라 그랬을 것이다. 숨을 고르며 레터를 연 후에도 몇 번을 멈추어 곱씹으며 읽었다. 회사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몰래 훔쳤고, 감탄했고, 다 읽고 나서는 먹먹한 마음을 갈무리하느라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삶의 굽이에서 동갑내기 친구가 경험했던 감정의 진폭은 차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단미는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그 순간을 포착했고, 담담한 필치로 전한다. 그 기억을 꺼내고 헤집어 글이란 형태로 보내오는 과정이 또한 얼마나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지는(여기에 글쓰기의 고통은 별개다) 그녀만이 알 일이다. 그녀의 글은 내가 가진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보게 했고, 내가 꿈꾸는 것들에도 질문을 던진다. 당연한 걸 낯설게 보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립’의 정신으로 그 개념을 확장시키고 상상하게 한다. 단미의 글을 읽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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