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이레터(8호)에서는 정지윤 선생님의 글을 만나봅니다. 정지윤 선생님은 앞으로 성인지적 일터 건강에 대해 이야기해 주실 예정입니다. 오늘 오이레터에서는 그 첫번째로 <여성의 노동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노동시간, 젠더를 빼고 말할 수 있다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할까?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모범생 헤르미온느는 자신이 지닌 목걸이 ‘타임터너’로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려 동시간에 열리는 여러 수업에 참석합니다. 덕분에 모든 인간에게 24시간으로 똑같이 주어진 자원인 ‘시간’을 여러 겹으로 겹쳐 쓸 수 있게 됩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똑같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평등하게 활용되지는 않습니다.


시간빈곤

시간빈곤(time poverty, time-poor)은 노동시간과 필수시간을 제외한 자유시간의 부족상태를 말합니다. 노동시간은 유급 노동시간과 가사노동과 자녀돌봄과 같은 무급 노동시간을 포함합니다. 필수시간은 개인위생과 식사와 같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시간빈곤은 자유시간 자체가 양적으로 부족한 경우 (양적인 측면)와 시간사용의 자기결정권이 부족한 경우(질적인 측면)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은 자유시간이 부족하면(money-rich, time-poor), 타인의 노동을 구매해 자유시간을 늘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소득이 부족한 사람은 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해 본인의 자유시간을 희생합니다(money-poor, time-poor)


시간불평등

시간빈곤의 차이는 성별과 연령, 소득과 고용상 지위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표준노동시간에서 멀어질 뿐 아니라, 시간 사용에 대한 자기결정권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저소득층은 장시간 노동으로 소득을 올리면서 자유시간을 희생해왔습니다. 그러나 불안정한 고용 여건 때문에 소득빈곤(money-poor)과 시간빈곤(time-poor) 사이를 오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시간빈곤은 성별, 소득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나타나고 이런 구조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시간 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2017년 수행된 한 연구에서는 자녀와 배우자가 있는 여성 가구주의 경우 유급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중첩되어 시간빈곤율*이 가장 높았습니다.1)

*시간빈곤율은 1주 168시간‘에서 노동관련 시간 (업무·출퇴근·부업)과 가사·돌봄시간 (자녀양육시간, 요리·집안일, 노인·장애가족 돌봄)’을 뺀 자유시간을 기준으로 계산됨


여성의 노동시간은 남성보다 짧다

세계노동기구는 주당 최대 48시간의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잡고 있습니다. 이 기준은 1930년에 정해졌고, 현재도 많은 국가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전일제 유급노동은 남성이 전담하고 가정 내 돌봄 노동은 여성이 전담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황이 변하여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OECD 국가에서 여성의 유급노동 시간은 남성보다 주당 10시간 짧습니다.  


여성의 짧은 노동시간의 의미

사실 여성의 짧은 유급노동 시간은 노동시장 내에서 불리한 처지를 반영하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장시간 근무는 대개 숙련직, 보수가 좋은 <좋은 일자리>와 관련이 있는 반면, 여성, 저숙련 노동자들은 대개 저임금, 노동 시간이 짧은 시간제 일자리에 근무하게 됩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돌봄과 가사노동이라는 책임을 안은 채로 노동시장에서 경쟁해야하는 처지에 놓이는 셈입니다.


여성친화적 일자리의 효과

더욱이 지난 10여년 간 한국 사회에서는 저출산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성친화적 시간제 일자리를 늘려온 바 있습니다. 여성에게 가정에서 양육과 돌봄을 보장하기 위해 파트타임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제 일자리는 임금수준이 낮고 쉴 권리, 퇴직금 등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적 울타리 밖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여성 노동자를 주변화시킵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단시간 근로자>란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이 그 사업장에서 같은 종류의 업무에 종사하는 통상 근로자의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에 비하여 짧은 근로자"를 의미하고, 초단시간 근로자는 1주 동안의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노동자를 뜻합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초단시간 노동자(주당 소정근로시간 15시간 미만)에게는 1주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보장하지 않아도 되고, 연간 15일의 유급휴가를 줄 필요가 없으며 2년을 초과하여도 기간제 근로자로 채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고, 별도의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외에도  1개월간 소정근로시간이 60시간 미만인 노동자는 <국민연금법>, <국민건강보험법>, <고용보험법>의 직장가입자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Photo: iStock Getty Images. Hyde E, Greene ME, Darmstadt GL. Time poverty: Obstacle to women's human rights, health and sustainable development. J Glob Health. 2020 Dec;10(2):020313. 
노동시간 상한규제의 효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2018년 7월에 도입된 ‘주 52시간제’(1주 기본 노동시간 40시간, 1주 최대 12시간 연장근로)는 가정에서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남성 노동자의 가사 및 자녀 양육 및 돌봄시간 증가수준이 여성의 증가수준보다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만약, 장시간 노동을 부추기는 제도가 다시 시행된다면, 출산한 여성에게 엄마 역할을 강요하면서 남성에겐 아빠 역할을 배제하는 성별 분업 구조는 다시 견고해질 지도 모릅니다.

한국사회는 노동시장의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하며, 가사와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우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시간 노동은 여성 노동자의 돌봄 노동 부담을 가중시키고, 저임금과 고용이 불안정한 질 낮은 일자리로 여성들을 더욱 밀어넣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노동시간 예측가능성의 중요성

한편 노동시간의 길이 뿐 아니라 예측 가능성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이소진, 갈라파고스 2021)은 2018년 1월부터 일방적으로 주 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인 대형마트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주 52시간 상한제는 2018년 7월부터 공공기관, 공기업,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작되며 ‘노동시간 단축으로 삶의 질을 개선시켰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반면 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중년여성들의 노동시간 단축은 실제로는 ‘준비시간을 단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노동시간은 감소했지만 인력은 늘리지 않으니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시간은 더 잘게 쪼개져 출퇴근 시간이 10분 단위로 정해졌습니다. 근무 스케줄은 시작 2~3일 전, 늦으면 하루 전에야 사내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공지되었습니다.
여성의 시간이 가사와 돌봄을 위주로 상상되는 사회에서 중년 여성들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운 후 노동시장에 재진입합니다. 그녀들은 ‘이런 탄력적인 근무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였고, ‘그녀들의 유급노동시간 외의 시간은 비어있는 시간’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휴게시간으로 인해 계산원들은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다음 업무에 투입되었고 근무패턴을 예측할 수 없게 되면서 계산원들은 ‘섬’처럼 일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시간 그리고 성평등

세계경제포럼(WEF)이 2022년 7월 발표한 성 격차 지수(1에 가까울수록 성평등)는 한국은 0.689로 146개국 중 99위를 차지했습니다.

1위 아이슬란드  0.908
2위 핀란드  0.860
3위 노르웨이  0.845
99위 한국  0.689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공개한 2021년 연간 노동시간을 보면 한국은 1,915시간으로 조사대상 OECD 회원국 36개국 중 네 번째로 긴 연간 노동시간을 보여주었습니다.

1위 독일 1,349시간
OECD 평균 1,716시간
17위 일본 1,607시간
33위 한국 1,915시간

노동자의 일상은 ‘유급으로 일하는 시간’과 ‘휴가’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급노동시간 외의 시간은 텅 비어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여성은 가사와 돌봄의 전담자로, 남성은 모든 시간을 회사에서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구조는 남성과 여성을 각기 다른 선택지, 딜레마에 처하게 합니다.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일자리, 통제권 없는 노동시간의 문제가 어떻게 젠더화되어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남녀모두를 위한 노동시간 설계가 필요합니다.

글쓴이: 정지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여성노동건강권팀)

참고문헌
이번 주는 제 69차 대한직업환경의학회 봄학술대회가 있습니다.
5월 12일(금요일) 13:00-18:00 
가톨릭대학교 성의회관 1층 마리아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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