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신학자,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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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Special Letter 💌

#46 안셀무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다

#47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과 철학에 관하여

#48 둔스 스코투스, 신학은 실천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EVENT 발표  


안셀무스에게는 그의 모든 신학을 특징짓는 자신만의 지성적인 의제가 있었다. 그는 이를 1) 이해를 추구하는 2) 믿음이라고 불렀다. 이를 통해 그는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는 이성을 추구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살피고 증명했으며, 성경이나 교회나 다른 기독교 신학자를 의지하지 않았다. (이전 호 보기)

“따로 또 같이”, “바쁨과 고요함” 사이를 가로지르는 안셀무스의 삶을 읽으며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순례 여정이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를 궁리하게 됩니다. 경험한 만큼, 걸어본 만큼 보이는 신앙의 깊이를 안셀무스를 통해 곱씹게 되네요. _홀든 독자님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습니다."
철학 개론 시간에 교부철학을 다루면서 언뜻 알게됐던 분인데 이렇게 B.diter님을 통해서 보다 깊이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_네모난후라이 독자님

홀든, 네모난후라이 독자님 메일로 성함, 주소, 연락처를 보내 주시면
책 《디트리히 본회퍼 설교집》(출간예정)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독자님, 안녕하세요.

복 있는 사람 편집자 B입니다.


하루는 신학교와 신학대학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의 이름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어떤 곳은 신학교Theological College(Seminary)라고 되어 있고, 어떤 곳은 신학대학교Theological University라고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신학대학교는 신학교보다 종합적이고 일반적인 학문들을 함께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학교는 주로 각 교단에 속한 신학자들을 두고 공부한다면, 신학대학교는 여러 철학자들도 함께 다룬다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살았던 시대에도 신학을 공부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묵상을 위한 공부, 또 하나는 비교적 종합적인 공부 방법이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종합적인 공부를 선호했고, 그중에서도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신학자입니다. 그는 소위 신학과 철학을 접목시킨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든 신학을 철학과 접목시켰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아퀴나스의 삶을 돌아보며, 신학과 철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47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과 철학에 관하여

1224년쯤,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서,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족들은 막내아들인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관심이 많았고, 장차 고위직에 오를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며 질문하기도 했는데, 이 질문으로 인해 수도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그는 나폴리 대학으로 옮겨 공부하게 됩니다. 그는 여기에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이 이야기가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퀴나스 당시 학문의 세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 이슈였습니다. 이전까지는 플라톤 철학이 주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한 뒤부터는 사상의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글들이 관념적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그의 사상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인용하는 것을 불경하게 여기는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이라는 두 학문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폴리 대학에서 도미니크 수도회를 알게 되었고, 그 수도회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수도회는 세워진 지 오래되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 어떤 곳보다 연구를 가장 우선시하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수도원이 묵상을 위한 연구를 추구했다면, 도미니크 수도회는 대학에서 가르치기 위한 연구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가입했고,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연구에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그는 그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성경을 연구하는 것에 힘썼습니다. 가족들은 이 소식을 듣고 언짢아했고, 아퀴나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가족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 아퀴나스를 회유시키려 했습니다.

 

가족들은 그를 납치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를 가두고 선택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열망을 무너뜨리기 위해, 가족들은 그가 갇혀 있는 방에 여인을 들여보냈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강경했습니다. 그는 아무 옷도 입지 않은 여인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손을 휘저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가족들은 그를 회유시킬 수 없음을 느꼈고, 결국 그가 하고 싶은 대로 공부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파리를 지나 쾰른에 이르러 알베르투스를 만났고 그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게 됩니다. 알베르투스는 그의 지적인 잠재력을 알아보고 “황소의 울음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질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황소는 덩치가 크고 다소 우둔해 보이는 아퀴나스의 별명이었습니다.)

 

아퀴나스는 당시에 박사가 되기에 어린 나이였지만, 알베르투스는 그에게 박사가 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덕분에 아퀴나스는 박사 과정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 여러 학문적인 글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의 신학적 소양은 더 깊어졌고,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이교도 논박 대전》도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마친 뒤, 그는 도미니크 수도원의 연구실로 돌아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신학대전》의 얼개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이후에 로마 가톨릭 신학의 교과서가 되었고, 성경과 나란히 두고 읽을 정도의 책으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아퀴나스의 주된 공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와 접목시키고, 그 철학을 기독교에 가져오는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신학대전》 집필을 거의 마칠 무렵, 그는 특별히 성만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글을 마친 이후, 1273년 12월 수요일 미사 때 아퀴나스는 어느 신비한 체험을 하나 경험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이 체험 이후에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것입니다. 아퀴나스는 이 체험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쓴 글들이 모두 지푸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274년 2월, 아퀴나스는 회의에 가는 길에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회복을 위해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겼지만, 40대의 이른 나이에 그는 세상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퀴나스의 죽음을 기념하며 《신학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아퀴나스의 앞선 저작들로부터 관련된 자료들을 발췌해 책의 뒷부분을 채워 넣었습니다. 그렇게 《신학대전》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신학대전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을 쓰며 간략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간략하게 영어 번역서 기준으로 3,000쪽이 넘는 분량의 다섯 권)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는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룹니다.

 

기도는 소리 내서 해야 하는가? 신체의 각 부분마다 영혼이 있는가? 그리스도는 어떤 방식으로 지옥으로 내려가셨는가? 그의 육신도 함께 지옥으로 내려가셨는가? 부활할 때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있을 것인가? 모두 남성으로 부활할 것인가? 혹은 투명하게 될 것인가?

 

아퀴나스는 논제나 질문과 함께 각 항목을 시작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고, 그다음 거기에 또다시 재반론을 제시합니다. 이처럼 여러 반론이 오간 다음에, 그는 해당 주제에 대한 자신의 최종적인 판단을 대답으로 제공하며 마무리 짓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아퀴나스가 다루고 싶은 주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1) 하나님과 창조 2)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께 인간이 나아감 3)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인 그리스도. 이 세 가지 주제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최후의 영광까지 이어지는 흐름으로 보입니다.

이교도 논박 대전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책 《이교도 논박 대전》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책은 《신학대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해 피조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반으로 신학을 전개하는 방법도 유사합니다.

 

한 가지 차이점은, 《이교도 논박 대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퀴나스는 계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에 관해 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그는 삼위일체, 성육신, 성만찬, 부활, 최후의 심판과 같은 개념을 철학과 구분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아퀴나스가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철학을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신학만의 고유한 영역을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대전》에서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가장 앞부분인 ‘신학과 철학에 관하여’에서 다룹니다. 그는 여기에서 이성의 역할은 진리가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정도의 지식을 주는 정도라고 주장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신학적 제재를 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철학이 자연적 영역을 다룬다면, 신학은 초자연적 영역을 다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성과 철학은 각각의 자리가 있고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신적 계시를 통해 인간 이성을 넘어서는 특정한 진리가 인간에게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정도의 지식을 줄 뿐이라고 아퀴나스는 대답한다.
_《처음 읽는 신학자》, 마이클 리브스

편집자 B의 시선

1273년 12월 수요일 미사에서 아퀴나스는 신비를 경험했습니다. 이 신비 체험이 일어난 시기는 성만찬에 관한 연구가 끝난 다음이라는 점이 유의미하게 다가옵니다. 이 사건 뒤에 아퀴나스는 글쓰기를 거부했고, 자신이 썼던 모든 글들이 허망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퀴나스가 경험한 이 신비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도 자신이 썼던 성만찬에 관한 글들을 뛰어넘는, 그런 경험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퀴나스는 자신이 썼던 책 《이교도 논박 대전》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며, 성만찬은 신학의 영역에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서술합니다. 성만찬은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적인 서술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만찬을 연구하다가 글을 마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성만찬의 의미를 인간의 언어로 다 풀어내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썼던 모든 글들이 지푸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가 신학에 관해 썼던 글들은 최소한 3,000쪽이 넘는 분량으로 다섯 권, 총 15,000쪽이 넘는 분량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었으면 이처럼 많은 글을 썼을까요. 어쩌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생 글을 쓰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으로 살아간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수도원에 맡겨져,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물었던 아퀴나스의 한마디 말. 그 말이 소명이 되어 평생토록 그의 귓전에 울려 퍼졌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래에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READER》에서 아퀴나스의 가장 짧은 글을 발췌해 가져왔습니다. 특별히 맥그래스의 설명과 논평, 생각해 볼 물음들을 함께 첨부했습니다. 아퀴나스에 관심이 생긴 독자님은 한번 읽어 보아도 좋겠습니다. ;)

📜 신학이란 무엇인가 READER _토마스 아퀴나스: 하나님의 전능

위대한 스콜라주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전능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매우 영향력 있는 설명을 제시했다. 그 설명에는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없다’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죄는 결함이고 따라서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 결함을 지닌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지 않고,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 없으시다. 아퀴나스가 1265년 라틴어로 쓰기 시작해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성하지 못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중세 신학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원서 본문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게 느껴진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라고 말할 때,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전능하시다고 말한다면, 그런 전능 이해는 순환론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죄를 짓는 것은 완전한 행위에 속하지 못한다. 따라서 죄를 지을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 행위에서 불완전할 수 있다는 말이며, 이것은 전능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이다.……모순을 함축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전능성과 관계가 없다. 존재한 적이 없는 과거라는 것은 모순을 함축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앉아 있는 동시에 앉아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며, 그처럼 소크라테스가 앉아 있었던 동시에 앉아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가 앉아 있었다고 긍정하는 것은 과거 사건을 긍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가 앉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은 있지 않았던 일을 긍정하는 것이다.

 

논평

이 글에서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쟁점을 탐구한다. 그중 하나는 비모순율인데, 흔히 ‘하나님은 네모난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표현된다. 그런 일은 제안 자체의 논리적 모순 때문에 일어날 수 없다. 아퀴나스는 앉아 있는 동시에 앉아 있지 않은 사람을 예로 들어 이 쟁점을 탐구한다. 더 중요한 것으로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 있으신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언뜻 보기에 이 질문은 긍정으로 답해야만 할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답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런 답은 부당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 본문에서 아퀴나스는 독자들에게 이 논점을 설명한다.

생각해 볼 물음들❕

  1. 왜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믿었는지를 여러분의 말로 정리해 보라.
  2. 죄의 본질 중 어떤 면이 아퀴나스로 하여금 이런 결론에 이르게 했는가?
  3. 이 본문에서 탐구하는 쟁점을 토대로 삼아 ‘하나님은 하나님도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추를 만드실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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