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32회 (2021.12.01) 안녕하세요. 번역가이자 작가, 신유진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제가 사는 곳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날씨 이야기나 하는 싱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실까요? 네, 날씨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제가 아는 가장 다정하고 산뜻한 인사거든요. 거기, 그곳에도 눈이 왔을까요? 안부 대신 날씨를 묻습니다.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리라는 설렘으로, 다른 풍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그러고 보니, 지금 시를 건네는 제 마음과 꼭 닮은 것 같네요. 날씨처럼 나누고 싶은 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신유진 번역가가 사랑한 첫번째 시💛 안녕 스페인에서 온 엽서에는 흰 벽에 햇살이 가득했고 맨 마지막 안녕이란 말은 등짐을 지고 가파른 골목을 오르는 당나귀처럼 낯설었다. 내 안녕은 지금 어디 있는가 가만히 몸을 만져본다. 두꺼운 책처럼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그 어떤 열렬함도 없이 구석에서 조용조용 살았다. 오늘 내게 안녕을 묻는 이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에게 수몰된 내 마음 보였던가. 내 몸의 그림자는 구석만을 사랑하는지 구석으로만 자란다는 말을 했던가. 내 안녕은 골목 끝에서 맨드라미를 만나 헛꿈들을 귓밥처럼 파내던 날 죽어버렸다고, 물은 결국 말라서 죽는다고 말했던가. 나는 누군가에게 안녕이란 말을 했던가. 더는 물어뜯고 싶지 않다고 조용히 말했던가. 안녕을 묻는 일은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 같다고, 물속에 대고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리하여 물속에 혼자 집 짓는 일이라고 말했던가. 안녕, 그 말은 맨발을 만지는 것처럼 간지러웠지만 목을 매고 싶을 만큼 외로워진다고 비명처럼 말했던가. _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스페인에서 온 엽서의 맨 마지막 줄을 상상해봅니다. 동그랗고 반듯한 글씨로 적은 ‘안녕’, 등짐을 지고 가파른 골목을 오르는 당나귀처럼 낯선 그 인사는 내게 오겠다는 약속이었을까요, 영영 오지 않겠다는 통보였을까요. 헤어질 때도 만날 때처럼, 만나서도 헤어질 때처럼. 그러고 보니 ‘안녕’이란 말은 조금 이상합니다. 누군가 내게 건네는 안녕에 수몰된 마음을 들켜본 적이 있습니다. 물속에 대고 이름을 부르면 소리를 빼앗기지요. 물속에 지은 집에서는 아무도 살 수 없어요. 그래서 안녕은 자꾸 구석으로 내몰리는 모양입니다. 구석에 웅크린 그림자가 되는 날, 차라리 구석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날, 저는 이 시를 스페인에서 온 엽서처럼 읽습니다. 손 흔들고 오는 사람과 손 흔들고 가는 사람을 시소에 태우고. 시소가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외로운 건, 만날 때도 헤어짐을 걱정하는, 헤어질 때도 만남을 기대하는 그 이상한 말, ‘안녕’ 때문일 것입니다. 💛막간 우.시.사 소식 올해가 가기 전에 문학동네시인선 라운지를 들러보세요! 문학동네시인선과 제휴한 전국 20여 곳의 동네책방! 💕문학동네시인선 라운지에서는…
💛신유진 번역가가 사랑한 두번째 시💛 늙은 토마토는 고요하기도 하지 거짓말처럼 제목이 바뀌어버린 생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돌린 채 늙는 일에 열중이신 늙은 토마토는 오늘도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 읽는다. 늙는 일도 아직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 비명을 지르고 절벽을 뛰어내리던 날의 열렬함과 다르지 않다고.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 호호 불어 피우던 휘파람 같은 구름이 간다고 쉽게 쉽게 열리는 일. 세상이 붉게 충혈된 눈 속이었을 때 나 더 붉게 붉게 밀어올린 빨강의 이름을 조금씩 잊는 일. 그러나 지금은 늙어가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할 때, 세상 밖으로 자꾸만 몸이 기울어도 당신의 이름을 웅크려 쥐고 이건 다 내가 스스로 원했던 거라고 말할 수 있기를. 입속에서 뜨고 지는 하루를 조용히 우물거리며 물고기처럼 동그랗게 눈 뜨는 일은 당신에게 동의하는 마음 같은 거. 조금씩 어두워지는 저녁 오늘의 죽음이 내일을 열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 즐거운 불안에 대하여. _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우리는 고령화 가족이야.”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 빠지지 않는 농담입니다. 막내가 서른여덟이다보니 마주보면 누가 더 아픈지 경쟁하기 바쁩니다. 티브이 볼륨이 점점 높아지고, 미끄러운 길을 걸을 때는 서로의 손을 잡고도 미심쩍어 몸에 힘을 줍니다. 참으로 귀여운 늙은 토마토들이지요! 얼마 전에는 늙은 토마토 1호의 일기장을 훔쳐봤습니다. ‘토마토에는 견과류와 올리브유’가 적혀 있었어요. 1호의 일기장을 훔쳐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는데요, 그때 거기에는 온통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잃어가는가?’ 그런 질문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토마토가 비명을 지르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던 시절의 이야기지요. 소란스러웠던 토마토의 일기장이 고요해지고 있습니다. 견과류와 올리브유 덕분일까요? 토마토는 요즘 온 마음을 다해 토마토주스를 만듭니다. 늙은 토마토를 만나고 돌아온 날에는 토마토주스를 만들어봅니다. 견과류와 올리브유를 넣고, 살아보니 너무 애쓸 것 없더라는 토마토의 말을 곱씹으면서. 입속에서 뜨고 지는 하루를 조용히 우물거리며 물고기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에게 동의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것이 늙는 일의 시작일까요? 그렇다면 온 마음을 다해 토마토가 되어보겠습니다. 어쩌면 내게도…… 고요가 찾아올지 모르니까요. 📢 다음주 시믈리에를 소개합니다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문보영 시인 다음주에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분은 시인 문보영님입니다. 시집 『책기둥』 『배틀그라운드』, 산문집 『일기시대』 등을 출간한 문보영 시인이 여러분께 권하는 시 두 편을 기대해주세요. 그럼,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