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사이렌의 빛나는 진심

‘요즘 정말 즐겁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주로 친구들과 다같이 어떤 콘텐츠에 빠져 있는 시기에 찾아와요. (이 정도는 오타쿠 아닌 거 맞죠?) 떠오르는 것만 해도 최근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 몇 년 전의 <진격의 거인>, 또견니 <상견니>, 지난 레터에도 적었던 <프로듀스101 시즌2> 등등이 있네요. 그리고 바로 이번달에도 찾아왔습니다.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입니다. (스포 없음!)

1화를 틀자마자 알았습니다. 나는 이 쇼를 사랑하게 되겠구나. 1화는 조금 소름 돋을 정도로 오그라드는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마는 매력이 넘쳐요. 우선 스물네 명의 여자들을 직업별로 나누어 팀을 짜고 그들이 아레나전과 기지전을 펼쳐 서로의 기지를 확보하는 구성이라는 것이 저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그 직업이 스턴트/경호/경찰/군인/운동선수/소방이라면? 호그와트의 네 기숙사 이후 이렇게 심장 뛰는 팀 구성은 처음입니다.

심지어 각 팀 앰블럼을 제작했다? 기절.  

개인적으로 군인팀과 경찰팀을 ‘좋아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고, 실제로 좋아하는 마음을 먹기에도 덜걱거리며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경기를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요. 그래도 그 여자들의 결기에는 어딘지 멋진 구석이 있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더 나아가 나에 대한 확신으로 일단 ‘내가 이겼다’고 우겨보는 승부욕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저는 경쟁 상황이 너무 싫어서 선생님이 ‘좋아하는 맛 사탕을 가져가라’고 해도 뒤쪽에 가만히 서 있다가 마지막에 남은 누룽지 맛을 집는 어린이였으니까요. 지금도 사탕 같은 건 남은 아무 맛이나 먹어요. 하지만 제가 진짜로 갖고 싶은 건 일단 달려나가서 입에 쏙 넣고 보는 어른으로 자라났습니다. 쏙 넣었다가 바로 뱉은 적도 많지만… 원하는 걸 원한다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어디인가요?

사이렌은 이런 성장이 틀리지 않았고 심지어 멋지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게다가 모든 출연자는 저마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신감을 갖고 오래 일하며 성취를 이룬 여자들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뭔가를 큰소리로 주장하고 장애물을 몸으로 돌파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조차 몰랐지만 내가 늘 원했던 걸 누군가 입맛에 딱 맞게 말아준다? 하나씩 있어도 환장하는 요소를 이렇게 한 그릇에 다 때려넣어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냥 바나나 먹는 기영이 되는 거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게다가 이 쇼에는 오버스러움이 없습니다. 뛰어오르고 솟구치고 폭발하는 건 출연자들의 에너지뿐이고 억지 감동 억지 재미가 없어요. 어떤 감정도 연출의 힘을 빌려 과잉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출연자의 행동을 과대 해석하는 자막이나 시도때도 없는 모에화나 지겨움만 불러일으키는 과시도 없죠.

창작자라면, 특히나 이렇게 커다란 주방에 - 넷플릭스 자본력으로 3만 평 섬을 빌려 초대형 세트들을 지었다? - 고급 재료들을 - 천부적인 어그로력의 특전사,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신장 177cm 소방관, 유도 국대인데 이제 귀여운 얼굴을 곁들인... - 차려둔 걸 눈앞에 둔 창작자라면 누구든 기합과 욕심이 생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이렌의 연출은 그 유혹을 이겨냅니다. 이 정도면 정말 사이렌의 유혹이라 할 만한데도 말이죠. 그래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멋짐이 극대화됩니다. 똑같이 멋있는 행동을 해도 있는 힘껏 생색을 내는 것보단 별 거 아니란 듯 쿨하게 지나가는 게 더 멋있잖아요. 물론 ‘아니 몇 번만 더 리플레이 해줘요ㅠㅠ’ ‘왜 슬로우 안 걸어줘요ㅠㅠㅠㅠ’ 하면서 놀란 적도 많지만... 아무튼 사이렌은 그렇게 쿨하게 멋집니다. 그나마 각 에피소드 제목으로 출연진들의 명대사를 넣었다는 게 제작진의 귀여운 자랑인 것 같아요. (우리 출연자들 이렇게 멋지다구!)

멋짐뿐만 아니라 감동을 연출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 이거 맛있네~ 낄낄대면서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주룩 흘린 장면이 세네 번 정도 나왔는데요. 그때마다 당황했던 건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게 돼서가 아니라 아무런 감동 연출 없이 훅, 너무 헌신적이고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장면이 투명하게 눈앞에 들이밀어져서였습니다. 생각해보면 현실 세계의 감동도 늘 그렇게 옵니다. 잔잔하게 흘러가다가도 문득 누군가의 최선과 진심이 반짝 빛나죠.

어그로 특화, 시청률 견인기 강은미 중사님의 스타성

솔직히 사이렌의 출연자 중 몇몇은 그토록 치를 떨며 싫어하던 개저씨 그 자체, 개저씨의 현신이었습니다. 결코 쿨하다고는 할 수 없는 캐릭터죠. 저는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을 꾹 감았으나 그건 약간의 해방감과 큰 즐거움이 수반된 외면이었어요. 아악 ㅜ 이 아니라 꺄악>.< 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갑자기 웃통 벗어제끼더니 손으로 장작을 찢고, 삽질하다가 난데없이 하이야아아ㅏ아아ㅏㅇ~~~!!! 하는 기합을 질러버리는 여성들이 너무 웃기고 귀엽고 징그러운데 별 수 있나요. 그런 캐릭터조차 담백하게 연출해버려서 더 좋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의 명함 뒷면에는 각자의 ‘인생 책’이 인쇄되어 있는데요. 거기에 적힌 저의 인생 책은 <스토너>이고 한 줄 평은 “우리가 소설에 원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진짜 인생 책은 다른 거예요. (회사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책만 등록할 수 있어서... 못 넣음^^)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소설인데요. 이 책은 우리가 소설에 원하는 모든 것을 주고 거기에 기대하지 못했던 것까지 담겨 있습니다. 기대를 뛰어넘는 충만함이 그 책에 들어 있어요.

사이렌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친구들하고 다같이 이 쇼와 출연자들의 좋음과 멋짐에 대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 누구는 갑자기 운동을 시작하고 싶어지고 누구는 씨름 경기 관람을 찾고 누구는 입대를 꿈꾸는(?) 이 모든 게 너무 재밌고 즐겁습니다. 저도 봉인되...었다기보다 그냥 스스로 봉인했던 요가 매트를 다시 끄집어냈다가 그 뒤로 이틀 동안 근육통에 시달렸어요. TV쇼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재미라면 사이렌은 그걸 넉넉히 챙겨줍니다. 그에 더해 조금 더 나아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해준다니 이렇게 인심 좋은 사이렌 안 볼 이유 대체 어디에?

저도 같이 갯벌 뛰고 싶어요  

연출로는 절대 나오지 않았을 영화보다 더 멋있는 장면들도 그렇고, 결국 @@팀이 우승하는 결말도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서사가 아니었을까 해요. 제가 응원하는 팀이었어서 이러는 거 아님! 어느 팀이 우승해도 각자의 멋짐이 있고 그 각각의 서사에 미치는 사람 수만 명이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개인적으로는 ##팀이 우승하는 이야기가 더 취향이었겠지만, 그래도 ‘불의 섬’에서 @@팀이 승리했다는 게 안도와 행복을 줍니다. 이것까지 해리포터 같은 서사라서 웃기네요. 역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다 비슷비슷한가봐요. 아무튼 이렇게 사는 게 맞다는 위안과 확신은 누군가의 외로움도 덜어주겠죠!

깨끗하고 건강하고 의리있고 깔끔하고 멋진 사람들을 무더기로 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 정말 잘 만든 웰메이드 쇼예요. 잘 만들었고, 재밌다. 이거면 된 거 아닐까요? (지금까지 구구절절 떠들었지만...) 시즌 2 꼭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땐 매주 1편씩만 공개해서 사람 피 말려보는 건 어떨까요? 누구보다 열심히 일상이 망가진 채로 사이렌 염불을 외며 불꽃 홍보할 자신이 있습니다. 매번 그랬지만 오늘도 의식의 흐름 오졌죠...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진심입니다. 제발 한국인이라면 사이렌 봅시다.

    
[추천합니다😎]
  • 넷플릭스 <외교관> 
사이렌을 보다가 너무 심장이 조이고 스릴이 넘쳐서 잠시 마음을 쉬고 싶으시다면 이 드라마 어떠세요? 뻥입니다. 다른 종류의 스릴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이 드라마를 보세요. 외교라고 하면 몸보다는 머리를 써야 할 것 같은데 <외교관>의 주인공은 언제든 어디로든 달려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목표가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평화라는 점에서 사이렌의 출연자들만큼이나 멋진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예요. (인물과 연출의 멋짐에 비해 스토리의 허술함은 어느 정도 감안하셔야 합니다.)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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