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오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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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모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국내에도 꽤 알려진 인물입니다. 학문적으로도 공인된 학자이지만 오늘날 과학의 의미를 서양의 긴 철학적 전통과 연결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솜씨가 뛰어납니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에서도 그 기량은 여전한데, 이번에는 특히 자신의 학문적 이력에 관해 비교적 소상히 소개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책에서는 접하는 문체나, 얼굴 사진에서 풍기는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일찍부터 환경에 쉽사리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키워나갔던 푸른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헤쳐나온 과정은 우리 사회의 어떤 세대가 지나온 파노라마와도 겹치는 부분이 많아 보입니다.

나는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과학 연구에 바쳐왔지만 사실 처음부터 과학에 열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과학보다는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이탈리아의 베로나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조용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개인 회사를 운영했던 아버지는 탁월한 지식을 지닌 분으로, 사려 깊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어머니는 외동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엄마로, 초등학생 시절의 내 '탐구 생활'을 아낌없이 도와 배움에 대한 나의 욕구를 채워주셨다.

베로나에서 다녔던 고등학교는 매우 고전적인 곳으로, 수학보다는 그리스어나 역사 과목을 더 많이 가르치는 학교였다.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과시적이고 지방색이 짙었다. 게다가 지방 부르주아 계급의 정체성과 특권을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학교였다.

1960-1970년대는 세대 간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지만 주위 어른들 대부분은 변화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성세대는 소극적이고 무의미한 태도를 완강히 고집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어른들을 신뢰할 수 없었고, 선생님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성세대를 비롯한 권력을 가진 모든 것들과 계속해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사춘기는 그야말로 반항의 터전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혼란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기성 가치들을 모두 거부하다 보니 그 무엇도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확실한 건 눈앞의 세상이 올바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삶의 방식과 관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직 읽지 않은 책 속에 눈부신 보석들이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볼로냐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기성세대와의 갈등은 우리 세대 전체가 겪는 과정이 되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바꾸고 더 정의롭고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고, 살아가고 사랑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고 싶었으며, 또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드는 등 무엇이든 시도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늘 사랑에 빠져 있었고 끊임없이 토론했으며 사물들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혼란스러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상의 서막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한 순간들도 있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꿈을 꾸며 살아갔다. 우리는 함께할 친구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상상 속 여행과 길 위의 여행을 수없이 떠났다. 나 역시 스무 살이 되자 세계 곳곳을 오랫동안 홀로 여행했다. '진리를 찾기 위한' 모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50대가 다 된 지금 천진난만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지만 잘한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게다가 나는 지금도 그때 시작한 그 모험을 어떤 형태로든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터무니없는 희망과 끝없는 꿈들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 희망과 꿈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로지 용기 뿐이었다.

나는 볼로냐에서 친구들과 최초의 해적 라디오 채널 중 하나인 '라디오 앨리스Radio Alice'를 만들었다. 우리의 마이크는 전파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라디오 앨리스'는 실험이자 이상향이었다. 곧이어 나는 그중 두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1970년대 학생 운동에 관한 책을 썼다. 하지만 혁명에 대한 희망은 순식간에 억압당했고 사회 질서가 다시 우위를 점했다. 세상을 바꾸기란 쉽지 않았다.

이후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면서 나는 예전보다 길을 더 해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의 절반과 함께 나누었던 꿈이 벌써 쇠락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사회적 지위 경쟁에 합류해 경력을 쌓고 돈을 벌어 권력의 단맛을 보는 것,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아직 탐험해야 할 세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구름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떠올렸다.

그때 과학 연구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거기서 나는 자유롭고 무한한 공간을, 이전만큼 놀라운 모험을 발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공부란 시험을 통과하고 군복무를 미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에 흥미를 느꼈고 그것에 열중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딪힌 순간, 나는 과학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무한한 숫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는 과학은 내가 주위를 둘러싼 것들을 마음껏 탐구하고 자유롭고 눈부신 길을 따라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에게 과학이란, 변화와 모험에 대한 욕구를 포기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즉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게 해주면서도, 동시에 그런 삶이 내 주변 환경과 부딪혀 일어나게 될 갈등을 최소화시켜주는 일종의 타협점이었다.

나는 수많은 지성적, 예술적 업적이 비슷한 상황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과학은 잠재적 이단아들을 위한 일종의 피난처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역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우리 사회는 이런 이단아들을 필요로 한다.

나는 각 세대마다 나타나는 젊은이들의 호기심과 변화에 대한 욕구가 사회 발전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고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으려는 권력층의 곁에는, 새로운 영역과 참신한 생각을 추구하는 사람들, 현실을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획기적인 방법들을 찾아내는 데 몸을 던질 수 있는 꿈꾸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과거에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지금의 사회를 고안하고 형성했다. 우리의 미래를 탄생시킬 수 있는 것 또한 오로지 새로운 꿈뿐이다.

지금 여러분의 꿈은, 모험은 안녕한가요?
새로운 한 주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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